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좌우지간]007 제임스 본드와 북한

007 영화는 재미있다. 스토리가 재미있다는 게 아니다. 그 속에 반영된 선악 이분법을 보면, 평균적 미국인의 텅 빈 꼴통을 채워주는 미제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 악의 제국으로 등장했다. 소련이 몰락하자 이제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악의 화신이 된다. 그러더니 이번엔 악의 화신의 역으로 ‘북한’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시리즈를 계속하기 위해 없
는 ‘적’도 만들어내는 이 바지런함을 보라.

어쨌든 미국이 힘 자랑을 하려면 누군가 미국을 위협하는 가상적이 되어야 하는 바, 미국으로 하여금 MD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북한에게 그 악역을 맡긴 것이다.

이 영화를 위해 제작사에서는 북한군 장교의 역할을 할 한국 배우들을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얘들, 넉살도 좋다. 스토리 그렇게 짜 놓고 한국에서 배우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걸까? 이 미제 영화에 출연하는 한국 배우는 아마 그것으로 배우 생활 접어야 할 게다.

혹시 ‘헐리우드’라는 말에 혹하는 배우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미국의 덜 떨어진 어른아이들을 위한 이 만화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한 한 마디로 비윤리적인 행위다.

왜? 이 영화는 우리의 민족적 이해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미국 수구 꼴통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노골적인 선동물이며, 아시아인을 멸시하는 미제 백색 인종주의의 선전물이며, 나아가 탈냉전의 시대에 억지로 적을 찾아내어 냉전을 영속화하려는 반인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이라고 모든 게 선진적인 건 아니다. 007 시리즈와 같은 미제 반공 영화를 보면 ‘미국’ 국민들의 저급한 수준을 알 수 있다. 하다 못해 한국에서도 국군의 총 한 방에 ‘깨래군’ 세 명이 쓰리 쿠션 먹고 쓰러지는 수준의 반공영화는 70년대에 속하는 문화현상이다.

도대체 미국 국민들은 언제까지나 저런 한심한 영화를 보며 미련하게 입 헤 벌릴 작정인가?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게 체제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있을까?

007 제임스 본드는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본드’다. 이거 들이마시고 헤롱헤롱 거리는 너절한 국민은 전세계에 미국인들뿐일 게다. 쟤들은 언제나 점잖게 문명화되려나.

(진중권/<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

[진보의창]제국주의의 새로운 얼굴

미국과 영국, 러시아 등의 ‘정통’ 제국주의 국가들의 아프간 침공이 한참 진행 중이다. 한때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간의 약 95%를 통일시키고 나름대로의 질서를 잡는 데 성공했던 탈레반은, 이제 ‘주인’ 미국에 대한 ‘배신자’의 신세가 되어 철저하게 ‘팽’을 당하고 있다.

그 다음에 ‘황제’ 부시에 의해서 ‘관직 삭탈’을 당할 제3세계의 ‘제후'(諸侯)는 누구일까?

1980년대에 미국과 프랑스의 후원으로 이란과 싸워 이슬람 혁명의 확산 방지에 ‘일등 공로’를 세웠다가 나중에 ‘배신죄’로 몰려 1990년대 내내 미국 ‘천자'(天子)의 ‘응징’을 계속 받아 왔던 이라크일까? 미국보다 프랑스와 러시아에 더 충실한 관계로 ‘괘씸죄’에 걸린 시리아일까?

어쨌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이번의 ‘절호의 기회’를 십분 이용해서 그 세계 제국에서의 ‘군기를 바로잡는 데’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천하 평정’의 대가로 제3세계 주민의 다수가 비명에 죽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뻔한 것은, 주변부 ‘조공국’ 백성의 생명이 이 ‘신세계’의 ‘황도 사대부'(皇都 士大夫)-즉, 미국과 유럽의 지배층-들에게 하등의 관심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러·친미 세력의 복합체인 북부동맹의 군벌들이 탈레반을 수도에서 밀어낸 지금, 초원의 불처럼 번져 가는 빨치산 전쟁과 북부동맹 깡패들의 약탈 때문에 탈레반 치하에 비해서 구호 물자의 공급이 상당히 줄었다는 사실을, CNN뉴스에서 과연 들을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에 심해져만 가는 기아 사태와 강도·약탈로 탈레반 시절보다 훨씬 많은 아프간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제1세계 귀족들에게 관심사도, 걱정거리도 아니다.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측면에서는, 현재의 제국주의는 19세기의 ‘고전적’ 제국주의나 한국·월남 전쟁 시기의 신식민주의적 제국주의와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사항은, 부시 시대의 제국주의의 전략과 실행 패턴이 또 다른 측면에서 종래의 관례와 상당히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상이점을 낳은 기본적 원인은, 깊어져만 가는 미국 자체의 경제·사회적 위기다.

인터넷 기업의 거품이 빠진 뒤에 기만적인 ‘지속적 성장’의 신화가 깨진 미국, 실업률과 함께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커져 가는 미국, 이미 산업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죄수 비율을 ‘자랑’하는 미국은, 문제 지역에 대한 영토지배를 실시하거나 한국·월남 전쟁과 같은 장기적 지상 침략을 감행할 만한 대내적 명분도, 재정적 자원도 없다. 점차 쇠퇴해 가는 제국인 만큼, 그 ‘천하 통치술’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제국주의적 열강(列强)사이의 경쟁을 최소화시키고 서구뿐만 아니라 러시아까지도 포함하는 ‘백인 열강들의 대동단결’을 꾀한다. CIA 전문적 살인자들이 러시아 첩보 기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프간 동굴의 지도를 활용하면서 빈 라덴과 그 측근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신세계’의 상징이다.

둘째, 생명이 귀중히 여겨지는 자국의 병사보다, 현지 괴뢰들을 예전에 비해서 훨씬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북부동맹과 같은 깡패적 괴뢰들의 편리한 점은, 그들을 마음대로 ‘대충’ 다뤄도 된다는 것이다.

11월 27∼29일, ‘폭동’을 일으킨 탈레반 외국계 포로들을 폭격으로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미국 폭격기가 북부동맹의 세력까지도 오폭해 50여명을 죽였다고 해서 미국이 보상금을 주어야 하겠는가? 미국의 병사와 달리, 현지 괴뢰들이 말 그대로 편리한 일회용 제품이다.

셋째, 미국이 지상군의 대량 투입과 장기적 지상전을 기피하는 만큼, 그리고 러시아 등의 주요 핵 보유 국가와 ‘동반자 관계’를 만들어 낸 만큼, 대량 살상 무기의 이용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번 아프간 침공 개시 때 핵무기 사용 포기에 대한 약속을 의례적으로 요구한 국제적십자사가 미국으로부터 이례적인 거절을 당했다는 것은, 미국 지배층 전략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어차피 빨리 끝날 침공이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오래 걸릴 침공의 경우에는 미국에 의한 핵무기 사용의 가능성마저도 배제할 수 없다.

한 진영으로 합쳐진 제국주의적 열강에 의한 제3세계 백성의 대량 살상의 위험이 커지는 현재야말로, 전세계적인 반제(反帝), 반전(反戰) 연대 투쟁이 가장 시급할 때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교수)

Film2.0 1주년에 부침
영화저널은 어디로 가는가?

항상 기억을 돌아보는 것은 사람을 스노비즘에 빠지게 만든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영화잡지를 만들면서 보낸 나의 삼십대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영화를 구출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고 있었다. 영화는 구경거리였으며, 그저 도구상자였으며, 예술비평가들은 저속하고 타락한 것으로 여겼으며, 철학자들은 단세포의 대중적 활동으로 취급했으며, 대중들은 자신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위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영화 애호가들은 지하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끌어내고 싶었다. 나는 영화잡지가 진지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면이 해방구가 되기를 소망했으며, 영화에 관한 대화가 여기서 시작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경쟁하고, 동시에 연대했다. 이제 우리들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 생각으로 당신들(영화저널들)은 너무 많이 나아갔다. 또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당신들은 손익계산서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영화의 흥행이라는 경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본의 경기장에서 벌이는 경제적 환원주의자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영화보다 영화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잡담에 너무 많은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 다루고 있는 영화가 한국영화일 때 당신은 지나치게 비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를테면 영화저널에서 한국영화는 다 걸작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당신들이 그러는 동안 당신들의 사이트에서 독자들은 당신들에게 맞서고 빈정대고 너희들끼리 놀면 우리는 우리끼리 논다는 섹트주의가 점점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혹시 영화저널들은 해방구를 결국 비참하게도(그리고 끔찍하게도) 자발적으로 게토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말이 Film2.0의 생일에 어울리는 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위해서 Film2.0이 우리 세기에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하소연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영화 애호가들 앞에서 떳떳하게 대답하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저널을 해방구로 만들었습니까?

정성일(키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