[냉전]"팬티 속에 있어 더 음란한 그것"

팬티 속에 있어 더 음란한 그 것. 18세기 화가였던 안젤리카 카우프만은 ‘여성은 누드를 그릴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그것도 남성 누드를 그렸다. 작품 ‘남자의 인체 데생’에는 “나, 마리안네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그리다”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당시로서는 인습과 관행에의 도전이었고 파격이었다. 그녀의 자랑스런 시도는 아쉽지만 이것으로 끝난다.

이후 화단의 남성주의 둑은 조금씩 무너져 간다. 한 세기를 더 지나 파울라 모더존 베커가 그린 여성누드는 성기의 노출을 교묘히 감추면서 여성을 남성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던 그런 누드화가 아니다. 자신을 임산부로 놓고 그린 ‘여섯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은 창조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해석을 달고 다닌다. 그 당당하게 응시하는 눈빛은 ‘내 몸의 주인은 바로 나’라고 힘차게 외치는 듯하다. 이렇듯 그녀의 작품에서 여성은 성욕의 대상에서 해방된다.

21세기의 중학교 교사이자 화가인 김인규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자기 부부의 나체 사진을 올렸다하여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의 홈페이지를 잠시 서핑해 본면, 그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집요하게 그의 관심사인 ‘예술과 삶의 거리’에 대해 깊은 성찰로서 천착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작가로서의 예술혼이 담긴 온라인 미술관인 셈이며, 네티즌들에게는 참신한 문화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딴죽이 걸렸다.

교사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이분법적 논리는 더 부질없고 허황하다. 일부에서 문제 삼고 있는 그의 알몸 사진은 사진 한 장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편적인’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주장을 통해 성을 신비화하고 상품화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저항하고 있다. 그가 팬티 한 장 걸치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지금처럼 불필요한 곤혹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만 ‘전달’과 ‘소통’은 불가능하거나 반감됐을 것이다. 그가 일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문제의 사진’을 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일 터이다.

과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는 팬티 한 장 차이인 것인가?

은밀하지 않으면 ‘좆’도 아니다 . 그래서 앞으로도 교묘하게 성기를 가린 채 꿈꾸듯 흐물거리는 눈빛과 교성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의 작품들은 갤러리에 일군의 발길을 모으게 될 것이고, 팬티를 벗어난 성기는 포르노 사이트에서만 대상화 된 상품으로 창궐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김씨의 작품은 성기 노출이 없으면서도 더 ‘좆’같은 작품들이 넘쳐나는 데 대한 야유이며 시위일지도 모른다. 그와 부인은 작품 속에서 다 벗었지만 마치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누워있는 엄마와 아기’처럼 성적 자극을 주거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남자아기의 백일 사진은 대개가 全裸였다. 그 어린 것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성우월주의가 투사되어 어쩔 수 없이 고추를 드러내야 했지만 어쨌든 아무도 그것을 음란하게 생각치 않았다.

같은 이치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가공된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관음증을 더욱 자극한다. 고로 정작 음란한 쪽은 딴쭉을 건 쪽일지도 모른다. 김씨는 예술을 기본 욕망으로 삼고 있었지만 인습은 외설로 보는 욕망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 ‘성’은 또다시 현실이 아니라 우상이며 상품이고 대상이 된다.

우리의 성기는 장마철 쥐 볕 보듯 잠시 나왔다가 다시 은밀하고 음습한 곳에 갇힐 신세인 것이다.

‘감각의 제국’의 이시다 키치조우처럼… 김씨의 물건이 사법당국에 의해 온라인에서 잘려나가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속 옷 한 장의 탄성 보다도 유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예술적 천박성을 공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絃瑟>

둘- 마쵸에게 미래는 없다.

여성주의, 페미니즘 냄새가 조금이라도 풍기는 곳에
어김없이 출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쵸맨’. 마초들의
주요 전략은 ‘염장 지르기’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버린
후 게시판의 반응을 살피는 것. 자신의 글이 얼마나 사람들
염장을 질렀는가를 차분히 검토하는 걸 인생의 낙으로 삼는다.
그리고 가장 열 받은 사람의 글에 리플을 달아 다시 염장을
지른다. 이런 경우 가장 확실한 처방은 ‘절대, 아무도,
리플 안 달기’. 자신의 폭력적이고 야비한 글에 응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마쵸에겐 가장 쓰디쓴 처벌이며 아픔이다.
 
최근 들어 마쵸들의 전법은 날로 세분화, 지능화
되고 있는데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여자인 척 하고
글 올리기’ 전략이다. 회원가입 시스템을 갖춘 경우라 해도
다른 사람의 아이디를 도용하거나 대화명을 여자인 것처럼
바꾸는 전법을 구사한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게시판에
올려진 마쵸들의 글을 지우다보면 이 남자들이 얼마나 사는
게 외로우면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남자답게(?) 적당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감정이 메마른 자신을 왜 여자들이 인정해주지 않을까…
부모님 말씀대로 부엌 근처에 안가고 착실하게 차려준 밥상,
떠다주는 숭늉 받아먹고 잘 컸는데 여자들이 왜 날 사랑해주지
않는 것일까…하면서 ‘나, 남자야!’하면서 못난 투정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제 남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결코 아버지 같은 남자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젊은 남자들의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으며(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우리들과 닮아 있지 않은가!) 생계부양자로
살기보다는 ‘가족의 일원으로’ 혹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다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젊은 남자들에게  닮고 싶은 4,50대 이상형이
존재할까?  
기성세대 남성들의 삶을 동정하거나,
부정하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 ‘나는 돈버는
기계로 살고 싶지 않다’, ‘요리하는 게 좋다’, ‘외모에
신경 쓰면서 살겠다’… 남자들의 관심사도 다양해졌다.
80년대 후반 여성주의인식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때와
유사한 현상이다.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남성으로서의
새로운 경험과 삶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내가 여성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나를 설명할 수 없음’이었다.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 욕구들에는 세상이 말하는 ‘여자’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꽤 있었다. 나를 찾기 위해서, 이름 없는 경험들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십여 년을 여성주의자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얼마 전 만났던 한 30대 남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내가 전화로 친구하고 한 1시간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이러는 거 있죠. ‘야,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
전화로 다 얘기 못하겠다.’ 하하. 한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에요.  무슨 일 생기면 득달같이 서로
찾아가고 만나고, 이야기 하고… 그러는 거 보면서 부러울
때가 많아요. 저요? 친구들하고 그런 얘기 안 하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힘을 주고받고 할 만한 기회가
별로 없어요…"
이런 답답함을 남자들끼리 서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 웹진 ‘언니네’에 ‘오빠네
세탁소’라는 게시판에 가면 자기 성찰 적인 남성의 목소리들이
가득하다. ‘나는 매일 부엌으로 출근한다’는 남성의 책도
나와 있으며, 육아를 위해 휴직하는 남편들도 늘어나고
있다.

남자로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10년, 20년 후에 어떤 남자로 살아가고 있을까?…
남자들에겐 취직, 결혼, 아버지 되기..사회적으로 성공하기라는
판에 박힌 미래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남성상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이들에게 남은 숙제는 만만치
않다. 남자들이 주어진 기득권의 벽을 넘어서 ‘열린 인성’
찾아내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버지를 닮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들이 ‘아버지’의 권력까지도 포기할 수 있을까?
 우리 여자들이 독립을 꿈꾸면서도 부모나 남편에
의존한 삶의 안락함을 포기하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들의 정체성 찾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아마 남자들은 계속 새로운 남성상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마쵸에겐 더 이상 미래가 없음을 그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비역이 싫은 몇가지 이유

들어가며 ..

솔직히 내가 가진 예비역에 대한 악감정은 나 스스로가 봐도 비논리적이다. ‘나’라는 ‘발좁은’ 한 인간이
대학사회에서 접할 수 있는 너무나도 수적으로 한정된 사람들을 기준으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건 나 스스로가 현재진행형으로 반성하는
점이라는 걸 미리 밝혀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내가 <예비역이 싫은 몇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맞게 되었다! “아싸! 열라 욕할 수 있겠군!”이라는 반가운 생각 한편으로, 내 조악한 논리가 그대로 드러나겠다는 걱정에 며칠간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감일이 가까워오고 있다.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예비역이 싫은 몇가지 이유>, 제목 그대로 내 생각이 비논리적이건 말건 간에, 싫은 이유를 쓰는 거지 뭐. 난 이래서 니들이 싫다. 그럼 니들이 내 궁색한 논리에 토를 달아라.’
난 그들에 대한 좋은 감정, 내 반성의 지점들을 다 무시하고, 예비역을 100% 적대관계라 상정한 후 욕만 늘어놓을란다. 제목이 <예비역이 싫은 몇 가지 이유>인데 뭘… 안그러우? 그럼 이제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잘라볼까나?

첫 번째 이유, <음담패설>

내가 아는 어떤 언니의 새내기 시절, 예비역 선배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정력가」: 날아가는 새가 왜 떨어지나?

                 지나가는 아저씨가 왜 쓰러지나?
                 그건 다 정력,정력 때문이지요.

                 뱀먹어봐요, 자라먹어봐요,
                 물개먹어봐요

“위 사진은 춘여고를 바라보며 정력가를 부르며 응원하는 모습이다. 하하하-어떤
마쵸의 페이지에서 찾음”

놀라실 거 없다. 어디 이뿐인가? 남의 은밀한 성생활은 왜 그리도 관심이 많은지! 빨간마후라, O양 비디오, B양비디오, 이런 걸 학내에 유통시키는 자들! 이 불법유통업자들의 십중팔구가 예비역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예비역들이 음담패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유가 ‘나이가 들만큼 들었으니 그런 것(?)에 관심이나 욕구가 생길 만하고, 또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능글맞아졌기 때문’이라고. 가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비슷한 또래의 여자선배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험이 많은 여자선배들이라 할 지라도, 성을 희화화하는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담, 이유는 뭘까? 지금 내 글을 읽는 당신, 여자보다 남자들이 성욕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진부한 논거를 대실 텐가? 글쎄, 내가 아는 바로는 여자보다 많이 성욕을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이야기하는 게 보다 진실에 근접한 주장일 걸? 그리고 이것보다 더 기저에 깔린 것은, ‘군대’라는 집단이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조장해내는 ‘매매춘 문화’이다. 구체적인 통계수치가 무색할 만큼, 우리 사회의 매매춘 지역은 군대를 중심으로 비대하게 분포해 있지 않은가? 돈을 지불했으니, 그만큼의 효용을 얻기 위해 매매춘 여성을 될 수 있는 한 즐겁게(!)-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좃빠지게’-갖고 놀아야한다. 2년 2개월 동안 여성을 만나는 통로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라면, 과연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여자들조차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남자를 성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요물 정도로 보일 거다. 그래, 니들 심정 이해는 한다.
근데, 여기서 “나는 절대로 매매춘 안했당께!”하고 이의를 제기하실 매력남 있남?

두 번째 이유, <내리까시란 이름의 집단폭력>

이건 그들이 싫은 이유라기 보다는 무서운 이유…

감히 싫다고 말했다간 맞을 거 같다. 물론 ‘여자를 때리면 미개인’이라는 윤리가 그들에게도 있기에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은 사실
대학사회 내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결혼 후, 살만큼 산 여인에 대해서는 과감히 이 천륜을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태어난 사생아가 이름하여 ‘가정폭력’! 여기서는 가정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않을 거다.
그러나 가정 폭력도 ‘군대’라는 상식 이하의 폭력이
난무하는 집단을 겪은 남성들이 사회에 복귀한 후 몸에 벤 일상적 폭력성이 주원인이라는 점 잊지 마시길!)
그렇지만, 동성에 대한 폭력은 ‘남자들간의 의리’ 혹은, ‘후배에 대한 선배의 애정’ 등으로 미화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폭력은 남자들이 많은 과나, 동아리 뿐만 아니라 남성의 비율이 적은 과의 ‘남자모임’과 같은 희한한 집단에서도 자행되고있다. 대체로 이런 집단 폭력은 한 학생의 잘못이 그 학생의 학번 전체(특히 새내기)의 잘못이 되어버리는 논리적 비약 속에서가능해진다.

예비역의 ‘내리까시 문화’는 이렇게 군대에서의 폭력경험과 함께, 군대의 완벽한
관료주의적 체벌체계(?)는 자신들이 최고의 위치에 있는 ‘학번 질서’와도 정확하게 결합한다. ‘학번’ 문화가 꽉 잡고 있는대학사회에서는 내리까시를 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의 구분은 당연히 학번이고, 학번의 위계를 통해 절대적으로 상명하복의 방식으로이 무자비한 폭력은 행사된다.

학번이라는 이 완벽한 위계 기준은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처지 같은 건 전혀고려될 수 없게끔, 누가 뭐래도 우리 내부의 획일성을 담보로 고안된 틀이 아닐까? 과연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선배가후배에게 버릇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그 일방향성의 굳건한 틀
자체에 상당한 모순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과연, 당신은?

그들의 내리까시 문화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성을 그들의 집단 폭력에서 제외시켜준다는 것, 그것을뒤집어 생각해 보면, 역시 여성은 2등 인간이고, 그들이 몸담은 집단에서 주체적인 위치에 있을 수 없기에, 어떠한 물리적 폭력도가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 가정을 정확하게 결론으로 이끌게 한 논거는 무용학과를 다니는 내 친구가 제공해줬다. 이 자리를빌어 내 칭구 윤모양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이야기인 즉슨, 무용학과도 내리까시 문화가 엄청나단다. 꼭 군대를 갔다와야 군사주의에 찌드는 것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다른 점은,무용학과의 몇 안되는 남학생들 역시 여학생들과 똑같이, 혹은 더 심하게 내리까시를 당한단다. 여성은 몸이 약해서 어쩌고 저쩌고하지만, 결국에는 주인공과 떨거지들을 이렇게 대대로 내려오는 추풍악속(↔미풍양속)의 경험을 통해서 공유하겠단 얘기인가 보다.잔인한 것들..

세 번째 이유, <술자리에서의 성/폭/력>

지들끼리 음담패설 지껄이고 끝낸다면, 지들 입만 열나 아프지 우리 비예비역들한테는 피해가 안간다. 근데, 과연 그들은 그렇지 않다. 내 경험을 하나 소개해볼까?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오늘은 딱 두 개만 한다.

먼저 1번 경험 앞으로! 선배라는 사람이 군대 휴가를 나와서 술자리에 합류했다. 난 당시 새내기 신분으로 과 술자리에 빠짐없이참석하던 착한 학생이었다. 우째우째하여 나를 기준으로 반경 2미터 내에 예비역 및 예비역과 비슷한 칙칙한 느낌의 남자선배들만깔렸다. 기분이 별로 안좋았지만 입 닫고 술만 먹었다.

그들은 내가 조용하자 “이때다!” 했는지, 포르노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모이면 수식어도 보통때랑 달라진다.(말안해도 아시겠지? 지들의 성기를 욕으로 사용하는 기행동 말이다.) 그들은 계속 해서 강도 쎈 음담을 지껄이더니, 술취해얼굴에 열이 오른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XX(내 이름), 얼굴 빨개진 거 봐라.” 그땐, “아닌데요?” 하고 치웠지만,당신은 아시는가? 그때 당신이 성폭력의 가해자였단 사실을! 내가 그때 얼마나 기분이 더러웠는지?

두 번째 경험, 그들은 술자리에만 가면 왜 그리도 추해질까? 나는 똑똑히 보았다. 한 켠에선 새내기의 생일잔치, 한 켠에선예비역 모임으로 우리 과 사람들이 뽁짝뽁짝하던 그 술집, 새내기 여학생들을 차례차례,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지들의테이블로 불러와 술을 따르게 한 당신을! 당신은 물론 남녀가 함께 사는 세상인데 여자가 남자한테 술따르지 말라는 법 없느냐라고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봐라, 이 사람아! ‘다 늙은 예비역 모임의 술자리에 예쁘장한 새내기 여학생이 웃으면서 술을 따르고 있다.’
옷만 살짝 바꾸면, TV서 본 넥타이들이 룸싸롱 혹은 요정에서 기생의 접대(!)를 받는 모습이 아닌가? 아, 놀라워라! 저 유비무한의 정신!
취직해서 접대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벌써부터 곗돈 부어서 단란주점이고 룸싸롱이고 다 섭렵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작태를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양심이 좀 찔리긴 했다고? 휴~ 그래, 다행이다. 분발해라이! 그러나, 조만간 당신의 실명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이니 기대하시길!

네 번째 이유, <나선다? 그러나 게으르다>

그들이 무쟈게 나선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수업시간에 짜는 발표조모임에서 그들은 절대적으로 ‘조짱’의 권력을잡는다. 수업시간에 쓸 데 없는 질문하는 사람들도 십중팔구 예비역들이다. 그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서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질문을하고 교수님 눈에 들겠다는 건 뭐라고 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질문에 내용이 쓸 데 없다는 것! 오~안하무인의 자신감이여! 저학번 남학생이나 여학생들은 질문 안하나? 걔들도 가끔씩 쓸 데 는 질문한다.

하지만 예비역들이 사고하는 바, 대학사회는 연령을 기준으로 한 지식위계집단이기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별로 없으니, 나보다똑똑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니까 내 쓸데 없는 질문에 대해서 열받아하기 보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 “교수의 한마디한마디에 사사껀껀 시비거는 오빠, 멋져!”하며 반할테니, 과감하게 질문해준다! 이것이 그들의 자신감의 원천이다. 허걱! 근데,이를 어쩐다? 나처럼 니들보다 나이는 적지만, 훨 똑똑한 아그들이 꽤 있으니, 니들 질문의 허구성을 알아채고 뒤에서 호박씨깐다. “아까 교수가 설명한 내용 왜 또 물어보는데? 졸았나?” 혹은, “기자 회견하나? 니가 고민할 걸 왜 교수한테물어보는데?” 보다 더 열받았을 경우, “앗따! 수업 종친지 수십분 지났소!”

그들은 이렇게 교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단발성의 노력들은 무한대로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짱을 맡은 조모임의 활동은 무쟈게게으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신문사로 따지면 ‘편집장’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그들 스스로가 뛰어서 얻는정보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연륜을 통해서 얻는 풍부한 경험들로 후배가 검색해온 자료들을 채점해주고 검열해주는 빠알간펜선생님이라고나 할까나? 후배 입장에선 열받지. 열라 자료 찾아서 읽고 생각해서 왔는데, 아무 것도 안한 예비역 선배 왈, “니틀렸어, 다시 해와.”

그들이 게으른 이유는 어쩌면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권위 하나에 살고, 권위 하나에 죽는 그들이 실제 과제 작업에 참여해서부대끼면, 본인들의 무지, 무능, 무경험이 드러나기에 빠알간펜 선생님의 권위에 안주하는 거다. 왜, 선생님들도 실제로 자신들의담당과목 시험을 치면, 성적이 쥐뿔로 나온다고 하잖아?

다섯번째 이유, <지구를 니가 지킨다고?-울트라 수퍼 코믹 독수리오형제>

삼류코믹스도 유분수지. 지들은 지들이 무슨 독수리 오형제라고 생각하나부다.
누군가에게서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비디오가 ‘역사에 대한 강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베트콩들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모습은 진실을 왜곡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어디서 그말을 줏어듣긴 들었는지,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조성모의 팔뚝에 새겨진 백마부대 마크를 보고서 정의의 용사 ‘베트남 참전백마부대 전우회’ 들고 일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몰살당한 적 없다! ‘무적 백마’ 우리의 존심을 추락시키다니, 비디오 틀면죽어!”라고 헛다리를 짚으면서 말이다.  

헛다리라도 그들의 완력은 한국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었는지, 문제의 <아시나요> 뮤직비디오는 공중파를 몇 번 타지 못하고 재촬영할 수 밖에 없었단 이야기다.
하나는 역사에 대해 강간을 하고, 하나는 그걸 헛다리로 비판하고 소송을 걸겠다 협박을 하고… 근데 그게 이런 위력을발휘하다니! 여러분은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코메디를 준엄한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즐겼다는 거다. 얼마나 웃겼으면 눈물이다 난다.

아~
정의의 용사들이여!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의 베트남 양민 학살사건에 대한 발뺌하기와 언론탄압은 또 어떠했는가? 지들이 하는 짓이라면사람을 죽이고도 ‘정의’란다. 시민단체가 그렇게 비판하는 ‘주한미군’과 한치의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버금가는 예비역 사나이들이 또 존재했으니, 동네 수퍼마켓 둘당 하나 꼴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해병대전우회>라는 거다.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해병대 전우회>는 주말 저녁마다 불고기 파티라도 여는지, 소음이장난이 아니다. 음악소리는 음악이라 즐겁게 들을 수 있지만,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그들의 술먹고 욕하는 소리는 정말이지괴롭다. 이것이 공개질의라도 하고 싶다. 도대체 동네동네마다 짱박혀 있는 그 수많은 해병대 전우회는 뭐하는 곳인지! 진실로당신들이 음주가무단체라면 이웃에 피해는 안가게 즐겨주셨으면…  

아~
만국의 <독수리 오형제>들이여! 이제 제발 날개를 접고 편히 쉬시길!

여기까지가 내가 쓴 <예비역이 싫은 몇 가지 이유>이다. 물론 더 쓸 수 있지만(잘 안씻는다. 칙칙하다. 분위기흐린다. 등) 현재 예비역들의 체면을 고려해서 이쯤에서 멈추겠다. 사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한다면, 확실하게도 내가 예비역을’주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일천하에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기에 니들이 생각하는 ‘오바’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하지만, 앞에서 다뤄진 충격적 일화들은 100%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예비역분들께서 비판을 하시더라도 ‘사람잡네’, 혹은 ‘소설쓴다’ 등의 긴긴 비판은 한허리를 비혀내지 말고, 걍 통째로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두시기 바란다.
그럼 이만..             ▒  하얀자두

남자(?)에게서 절대 들을 수 없는 군대이야기

-예비역이 본 군대와 예비역 문화

처음 이 기획을 하면서 군대나 예비역문화에 대해 잘 이야기해 줄 분을 찾았다. 그러던 중 호철 선배를 만나게 되었고, 선배와차례의 인터뷰를 하게되었다.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군대의 이야기들.. 그리고 군대라는 공간에서 가질 수 있는 느낌들..
이런 것들을 듣고 우리는 선배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기로 했다. 이 기사는 마지막 3번째 만남에서 나왔던 많은 이야기와 앞의 두 번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이다.

호철 : 딱
보니까 예비역 같나요..

리나 :
<한참을 망설이다.> 네.. 음.. 실례인가요. 음.. 예비역 같다기보다 나이가 좀 있으신 것 같아서..

호철 : 제가 있잖아요. 우유부단하고 논의에 빠지면 중도로 가는 입장인데.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군대 이야기를 하면 양쪽이 다 아니다. 뭐, 그런 생각. 예비역들이 군대 갔다와서 예비역 문화를 형성하고 뭐,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거든요. 저도 참석하게 되면 워~하면서 같이 어울리지만 사실은 떨쳐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고, 반면에 여학생들이나 군대를 모르는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면 군대에 대해 너무 싸잡아 이야기하는 경향들이 있어 좀 그렇더라구요.

제가 1학년 때 군대에 대해 고민했을 때 약자 강자 관계로 보니까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가질 수 있겠더라구요. 차별로 말하게 되면은 군대갔던 사람들도 차별을 받는 것인데, 그런 것은 없어져 버리잖아요. 물론 예비역이 되면 특권이 많아요. 군가산점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특권이 없어지면 또 다른 어떤 특권이 생기죠. 리포트나 학점을 잘 준다거나. 대학원 같은데도 가기 쉬워지죠. 그렇지만, 그런 보상들은 사실 예비역 스스로가 찾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그 속에서 이런 문화가 형성되는거죠. 전 2년 2개월에 대한 보상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보상이 다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군대를 간다는 것은 막말로 전투가 터지면 총 쏘아야 된다는 거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그런 생각 속에서 그렇게 2년 이상을 살았는데,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심리를 고칠 수가 없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사회제도적인 보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어떤 문화적인 보상을 원하는 거죠.

리나 : 그게
문화적 보상? 그게 어떤 거죠. 잘 모르겠군요..  

호철 : 그게
가산점이나 대학원.. 뭐, 이런 식의 보상은 불쾌해요. 저 같은 경우는 받아들이기 싫어요. 그런 보상은 아직 군 생활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문화적 보상이라는 것이 군대 이야기 하루종일 해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문화예요. 군대에서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하지만 여자 애들한테 그런 이야기하죠. “상병보다 일병이 높은 거예요?” 그런 이야기 듣죠. 그럼 억장이 무너져요. 하지만, 그런 것이 현실이거든요.  

리나 : 하지만, 남자들이 하는 대부분의 군대 이야기는 그냥 다 힘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겨냈다. 그냥 그런 것이 있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안 하잖아요. 선배님이 좀 해주시겠어요?

호철 : 군대에서
가장 힘든 게 뭔지 아세요? 단절과 뒤틀림이예요.물론 살면서 뒤틀림은 다 있거든요. 없을 순 없죠. 그렇지만 군대에서의 뒤틀림은 해소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 뒤틀림이 풀리지 않죠.  

리나 :
뒤틀림이요? 그게 뭐죠? 어떤…

호철 : 하나
예를 이야기 해 드릴께요. 군대는 가장 작은 단위가 분대 8명인데 저희 분대 중에 군대라는 구조를 이용해서 나를 갈구든 정말 나쁜 놈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상근 예비역이였거든요. 일년만 하면 되는 놈이었는데. 정말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놈이에요. 그 사람이 쉽게 빽이라고 할께요. 그 빽은 그 바로 위에 착한 고참한테 대드는 놈이었죠.  그런데 은연중에 군대 내에서 그 착한 고참에게 개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되었죠. 저도 고민이 되죠. 사실 제가 개겨야 할 대상은 그 사람이 아니라 대대장이죠. 우리 왜 이번 달 부식이 일었냐. 왜 휴가 잘 안되냐..
내 고참하나 잘 있다가 분대장한테 전화 받고 왜 갑자기 보일러 병으로 가느냐.. 그런데 착한 놈한테 개길 수 있게되니까. 고민이 들죠. 그래도 착한 놈이니까 내가 저 사람한테 개기느니.. 아까 그 나쁜 놈 백한테 개기는 게 내 윤리에 양심에 맞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고 내가 솔직히 백한테 개길 용기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저 사람한테도 개기지 말자. 사실은 그 착한 고참도 좀 그런 게 있었는데, 분대에서 자신의 입지가 있으니까. 재미있게 같이 잘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앉아 일어서 뭐 이런 것 시켜놓고 괜찮냐?하고 챙기고 뭐 그런 식이었거든요. 그래도 빽만 하겠어요. 빽은 뭐! 남자로써 모욕적인 느낌을 같도록 행동도 하고 여자 후배 많다고 편지 쓰라고 하고…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졌죠.. 그 착한 고참이랑 근무를 서는데.. 그날 따라  착한 고참이 먹을꺼도 주고, 편히 쉬라고 자리도 내어주면서 그리고 아주 많이 미안해하면서 그곳에서 자는거예요. 근무서면 다른 고참들은 다 자는데 이 사람은 먹을거도 주고 미안해하니까. 하여튼 그렇게 자다가 다음 근무지로 옮길 정도 때 일어나더라구요. 그리고는 근무 잘셨냐? 하다가 또 갑자기 ‘얻드려버쳐 일어서’를 시키는 거예요. 황당했죠. 그래도 시키는 데로 했는데 잘못해서 총을 떨어뜨린 거예요. 그런 본 그 고참이 화이바를 가지고 제 머리를 10정도 패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그 고참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었죠. 결국은 그 고참에게 저도 개긴 거죠. 하여튼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런게 뒤틀림이에요. 결국 군대라는 그러한 상황이 내 윤리적 허용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했고, 그런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면서 저도 피해자가 된거죠. 그렇게 안하고 싶은데..

이건 하나의 예이고 군대에서는 그런 식의 뒤틀림을 많이 갖게 되요. 그리고 그것이 계속적으로 풀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경험이 고정화되죠. 그것을 어떤게 푸느냐의 문제인데, 그런 것들이 보상심리랑 같이 작용하는 거죠.

‘헌텀의 최후’라는 영화가 있는데 내용이 어떤 비행기에 엄청난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탄 거예요. 그래서 이론적으로 그 안의 사람들이 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착륙을 못하게 했죠. 그러다가 아이슬란드의 아주 외진데 착륙을 시켰는데 어떤 여자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 가지고 그 비행기에서 뛰어나갔어요. 그리고 바로 총에 맞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 총 쏜 그 병사에게 윤리적인 잣대를 되어선 안된다고 봐요. 그런게 가능한 것이 군대거든요. 하지만 문제는 결국 있는 것이고, 저는 그 뛰어나온 여자를 쏜 병사의 윤리를 한번 믿어보는 그런 식의 해결책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예비역도 마찬가지죠. 예비역이 그런 구조 속에서 그 과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그러한 구조속에 다 고착화되는 것도 아니고 예비역 자체가 순화시킬 수 있다고 봐요. 물론 구조자체를 바꿔야 하는 문제는 맞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다 구조 속에 넣어버리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리나 :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그 뒤틀림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 부분을 좀 믿어야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하신 것 같은데 그 방법이 어떤 것인가요?

호철 :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뒤틀림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저놈은 ‘정말 쨉씰한 놈이다.’라고 이렇게 안 봐줄 사람이 있어야죠. 그래야 이야기가 되니까. ‘군대에선 다 그렇지 괜찮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나보고 너무 쨉씰하다 이런 말도 듣기 싫고 진짜 내가 말하는걸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 그게 어떤 상황인지를 이해하고 그걸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리나 : “그래도 계속 말한다고 해서 해소가 될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경험 안한 것과 경험해서 그것을 푸는 것과는 다르잖아요.

호철 : 물론 기본적으로 군대가 민주화가 되어야죠. 아까 빽이란 사람 한사람만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군대라는 구조내의 진짜 모순을 해결해야 하죠. 군대가 그렇게만 되도 나온 애들이 그렇게 보상심리나 피해심리를 안 가져요. 군인이 본연의 기능을 하길 바라는 거죠.

리나 : 아직도 전 군대 민주화라는 것이….?

호철 : 그런거죠. 상병이면 상병이 할 일이 일병이면 일병이 할 일이 있죠. 그런 그렇게 정해진 일만 하자는 거죠. 물론 전쟁이 터져서 소대장이 총 들고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해요. 전투가 터졌는데 내가 내 하나의 인간의 기본권으로 내가 왜 나가야 하냐.. 이런 논의를 철학이나 종교로 가서 해야하는 되는 거예요. 그런 것 말고. 훈련을 안 뛰거나 전투적인 상황이 아닐 때는 진짜 ‘니가 쫄병이니까 가! 힘든 일 있으니까 니 가! 이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되면 피해의식이나 보상심리가 만들어지겠죠? 내가 2년 동안이나 비록 사회에는 있지 않았지만 군대에 있는 나는 사회에서 있는 나와 동일인물이죠. 사회에서의 인식과 경험들을 가진 인간이 가는 공간이죠. 따라서 군대는…

리나 : 단절된 공간이 아니라..

호철 : 그렇죠. 군대를 없앨 수는 없으니까? 군대가 변해야 된다. 지금보다 더 억눌림이나 뒤틀림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고 그러면 피해나 보상심리가 있더라도 이렇게 왜곡되게 표출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단적으로 이런 거예요. 군대에서 공부시켜 주면 돼요. 그런데 지금은 군대가서 이등병? 책 못 펼쳐요. 모르죠! 나 성경보다가 하이바로 맞은 적도 있었어요. 그리고 일간 스포츠 넘겨보다가

리나 : 어디서 보냐구요!!

호철 : 그런 거물어봐요. 그것도 군대마다 틀리거든요. 저희 분대는 상병 될 때까지 스킨도 못 썼거든요. 저는 원래 스킨 안 쓰지만 지퍼 라이터도 상병 될 때까지 못쓰고 그런 게 있다구요. 이런 것만 해소되어도 그렇게 가산점에 매달리고 그렇게 안할껄요? 왜냐면 자기가 거기서 창의적인 생활 많이 하고 오히려 건강에도 얼마나 좋아요.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일주일 동안 400Km를 걸어요. 생각해보세요 여기서 서울까지 걷는 거예요. 그것도 옛날에 걸어서 한달 동안 간거리잖아요. 그걸 일주일 동안 걸어요. 40Km씩 한번 걸어보세요. 사점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런걸 느끼게 돼요. 그런 거에 대해서 보상을 해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한번 해보고 싶은 거예요. 군대는 그런 거 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근데 그런 게 내무반에 돌아왔을 때 쉴 수 있고
다쳤으면 다쳤다고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죠.

전 사람들이 군대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여성들도 자신의 문제잖아요. 자신의 애인이 그리고 아들이 가는 문제인데 그렇게 모른다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또 시민단체나 이런 곳에서도 군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방부에서 택도 아닌 미사일 들여놓고 뒷돈 받는 것 그런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또 진짜 그 돈이 병사들을 위해 쓰여지는지 이런 것을 감시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만 된다면 국방비 때문에 세금 올리는 것도 사람들이 반대 안할껄요. 자기 아들이 군대에 가서 편히 산다는데 누가 반대하겠어요? 그리고 실재 잠정적 국방비가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휴가 나와서 애들 돈 쓰는 거 보세요. 그게 다 국방비잖아요. 솔직히..

제 이야기를 정리를 좀 하면, 어짜피 군대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분단상황에서 모병제로 바꾸는 것도 힘들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안 된다면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좀 통하는 곳으로 만들자는 거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정확하게 치료받을 수 있고, 자기하기 싫다고 다른 사람 시킬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닌 곳으로요.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뒤틀림도 줄어들 것이고, 그럼 보상심리나 이런 것도 많이 없어지겠죠. 그리고 사람들이 군대를 갔다 온  것에 대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기지도 말았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갔다 온 것이잖아요. 자랑스럽게 여겨야죠. 뭐 누구 사법고시 합격 뭐, 이런 플랭카드 말고 누구 재대하다 이런 플랭카드가 붙어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예비역들을 좀 이해해달라는 거죠. 그렇게 뒤틀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그리고 예비역 자체가 그러한 군대에서의 경험을 떨쳐 일어날 것을 개인적인 힘들을 믿어야 한다고 봐요.

리나 : 음.. 그렇군요.. 그렇게 보면 저도 참 군대에 대해 몰랐던 것 같아요. 막연히 힘들겠지 그 이상이 아니였던 것 같은데.. 참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곳이군요.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할 것 같아요. 군대에 의해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고 그것은 실제로 여성에게 많은 피해를 가져오는 것이니까요. 많은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호철 : 아니요. 저도 잼있었어요.

리나 : 그럼.. 저희 월장 나오면 연락드릴께요..

호철 : 네.. 그럼.. 안녕히..

리나 : 안녕히 가세요…

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불편했다. 그리고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주인공인 불쌍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친 지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영화가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군대에서 살인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자신이 살인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경험은 그 사람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들고 그는 호철님의 표현에 따르면 아주 커다란 뒤틀림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뒤틀림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리라. 하지만, 그가 살았던 사회는 군대와 다를 것이 없었고, 그는 조금씩 세상에 익숙해져가면서 조금씩 미쳐갔던 것이다. 결국 세상에 물들어 가면서 그는 독사 같은 경찰로서 살아가게 된다.

물론 박하사탕같이 군대에서 살인을 경험하는 것은 지금의 시기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군대를 경험하고 나온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있지만, 난 군대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그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뒤틀림을 극복할 수 있을지. 내지는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뒤틀림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세상에 순응하게 된다면, 아마 그것은 나의 잘못일 수도…. 그것을 방관한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리나

<신고합니다>를 신고합니다!

– <TV내무반 신고합니다> KBS(연출: 손봉규)를 보며 느낀 몇가지 생각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시간들 이젠 추억으로 되돌아보네”
갑자기 무슨 이런 삼류시를 들먹이냐고? 예비역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다. 이건 KBS <TV내무반 신고합니다>의 메인테마송 <나만의 이유>의 감동적인 한 구절이다.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이라면 얼마나 공감할 내용인가?

그러나 이런 솔직한 노래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 전체가 예비역들과 현역과 그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시간들”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보자.

“잊고 지냈던 젊은 날의 병영추억을 떠올리고, 신세대들의 솔직함과 발랄함을 엿볼수 있는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고 민과 군의 친밀감을 조성한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군인들의 패기만만하게(=오바해서) 박수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 과거 MBC<우정의무대>랑 똑같은 기획인가보다. 그러나 웹상에 올라와있는 기획의도만 보고 프로그램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직접TV를 켜보자. 오늘은 월요일. 7시 반이면 시작하는군!

이프로그램은 이계진 아나운서와, 개그맨 이용식,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어여쁜'(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출내기 아나운서가”충성”을 외치면서 시작한다. 도대체 무엇에다가 충성을 한다는 말인지?! 뭐,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인 만큼 군인 및 예비역에게과거의 추억들을 다시 돌이키라는 의미에서 <우정의 무대>와 똑같은 인사법을 준수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저 군인은 자기 부대 소개하면서 왜 저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저 멘트 외워서 하는 거 아냐?
허공을 쳐다보며 말하는 모습이란! 어라? 저 사람만 그러는 거 아니잖아? 자기 군대 자랑, 지들이 가진 무기 자랑을 군기가만빵으로 잡혀서, 야~ 한 3일은 연습했겠다. 그 시간에 국토방위는 쨌을까? 짜고 치는 고스톱도 유분수지. 사회자부터 시작해서패널로 나온 사람들(특히 현역들과 한마디 한마디에 감동받아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방청객들)은 마치 연극을 공연하는 배우 같은모습이다. 후훗!    

이 프로그램은 <선배가간다!>와 <병영 수첩>, <병영 쾌지나>, 그리고 <병영 통신>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도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선배가 간다!>와 <병영 쾌지나>이다.

먼저 <선배가 간다!>를 보자. 예비역들이 자신이 제대한 군대를 단체로 찾아간다. 군대의 문 입구에 서자마자 자신들을훈련시켰던 서슬이 퍼런 상사가 나와서 ‘신고’를 받는다. 배가 나온 예비역들은 과거에 과연 이 기합을 잽싸게 받던 현역이었나싶을 정도로 굼뜨다. 그들은 이 기합을 시작으로 화생방훈련, 허공에 있는 줄에 매달려서 건너가기(정확한 명칭은 나도 모른다.예비역들은 날 보고 비웃지 말기 바란다. 난 그런 똥개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럴 수밖에 없단다.), 똥물 위를 줄타고건너뛰기 등등등. 배 나온 아저씨들은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 나라의 현역군인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얼마나 강한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이 나라를 방어하는지, 따라서 군인은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그들은 소감을말하면서 이런 소리를 직접적으로 하기도 한다. “역시, 대한민국의 패기만만한 젊은 군인들 덕택에 우리가 이렇게 발뻗고 잠잘 수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멘트 예술이다.

  이러한 멘트의 전제에는’강인한 체력’에 대한 신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따라서 이러한 신화가 장애인과 체력이 약한 남성에 대한 소외를 가져온다는 것을손봉규PD는 의심이나 해봤을까? 좀 이른 결론이지만 이 프로는 예비역과 방청객 등이 들러리로 선 군대홍보 내지는 군기강화프로그램이라 생각된다.              

그래도 뭐 이정도에서 그친다면 넓은 마음에서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피크, <병영 쾌지나>를 보면 그아량도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특히, 최강의 커플을 뽑는 게임. 여기에 나오는 애인은 다덜 여성(당연히 여자잖아라고 각하시는당신은 세상에는 동성커플도 많다는 사실을 잊고 계시군요)이다.
휴가증을 따기 위해 군인과 그의 애인, 그리고 몇 명의군인들이 한조가 되어 벌이는 이 게임의 특성을 보면, 대체로 여성이 주도적으로 뭘 하는 게 아니라 남자에게 업히거나 안긴상태에서 게임이 진행되고, 성적인 무언가를 암시하는 게임도 많으며, 특히 벌칙은 열에 아홉은 둘이 찐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다.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하니까 업혀서 게임할 수 있다고?

그렇게단순하게 생각할 일만은 아니다. 마이콜이란 별명을 가진 리포터는, 끊임없이 좀 뚱뚱해 보이는 애인에게 구박을 한다. 행여 업다가살짝 갸우뚱하기라도 한다면 뒤에 있는 군인들은 깔깔거리고 뒤집어지며, 등에 업힌 애인은 진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니까 여자는 가벼워야지, 그래야 남자가 짊어진 짐을 한결 가볍게 할 수 있는 거야.”라 훈계하는 듯해 영 보기가 불편하다. 내가 과잉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여자는 자고로 가볍고, 수동적이고, 강인한 남자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가정잘돼, 나라잘돼’하는 가부장적 함의를 못느끼셨는가? “건강한 남성은 여자의 주인, 가정의 주인, 나라의 주인”이라 외치는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이 프로그램은 이렇게 첨부터 끝까지 군대와군인에 대한 찬양만을 늘어놓는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 갑자기 추억의 장소로 돌변한다?벗어나고 싶었던 그 부분들을 다시 조망하면 안될까? 그렇게 하면 전쟁이라도 나는 것일까?
물론 공영방송이고, 해당부대와국방부의 승인을 얻어야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의문점은 남는다. 아니, 정말로 군은<신고합니다>가 말하는 대로 그렇게 유토피아 같은 곳이란 말인가? 너무 빤한 거짓말이잖은가! 아직도 구타와 비리와비이성적인 행동이 난무하는 그 곳을 말이다.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 이 프로를 보고 “역시 군인들은 멋져! 한국군대최고야”라고 생각이 들까? 글쎄, 내 경우에는 오히려 저 play(연극)하는 군인들이 무지 안됐고 불쌍하고, 역시 한국 군대의민주화는 갈 길이 한참 멀었구나하는 답답한 느낌만 받았는데두?  

이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 오른 ‘예비역’이란 아이디로 쓴 글을 보면 여러분 이 프로 70퍼센트는 가짜입니다
군생활 이 프로처럼 되면 정말 할만할겁니다
글구 이 프로 나 군대있을 떼는 아무도 안봤습니다
다 뻥이라서 무슨 잼이가 있어야지요…분통도 터지고…
조금은 각성해야 합니다.. 저는 진실을 원합니다
병영쾌지나같은 쓰레기 코너는 없애십시요
그거보고 있으면 불쌍해 죽겠습니다
안그래도 불쌍한 군인들 거기서는 완전히 얼간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건 내가 현역일때 같이 있던 모두의 의견이었습니다..
아무튼 신고합니다는 제발 사실있는 그대로의 방송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진짜 군인들을 위한 프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다. 하루 빨리 <신고합니다>가 70%의 진실, 아니 50%의 진실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원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뻥’ 좀 그만 치게 비나이다~      
▒  하얀자두

정리하며..

당신은 진정 군인이 아닌가?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에 있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글은 박노자라고 하는 러시아인이 쓴 글로써, 그는 한국학을 전공하는 교수이다. 그는 교환학생으로, 그리고 교수로 많은 시간을한국에서 보내면서 군대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의 통찰로 글을 썼다. 그는 아주 신기한 눈으로 그리고 아주놀란 눈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어떻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군대에 대해 아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그리고 또한 군대를 거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인권마저 없는 이 사회에 대해서, 또한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군대를가야한다는 논리에 대해 그는 혐오스러워 했다.

「”실컷 맞다가 나중에 속시원하게 실컷 때리고, 그러면서 조직 사회의 원리를 제대로 터득하였다. 이제 시키는 대로 할 줄도 알고시킬 줄도 안다.” 함축성이 많은 이 간단한 말을 조금 바꿔서 표현한다면, 본인은 군대에서 폭력을 수반한 권위주의를 잘체득하였다는 것이고, 심적인 폭력(맹종의 강요)과 물리적인 폭력에 대해서 완전히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폭력에 대한 최소한의형식적인 도덕적 평가라도 내릴 만한 인간성마저 파괴된 셈이다. 우리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신성한 맹종 학습의 의무’로이미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군대가 양심 따위의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완전 해방된’ ‘조직 사회형’ 인간들을 양산함으로써파시스트적인 국가의 최대 교육 기관 역할을 했음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나라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한국의 보수 정객들과 재벌들이 필요로 하는 인간상은, 평상시에 ‘상전’을 위해서라면비자금 조성이든 세금 탈세든 필요 없는 자동차 공장 계획 추진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복’이고, 유사시에 아무런 생각도양심의 가책도 없이 동족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강인한 애국자’이다. 출세를 위한 맹종을 유일한 신념으로 삼는 ‘인간 로봇’을만들어 달라는 것은 군대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주문 사항이다.
그리하여 인간 존엄성의 개념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외부로부터의 압박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반발심 등의 ‘불필요한 심적 현상’을 졸병의 마음에서 일소 시켜 버리는 것이군대의 주요 의무가 되는데, 이러한 ‘교육적 과제’를 물리적이 폭력 없이는 성공적으로 수행하기가 힘들다. 대다수 인간들이무의식적으로 자유와 존엄성을 지향하지만, 이러한 자유 지향적인 본능들보다 신체적 통증에 대한 기피 심리가 상대적으로 강하다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면 무조건 시키는 대로해야 한다”는 반사 작용을 졸병에게 강요하려면상당한 정도의 구타가 필수적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이를 개혁하겠다는 보수 정권의 궤변은 한갓 기만일 가능성이크다. 절대 복종을 할 줄 아는 하수인들을 필요로 하는 거대 보수 조직들(군대, 재벌 등)이 존재하는 한, 구타가 사라지기는어려울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타는 한국사회에서 보면 일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공식적으로 학교내의 구타는 법으로금지되었지만, 그것에 대해 다루는 언론들은 하나같이 선생님을 고발한 학생이라는 명목으로 구타를 행한 선생님에 대해 동정적으로그리고 그 학생을 감히 선생님을 고발한 망측한 아이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95학번정도는 그러한 축복조차 받지 못한 세대이다. 나의 동기들의 입에서 종종 나는 ‘3년동안 1000대를 맞지 않으면 그것은 **고학생이 아니다’등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학생들은 다르냐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신체적인 폭력을남학생처럼 가하지는 않지만, 그와 유사한 정신적 모욕이나 모멸감들을 이용한 폭력이 있으며, 또한 남학생과 다르게 순종할 것에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이러한 형태의 폭력들은 굳이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것이 더욱더 무서운 일이다.
대학에서조차 흔히 행해지고 있는 OT라는 명목의 내리까시는 고등학교에서 써클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당해 봤을 것이고,이것은 한때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상상을 불허한다. 이처럼 폭력이 만연해 있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며, 우리는 이것이 별로 중요한문제이거나 나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랐다.

또한 우리의 내리 속에 있는 나이에 대한 개념은 어떠한가? 우리 나라의 특이한 문화 중에 하나인 나이를 물어 보는 습관을 보면우리의 생활 속에는 나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이를 물어본 다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경어와낮춤말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조금 나이가 자신보다 작아 보이면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것이 우리의 예의이며 일상인 것은전통적인 것(정말 전통적인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이다. 왜 그렇게 나이가 중요한 것일까? 왜 나이에 따라그 사람을 가르고 판단하려하는 것일까? 우리는 청소년때 한번쯤 나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를 가르키는 숫자일 뿐 그것이 나를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으리라.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일까? 왜 그러한 생각은 청소년기에사춘기에 잠시하는 생각으로 넘어가고 대학이나 성인이 되면 그러한 나이에 집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처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순종하도록 교육 되어왔다. 그것이 폭력이든 선생님이라고 하는 권력이든, 그리고 사회가 부여한 숫자에대한 권위이든… 그러한 모든 것에 우리는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익숙함은 우리 주위의 많은 것을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예비역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이든 아니면 나이가 많기 때문이든간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니 그들의 권위에 대해 한번도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용인하고 수용하며 살아가고 있다.그것은 예비역 자신의 문제이며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다.

어쩌면 가장 진보적일 수 있는 공간인 대학에서조차 우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을 진지하게 해 본적이 없다. 그것은 예비역이든 아니든간에 모두의 문제이다. 예비역이 군대를 통해 군대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폭력성과 권위성을 대학에 고착화시킨다면 폭력과 권위에일상적으로 물들어져 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폭력과 권위를 너무나 쉽게 수용하며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거지 뭐라는 말로 그냥넘어가며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그냥 대학문화의 낭만적인 한때의 문화로 생각하며 그냥그렇게 넘어가 버린다.

한예비역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군대에서의 2년 2개월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라고. 물론 크다면은 클 수 있지만,24~5년의 자신의 긴 삶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라고, 그렇게 때문에 예비역 문화는 없다고. 그말은 전적으로 맞고 또 전적으로틀렸다.

우리는 24~5년간을 통해 군사주의 문화를 접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2년 2개월의 기간은 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군대라는 공간을 통해 그것이 좀더 체화되고 강화된다는 면에서는 그 2년 2개월의 시간은 크다.

그리고 우리는 예비역에 대해 ‘싫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들의 문화를 거리낌없이 받아 드림으로써 우리는 예비역에 대해 ‘싫다’는말을 할 권리가 없다. 물론 양비론으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군대에 대해 한번도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사회의 분위기와 그리고 그러한 군사주의 문화에 대해 너무나 일상적으로 젖어드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할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들뿐이다.
▒  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