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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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2001년
회의와 희망 – 김규항(한겨레)
이른바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였는가.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명료하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인민의 정부는 인민들을 착취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것은 자본과 국가의 공조라는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단순화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 희한한 일은 그런 명료한 답변과 전혀 모순되는 주장이 그 명료한 답변과 늘 함께 한다는 것이다. 주장은 이렇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 근거는 (사회주의가 아닌)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다.”
이 아귀가 안 맞는 주장은 오늘 인간해방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관련지으려는 모든 진지한 모색들에 적지 않은 몽환적 혼돈을 선사한다. 물론, 혼돈에 아무런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지만, 분명히 사회주의의 시도이긴 했다. 바꿔 말하면 20세기에 사회주의의 시도는 대거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했다. 그 비극은 당연히 반공주의자들에게 최종적 자신감(사회주의는 좋은 것일 수 있지만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라는)을 불어넣었다. 그 비극은 또한 강력한 반공주의의 장벽 덕에 현실 사회주의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던, 현실 사회주의의 대외선전용 모델하우스에 안거하던 한국의 인탤리들을 제풀에 무너지게 했다.
비극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비극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카를 마르크스는 물론 그 비극을 목도하진 못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첫 번째 시도가 일어나기 30여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의 삶의 족적에서조차 그런 비극의 편린을 무수히 엿볼 수 있다. 1872년 마르크스는 자신이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터내셔널의 갈등을 보다 못해 결국 해산에 이르게 한다. 만일 내로라하는 국제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그 갈등이 그 갈등의 외피처럼 단지 정당한 견해의 충돌이었다면, 토론과 논쟁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마르크스는 그런 극단적인 해결책을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견해의 충돌을 외피로 하는 그 갈등의 내용 속에 `보편적인’ 인간적 충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질투 욕심 음모 폭력 등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의 근원이자 어떤 숭고한 정신 속에도 능히 암약하는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의 문제였다. 어이없는 얘기지만, 현실 사회주의가 `사회주의가 아닌 것’으로 귀결한 원인 또한 대개 거기에 있다. 이기심은 억압에 처한 상황보다는 억압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강력한 정부는 바로 그 강력함 덕분에 그 정부를 이루는 인간들(빛나는 혁명 이력을 가진, 역시 평범한 인간인)의 이기심을 고양시킨다. 강력한 혁명성과 폭발하는 이기심의 멀어지는 간격은 결국 비극을 낳는다.
이 숙명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민의 정부에 대한 인민들의 `견제 능력’이다. 우리는 요시프 스탈린이 죽었을 때 그 가련한 인민들이 위대한 아버지의 주검을 보기 위해 경쟁하다 수백명이 깔려죽은 일을 알고 있다.(이 일을 두고 어느 한가한 논평가는 현실 사회주의가 `합의독재’였다 말한다. 차라리 합의할 능력이라도 있었더라면.) 견제 능력은커녕 내 주인은 나라는 최소한의 근대 정신조차 갖지 못한 그 인민들은 `사회주의가 아닌 것’을 일찌감치 예비했다.
한국에서 근대 정신이 시작된 건 불과 몇년 새다. 한국인들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말고도 세상을 보는 방법이 여럿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최초의 존중받을 만한 우익들(강준만을 필두로 한 양심적 자유주의자들)이 출현하면서 한국을 장악한 극우 정신의 추악한 가면이 벗겨지고 있다. 중립적으로 피력하자면, 사회주의의 시도에 가장 회의적인 듯한 한국에 사회주의의 시도를 위한 희망이 마련되는 중이다.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
Guest
명동 형, 승연, 정혜님…
오늘 안 나가서 미안헙니다
다음에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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