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에 의하면 한 개인이 자신에 대한 어떤 像을 획득하는지의 여부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우연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가 우연에 좌우된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일만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은 이러한 것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마련인 私的인 성격을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이 그러한 사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주위의 외적인 사실들을 자신의 경험 속에 동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 연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문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문의 의도가,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들이 독자들의 경험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면, 신문은 이러한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며, 그리고 이러한 정반대의 의도는 달성되고 있다. 신문의 본질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영역으로부터 제반 사건을 차단시키는 데 있다. 저널리즘적인 정보의 원칙들, 예컨대 새로움, 간결성, 이해하기 쉬울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각의 소식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점은 신문의 편집 및 문체와 더불어 그러한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칼 크라우스 Karl Kraus는 신문의 어투가 그 신문을 읽는 독자의 상상력을 얼마나 마비시키고 있는가를 지칠 줄 모르고 폭로하고 있다.) 정보가 경험을 차단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정보가 <전통>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은 대량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발간된다. 따라서 어떠한 독자도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가지 전달형식들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관계가 존속해 왔다. 옛날얘기가 정보라는 것에 의해 대체되고 정보가 센세이션이라는 것에 의해 대체되는 가운데 경험은 점차로 위축되어 왔다. 이러한 형식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이야기Erzählung 형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야기 형식은 가장 오래된 전달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사건 그 자체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정보가 바로 그러한 것을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이야기는 사건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보고자의 생애 속으로 침투시키는데, 그것은 그 사건을 듣는 청중들에게 경험으로서 함께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에 陶工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

벤야민이 말하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숙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아니, 생각한다기보다는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경험을 내 것으로 하다니, 내가 어떤 상을 획득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에 대해서 나는 느낄 수 있는가. 구체적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상상력과 개입, 접촉이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것들…우리가 잃어버린 언어들…모두를 포섭하는 보편자에 의해 동일화되고 무미건조하게 짜여진 언어에 의해 분절화됨으로써 생략된 곳, 내가 기거하는 곳…

산딸기 오믈레트

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이 지구상의 모든 권력과 금은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해지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점점더 침울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기의 궁정요리사를 오게 해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오랫동안 충직하게 짐을 섬겨왔고 짐의 식탁을 가장 훌륭한 요리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제 짐은 그대의 요리솜씨를 마지막으로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그대는 짐에게, 짐이 50여년 전 내 나이 한창일 젊은 시절에 시식해 보았던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를 만들어야 하네. 50여년 전 그때 짐의 선왕은 동쪽에 있는 나쁜 이웃 왕과 전쟁을 했었지. 그때 그 왕이 싸움에 이겨 우리들은 도망을 쳐야만 했어.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을 쳐 드디어 어느날 어느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오두막 집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파는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면서 손수 부엌에 나가서 곧 무엇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산딸기 오믈레트였어. 내가 이 오믈레트를 한입 입에 넣자마자 나에겐 기적처럼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

그때만 해도 짐은 미성년의 소년이었고 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이 맛있는 요리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던가를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러나 짐이 훗날 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짐의 전 제국을 뒤져 그 노파를 찾아 보게 했지만 그 노파는 물론이고 그 노파의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대가 만약 짐의 이 마지막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짐은 그대를 짐의 사위로 삼아 이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걸세. 그러나 만약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대는 죽어야만 하네.

이 말을 듣자 궁정요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교수형리를 곧장 불러주십시오. 물론 저는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레트를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레트는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 드셨던 모든 식료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궁정요리사가 이렇게 말끝을 맺자 왕은 한참동안 묵묵부답이다가 곧 그에게 선물을 가득 챙겨 주고는 그를 그의 직책으로부터 파면시켰다고 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

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 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 – 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