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록극, 이윤택의 ‘시골선비 조남명’

왜 ‘서사극적 형식’이라는 수식어를 이 연극에 붙였을까? 나는 ‘시골선비 조남명’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연극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예술은 어디까지나 작가와 작품, 그리고 수용자의 소통 형식이라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나의 질문도 그 소통의 결과물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닷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연극이 서사극적 형식을 정말 차용한 것이 맞는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 연극을 위해 타당한 것인지를 나에게 질문해 보면서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스스로 끌어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이 연극은 유물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서사극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 또는 그 형식과 내용 자체가 유물론적이다라고 믿는다. 유물론은 그 어떠한 관념론도 배격하고 오로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직접 체험하고 있는 객관적인 실재로 모든 시작을 되돌린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은 우리의 사고가 출현하게 된 진원지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지배하고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라는 장막을 걷어냄으로써 실재를 열어 보이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은 이데올로기이기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적 테마가 아니라도 좋다. 공정한 계약관계나 능력의 부족 등으로 무마하고 있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 예술작품이 이것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재미없는 일일까. 이미 온갖 이론서적이 충분히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다만 예술작품이 유물론적이기 위해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의지를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물질적 실체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중력의 장으로 작품이 집중되어 있지만 않다면 우리는 실체성 자체로부터 그 작품만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가상적 세계 안에서의 실재만 말한다면 말이다. –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작품의 가상적 세계가 현실 세계와의 밀접한 관련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이 최소한의 조건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유물론적이라고 허세를 떠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그 중심에 놓고 진행된다. 세계의 중심에다 지식인을 두고서는 조식이 생존하던 당대를 빌어 현실을 말하려 한다. 전통문화 이데올로기에다 양반계급의 우수성까지 가미하여 자화자찬의 잔치를 벌인다. 이 철저하게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의지가 중심이 된 연극이 서사극을 말하려 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연극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없는 사건들의 나열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또 장면의 전환은 막을 내리지도 않고 진행되고 막간은 온갖 노래와 춤으로 메꾸어져 있다. 이 열려 있고 흐름을 끊는 장치들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배우들은 상황 속에 묶여있지 않고 때로는 바깥에서 상황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 황당하리만치 탈상황적인 연기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물음에 대해 부정적이다. 나는 지금 브레히트의 연극과 비교하여 이 연극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의 내용이 담긴 형식이라는 그릇의 진정성을 살피고 싶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연출과 연기의 형식적 요소들 속에서 나는 조식의 당대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가 없다. 유물론적 형식에서 인식은 발을 땅에 딛고 선 내용과의 만남에서 가능하지만 이 연극의 형식들은 딛고 서야 할 땅이 없다. 당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오로지 지식인인 양반 계급의 기회주의적 몸사림 속에 부패한 정치 구조 뿐이다. 당대와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기대는 곳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머리 속 가상의 중심일 따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탈중심화된 형식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중심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중심이 없는 것은 오로지 실재 세계의 사물들 그 자체의 모습 뿐이다. 세계의 사물들이 이루는 무질서의 나열들 속에서 우리는 나름의 질서를 임의로 지워줄 뿐이어서, 예술의 탈중심적 형식들은 오로지 그렇게 무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의 물질적 현실성으로 나름의 객관적 인식을 생산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꾸로 간다. 작가의 인식틀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작가의 의지는 이미 작품의 중심을 구축해 놓았는데도 작품의 형식은 애써 중심을 이탈해 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원심력과 중(심)력은 상쇄되어 균형을 만들어내지만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경우에는 어긋난 힘이 혼란만 거듭한다. 그래서 내용과 형식은 부조화를 이룬다. 부조화 속에 언뜻 비치는 조율의 노력이 형식적 측면에서 발견되는데, 예컨대 무대 전환을 하는 도중에는 조명을 끄거나 노래와 춤으로 그 과정을 결합시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든지, 조식이 조정의 부패 상황을 지켜보더라도 조명은 조정에 집중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더하여 나는 배우들의 연기도 사실주의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배우가 연기하는 무대 위의 공간은 관객들이 참여를 하는 광장이 아니라 – 서사극에서 제4의 벽이란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질료로 삼아 관객이 지적 인식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삼투막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이미 주어진 것들(인물과 사건, 그 안에 담긴 질문과 대답 등)을 제공받는 교단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작가는 굳이 채택한 서사극적 형식이 자신이 담을 내용의 중심력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막연히나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에 대한 나의 비판적 태도의 근원이 작품을 형성하는 동기로서의 작가의 의지가 내용과 형식을 구조화하는 우연의 영역에서 그리 현명지 못한 선택을 한 데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결국 작가의 선택, 또는 연출의 방향은 이데올로기적 자기 확인을 서사극이라는 유물론적 실재 인식의 형식적 요소로 채우려 한 데에서 이 작품의 불행은 시작된 것이리라.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공감을 표시한 아도르노의 말이 생각난다. ‘예술은 간접적이다.’예술은 간접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 작가/연출가나 배우 또는 관객의 – 이데올로기를 투사하여 작품이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직접적인 화답이게끔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작가나 관객의 이데올로기로 묶여버릴 수 없는 존재이므로. 더구나 서사극적 공간은 차라리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충돌하는 공간이자 그것이 (연극적) 현실에 의해 부서지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롭고도 명확한 – 이것을 유물론적 변증법의 과정이라 해두자 – 인식이 구축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적일 만큼 순박한 형식이며(따라서 미적 즐거움은 덜할 것이며)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말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더 말하자면 이 연극의 작가와 연출가는 동일인물이며 배우와 작가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공동생활을 해나가는 상황이니 연극을 창출하는 거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어떠한 변증법적 충돌을 일으킬 일도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들의 강한 일체감이 연극을 만드는 힘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을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무런 충돌과 갈등도 필요치 않은 상태, 자기 확인의 확고함에 기반한 연극이 간접성을, 더 나아가 그 안에 진정성을 담기 위해 서사극이라는 유물론적 형식을 선택한 것은 가련한 한 청년이 달콤한 단어에 우회적인 표현의 연가가 아니라 무뚝뚝한 말투의 직설화법으로 여인에게 보내어 진심을 거부당하는 것과 같은 실수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이후에 본 연극, ‘슬픔의 노래’는 충실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극중 현실은 가상의 세계에만 충실히 머물러 있고 그 안에서 광주 항쟁과 그 상처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세 인물을 둘러싼 사건들이 광주 항쟁이라는 하나의 사건 – 그러나 보여지지 않은 사건 – 에 의해 유지되고 진행되면서 오로지 우리의 의식을 그 하나의 중심 안에 놓이게 한다. 시종일관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극중 가상의 권위를 체감하며 작품에 몰입하고, 이로부터 우리는 생산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의식 전반의 전수라는 것을 경험한다. 내 생각에 사실주의 연극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주의 연극은 작품 내에 스며든 이데올로기적 중심을 간접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힘이 있다. 관객은 그 작품의 가상을 무리없이 그 안에서 이해하고 또한 그래야만 감상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일 ‘시골선비 조남명’이 예술로서의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주의 연극에 더 가까웠어야 했다.

이 글 처음에 제기한 나의 의문은 이 정도로 충분히 논의가 된 것 같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더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연극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실천하는 지식인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연극에 배태된 주된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이다. 이 문장에서 ‘실천’은 ‘지식인’의 수식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연극은 실천을 말하기보다는 지식인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조식의 실천적 면모를 말하려 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중요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실천의 주체이다. ‘배운 자들이 사라졌으니 세상의 중심을 잃었다’나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 등의 대사들은 그것을 웅변한다. 작가이자 연출가 이윤택씨가 전통문화를, 그 중에서도 양반 문화의 격조높은 인식 수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 말은 정확한 근거이다. 높은 지적 수준에 대한 작가의 향수병은 지식과 권력의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강하다. 때문에 조식이 세상에 대해 상소를 쓰는 것은 오로지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며 세상의 중심에다 배운 자들의 높은 지적 수준을 둔다. 그들의 인식 수준이 세상에 중심을 정해주더라도 결국 세상의 만물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당시의 지식인은 지배계급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 쓰는 상소는 피지배 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배 계급 내에서의 권력 분배 문제에 대한 상소일 뿐이다. 지식인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 배운 자 본연의 의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가까우며 그들에 대한 중요시는 자기확인 또는 자위의 폐쇄적 체계 안에서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지식인의 실천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실천을 통한 변혁이며 세상의 중심은 지식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전체 그 자체일 뿐이다.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데 대한 논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자기확인을 경험하는 바, 이데올로기는 폐쇄회로 안에서 응답이 필요없이 이루어지는 자기확인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 때문에 우리는 그 폐쇄회로 바깥으로 나가 때로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 나는 이 작품의 폐쇄회로 안에 참여할 의사가 없으며 차라리 자위를 포기하고 자책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논의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말하여지는 방식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미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미적 영역이 아니라고 엄밀히 배제할 일은 아니다. 미학과 철학, 과학 등의 영역은 명확한 경계선을 지니지 않았을뿐더러 미적 즐거움도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이 작품에 대한 판단에 있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식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서의 이같은 이데올로기가 서사극의 예술적 형식을 상당히 거스르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불균형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을 즐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일 때 더욱 그러하다. 예술을 즐긴다면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고서도 작품의 요소들을 반길 수 있겠지만 예술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작품의 이데올로기는 내 삶의 존재론적 질문과 반드시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자회견문
                              공개적인 ‘이념논쟁’을 제안하며
              
  최근 기성 정치권의 대선 주자들 간에 소위 “색깔논쟁”이 치열하다.
  민주당 내의 대선후보 예비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부상하자 이에 맞선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이념과 노선에 대해 공세를 취하더니만, 이제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까지 가세하여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후보를 ‘좌파’로 몰아붙이기 시작함으로서 보수정치권의 이념논쟁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작금의 색깔논쟁이 건강한 정책대결이나 생산적인 이념논쟁이 아니라 맹목적 인신공격이나 정략적 흠집내기로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민주당 내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던 이인제씨가 전세가 역전되자 하루가 멀다하고 노무현씨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도 안타깝고, 대세론이 흔들리고 당내의 경선구도가 급변하자 민주당을 통째로 좌파로 규정하고 인위적인 ‘보-혁 대결’을 조장하는 이회창씨의 모습도 구태의연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공세를 취하는 쪽도 문제이지만 정작 공세를 당하고 있는 노무현씨나 김대중 정부쪽의 태도도 문제이다.  
  양 이씨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는 노무현씨의 처지가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과거의 발언을 스스럼없이 번복하면서 정작 중요한 국가적 현안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은 과연 노무현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작금의 색깔논쟁은 정책과 노선을 기반으로 한 이념논쟁이 아니라 인신공격과 상호비방에 바탕을 둔 저급한 정치적 공방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해 온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논쟁의 한 축에서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번 논쟁은 기성 정치권 내부의 ‘더 보수’와 ‘덜 보수’의 반 쪽짜리 논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은 ‘흠집내기’로 덤비고 또 한 쪽은 ‘피해가기’로 일관하는 모습은 당당하고 책임있는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고 반사적인 이익이나 노리고 대중적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꾼의 모습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이념논쟁’을 벌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제 이회창씨와 이인제씨는 남을 공격하고 비방하기 이전에 ‘보수’라면 보수에 걸맞는 그리고 ‘중도’라면 중도에 어울리는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심판을 받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인의 도리이다.
  그리고 노무현씨는 더 이상 번복하거나 피해갈 것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길이고 더 이상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따라서 ▲재벌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조세개혁 ▲의약분업 ▲언론개혁 ▲공교육 확대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용산미군기지 이전 ▲차세대 전투기 사업 ▲남북관계 개선 등 중요한 국가적 10대 현안 문제에 대해 노무현, 이회창, 이인제씨와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간의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토론을 가질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만약 후보들 간의 토론이 어렵다면 3당의 책임있는 당국자간의 당대당 토론회도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색깔론을 들이대고, 진보를 얘기하면 좌파로 규정하고, 좌파는 곧 불순한 것으로 매도하는 낡은 매카시적 수법은 이제 우리 정치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이제 진보와 개혁과 중도와 보수가 각기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정체성을 구체화한다면, 우리도 보수 일색의 낡은 정치구도가 아니라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우리 정치 발전의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여야의 대선 후보들에게 ‘상호 비방’이 아니라 ‘상호 비판’을 통해 그리고 ‘정치 공방’이 아니라 ‘정책 대결’을 통해 ‘구시대적 색깔공세’가 아닌 ‘생산적 이념논쟁’을 할 것을 촉구한다.

                                  2002. 4. 8
                                  민주노동당

이인제 후보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색깔 장난’ 중단해야할 8가지 이유
[정대화 교수의 긴급제언] 이 후보와 그 캠프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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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지난달
30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남 경선이 열렸던 마산실내체육관에서 개표가 발표된 뒤 세 후보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 볼테르. 제정
치하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비판하고 자유와 진보를 추구했던 볼테르는 그가 신봉하는 자유의 정신을 이렇게 설파했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사상을 억압하는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함께 투쟁할 것이다."

프랑스의 격조높는
사상과 철학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최근 상황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

"노무현이
좌파라니… 듣는 좌파 기분 나쁘다." 민주노동당 사람의 가벼운 반응이다. 댓거리할 가치도 못느낀다는 투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당신이 좌파냐?" 그러나 본전도 못뺐다. "선생이라는 사람이 어째 질문이 그리 천박합니까?"

"글세,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겠는데 자꾸 후보가 그런 이야기를 하네요." 마산 경선에서 만난 이인제 후보측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음모론’
나왔을 때도 해명이 안돼 곤란했는데 ‘색깔론’까지 나오니 답답해죽겠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노무현이 좌경이면 몇 년간 한 솥
밥먹고 지낸 이인제는 무슨 색깔이냐? 불고지죄 해당사항 아니냐."

익산 경선 현장에서 만난 민주당 관계자의 이야기다. 한 마디 더
물었다. "그래도 문제가 있다고 이인제 후보가 계속 발언하지 않냐?"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가버렸다. "딴 생각을 하나보지
뭐."

"급진세력이 ‘좌파적’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이인제 후보의 흥미진진한 ‘좌경’ 이야기 마당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동석했다.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현정부에 ‘좌파적’ 정권, 노무현 진영에 ‘급진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인제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상황인식이 5년만에 다시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밴드웨곤’ 효과(bandwagon
effect)라고나 할까,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 이념논쟁에 무임승차해 불로소득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념논쟁이
벌어지다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30년간 군사독재정권의 이념공세에 시달려온 민주당 안에서 이념논쟁이 불거지니 매우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념논쟁을 못할 것도 없고 꼭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이인제 후보측 말대로 유럽에서도 이념논쟁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과 다르다.

붉은 이념의 족쇄를 걸어 생매장시키는 ‘추악한’ 마녀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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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노무현
후보ⓒ 오마이뉴스 권우성

중국 옛말에 남쪽의 귤이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이념논쟁은 유럽의 이념논쟁과 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목적 자체가 다르다. 유럽의 논쟁이 정책논쟁의 성격인 반면 우리는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이념공세’ 아니면 ‘사상단죄’로서 약하면 ‘때리기’고 심하면 ‘죽이기’가
된다. 붉은 이념과 사상의 족쇄를 걸어 상대방을 생매장시키는 마녀사냥의 ‘추악한 전략’이 우리 이념논쟁의 실상인 것이다.

경선
과정에서 ‘음모론’으로 시작된 이인제 후보측의 공세가 춘천 경선과 ‘사퇴파동’을 거쳐 ‘색깔론’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무한대의 ‘이념공세’로
발전했다. 해방정국의 좌우대립과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 동포들에게 "이념은 뼈와 피 속에 박혀 있어 권력을 잡으면 본색이 드러난다"는 식의
절제되지 않은 표현은 지나친 것이다.

한국전쟁과 맞물려 미국에서 시작된 50년대 매카시 상원의원의 매카시즘 활동도 이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정부에 소련의 스파이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총과 칼을 사용해서 삼국지
식으로 자웅을 겨루던 것을 말로 겨루도록 한 근대정치의 제도적 장치이다. 말하자면 전쟁과 같은 폭력적 투쟁을 말로 하는 평화적 투쟁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다른 사람을 해치면 그것은 이미 ‘말’이 아니라 ‘총’이요 ‘칼’이다. 이인제 후보가 처한 경선의
딜레마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규칙을 벗어나 ‘금지된 장난’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본인 또한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인제 후보가 ‘색깔론’ 이념공세로 승리한다고 가정할 때 승리 다음에
무엇이 남을지를. 과연 남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것이 본인에게 돌아왔을 때는 엄청난 눈덩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념공세가 왜 부적절한 전략인가? 여덟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민주당은 보수정당이면서도
한국정치사에서는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정당으로서의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민주당의 뿌리를 더듬어 가면 80년대의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60-70년대의 신민당, 50년대의 민주당이 나온다. 이 점에서 정치지도자 김대중을 표적으로 이념공세가 난무했다. 특히 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대안으로 부각되면서 군사정권의 이념공세가 본격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인제 후보가 비록 민주당의 정통
출신은 아니고 그 고난의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를 상대로 이념공세를
펼치는 것이 민주당의 보편적 정서와 부합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상당수 의원과 당료, 당원과 지지자들이 이념공세의
피해의식에 가위눌릴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이념공세는 단순히 노무현 개인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그것이 확대 증폭될 경우 민주당 자체에 대한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후보는 자기의 정치적 토대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자신의 정치적 토대마저 훼손하는 자가당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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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이인제
후보ⓒ 오마이뉴스 권우성

둘째, 이인제 후보는 97년 대선 패배 이후 일정한 과도기를
거쳐 국민신당을 들고 민주당에 단체입장했다.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정권의 창출에 기여했다"고 했다. 이 후보가
도운 김대중은 과거 사상시비의 핵심이었던 바로 그 ‘좌경’ 김대중이다. 이 후보가 김대중을 도우고 당을 함께 한다는 것은 정치인 김대중의 과거
사상시비의 피해의식에 공감한다는 뜻이고 볼테르처럼 함께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후보가 자기 당까지 들어바친 민주당 안에서
다른 동료를 이념공세로 밀어내려는 것은 김대통령과 김대중 정권은 물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안에서 김대중 대통령만한 ‘좌경’이 어디 있겠는가? 노무현은 비교도 안된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나왔던 사람들도 모두 정치인 김대중과
비슷하게 오십보 백보 아닌가.

셋째, 김대통령과 민주당이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 다음 추진한 사업이 재벌개혁과 언론사 세무조사였고,
야당 시절부터 국가보안법 문제로 고민했다. 민주당이 노동자 정당은 아니지만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강령에 따라 개혁적인 노동정책을 추진했다.
이 후보가 재벌개혁이나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특별히 역할을 한 것은 없지만 당의 지도자로서 함께 지지하고 동의한 셈이다.

이인제
후보도 문민정부에서 노동부장관 하면서 재벌의 ‘무노동 무임금’ 정책을 반대하였다. 이 후보식의 표현대로라만 일 안하는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자는
이야기는 월급을 공평하게 나눠갖자는 공산주의보다 훨씬 ‘좌경’ 아닌가? 그런 이 후보가 동료의 약간 ‘특이한’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다. 이 후보의 이런 발언에 대해 민주당 젊은 당직자 한 사람은 "눈감고 들으니까 이회창하고 똑같다"고 했다.

비판도
해야 하고 다른 후보의 발언을 문제삼는 것도 일리가 있는 행위지만, 그것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민주당과 자신의 동지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면 당의 지도자로서 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결과적으로 이 후보는 제 발등을 도끼로 찍으면서 통쾌함을 만끽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모순적인 자가당착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후보는 지난 4년간 ‘좌경’과 동거한 것이다

넷째, 이인제 후보는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서울도 아닌 시골에서, 경기고나 경복고도 아닌 상고를 나온 촌티나는 더벅머리
아저씨를 이념공세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실례된 표현이지만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노무현 후보가 ‘좌경’이라면 민주당 사람들 대부분이 ‘좌경’이어야 하고, 민주노동당 사람들은 당 간판 내려야 한다. 이후보
또한 지난 4년간 ‘좌경’과 동거하면서 동조한 공범 ‘좌경’이 될 것이다.

표현을 좀 거칠게 하고 말을 세게 한다고 ‘좌경’이라면
박정희, 전두환이 훨씬 ‘좌경’이다. 이 후보가 여러 해를 이어 변함없이 존경해 마지않는 박정희가 진짜 ‘좌경’의 원조라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박정희의 해방 직후 뚜렷한 좌파행적일랑 제쳐두더라도 군사쿠데타 직후 펼쳤던 정책들도 이 후보의 눈으로 보면 ‘좌경’ 그
자체이다. 재벌개혁이나 언론사 세무조사 정도가 아니라, 이병철 씨 등 기업인들을 죄다 집어넣어 버리지 않았던가? 전두환도 그랬다.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재벌그룹을 없애버리는 등 권력을 난폭하게 휘둘렀다.

박정희, 전두환이 한 행위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정도 되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원조 ‘좌경’ 박정희를 ‘몸’과 ‘마음’으로 동경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개혁노선에
‘좌경’ 딱지를 붙여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후보는 다른 사람의 ‘좌경’을 걱정하기에 앞서 ‘좌경’ 원조를 모방하려고 애쓰는 자기의 일관성
없는 처신을 먼저 다스려야 할 것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가장 으뜸은 수신이다.

다섯째, 이인제 후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념공세를 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념공세로 경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판 아닌가.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이겼다고
가정해보자. 이 후보가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 때 민주당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겠는가? 이 후보와 함께 연말 대선을 수행할 동지들이 과연
누구일까? 이 후보가 어느 정당에서 누구와 함께 연말 대선을 치르려는 것인지 노선과 전략이 몽롱할 뿐이다.

한나라당과의 관계에서
개혁적인 동료를 급진좌파로 몰면서 자신은 급격하게 우선회하게 된다면 동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본인은 민주당 노선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민주당의 중심세력과도 절연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민주당의 핵심을 잃고 껍데기 후보 자격만 취득하는 승리를 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극히 낮으며, 설사 승리하더라도 본선에 갈 기력이 소진된 상처투성이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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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권우성

여섯째, "쪽에서 뽑아낸 물은 쪽빛보다 더 푸르다"고
했는데 이인제 후보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개혁정당에서 보수후보를 내는 셈이다.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노선에 이념공세를 취하고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요모조모 비판한다면 이회창 후보의 노선과 구별이 어렵게 된다. 그가 후보가 될 경우 결국 이회창 후보와 보수-보수의 보수적
대결구도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원조보수인 한나라당에 유리한 선거지형이 형성된다.

보수세력은 개혁정당에서 나온 얼치기 보수를
지지하기보다는 당과 후보가 보수로 일체화된 정통원조보수 한나라당을 지지하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인제 후보가 출마하더라도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김대중정권을 향해 ‘좌파적 정권’이라는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니, 이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을
것이고, 민주당을 한국의 민주화와 연관시켰던 당원과 지지자들은 민주당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할 것이다.

보수세력은 ‘얼치기
보수’와 ‘정통 보수’ 자임세력 중 누굴 지지할까

일곱째, 이념논쟁은 아직 선언문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이념논쟁은 좌파를 배격하자는 것인데 존재하지도 않는 좌파를 배격하자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한반도에서 김정일보다 더한 조직좌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식의 이념논쟁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는 이인제 후보의
통일철학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김정일 위원장과 이념논쟁이라도 할 셈인지 모르겠다.

21세기는 민족통일의 시대이다. 강대국의 개입과
이념대립으로 분단되어 전 민족이 고통받고 있는 한반도에서 민족통일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분단의 상처를 보듬어 나가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특히 다음 대통령은 민족통일의 전도사일 수밖에 없는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남북관계도 아닌 남한 내부의 사소한 정책
차이를 참지 못하여 그것을 이념 차이로 붉게 도배질하면서 어떻게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나 민족통일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덟째, 최근 논쟁에서 이념이라는 것이 매우 편향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인제 후보는 노무현 노선에 대한 시비의 근거로
중앙일보의 2월 초 조사결과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 상대평가일 뿐이다. 상대평가에서는 100점 만점에 10점 짜리가 A를 맞기도 하고
90점 짜리가 C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준거집단의 다른 사람보다 개혁적이라고 해서 급진이나 좌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중앙일보가 한 이념적 분류 자체가 문제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북한에 우파가 없는 것처럼 남한에는 좌파가 없는 반쪽짜리 정치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 0부터 10까지 이념구분을 한 것은 매우 허술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자면 좌파구간에 해당하는
0부터 5나 6까지는 비워두고 시작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좌파를 이야기하려면 박헌영과 김일성 정도를 거론하고 이들에게 0이나
1을 주어야 온당하고, 온건좌파인 여운형이나 조봉암에게 4에서 5 정도의 점수를 주어야 정확한 것이다. 호랑이 없는 곳에 토끼가 왕이라지만
좌파가 없어졌다고 아무나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정객의 개혁정책에 낡은 좌파상표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념적 몰상식’
그 자체이다. 참으로 마른 먼지 나는 이야기지만 학창시설에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첫 구절이라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현역 정치인의 이념적 위치를 몇 가지 피상적인 정책의 차이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본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언론사의 상업적 동기로 출발해서
재미삼아 한두 번 해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학문적 엄밀성의 관점에서는 함정 투성이다. 이런 식으로 분류한다면 정당 명칭을 국가’사회주의’
정당(National Socialist Party)으로 한 나찌당의 히틀러는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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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FONT-WEIGHT: normal; FONT-SIZE: 9pt; COLOR: #8c8f70; FONT-FAMILY: verdana,굴림체; TEXT-DECORATION: none”>▲영화
‘친구’를 본 떠 고등학생 복장을 한 노무현 후보 지지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음지의 냄새나는 이념공세를 양지로
공론화하자

후기 삼아 첨언하자면,

‘사퇴파동’을 전후해서 이인제 후보는 이념논쟁을 선거전략의 중심축으로 설정한
것으로 보이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이 이후보의 말을 빌어 이념논쟁을 일파만파로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인데다,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한 이회창 후보가 이념논쟁에 전격적으로 참가하는 등 상황이 추악하게 변질되어가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이 전도된다는 말이
있다면 지금 상황이 정확하게 그렇다. 선거에서 후보선택을 위한 정책평가가 중심이 되어야 할 시점에 후보와 정책은 뒷전으로 밀리고 따뜻한 봄바람을
황사가 막아버리듯 사상이념 공세가 난무한다면 국민들이 바라는 올바른 선거가 되기 어렵다.

민주당이 국민경선을 치르기로 했을 때
국민경선은 민주당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확대된 이념논쟁 또한 민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식의 이념논쟁하자고 국민경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일이다. 이런 식의 저급한 논쟁은 그간의 민주적 개혁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우리 사회를
이념적 석기시대로 후퇴시킬지도 모른다.

이회창, 이인제 후보에게서 볼테르의 관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축적해온 역사발전의 건전한 양식이 발휘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뜻으로 말해야 할 시점이다.

 

독자의견 중…

대학문턱에가도 가야 이념이 있습니까??
이정숙, 2002/04/06 오후 6:43:13
"대학 문턱에도 안 가본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
그참
기사를 읽다가 보니 기분 나쁘네요.
이념이, 그것이 아무리 거창해도 꼭 대학을 나와야 이념이 있습니까.
난 노후보가 그래도 귀하의
표현대로 대학 문턱에도 못갔다처도 누구에게도 뒤지지않는 확실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대학가는 것이 부모의 뒷바라지와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당시 노후보의 청년시절에는 가정환경이 더 큰 문제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요즘이야 상고가 좀 덜한 평가를 받지만
부산상고라면ㄹ 당시 수재들이 가는 학교축에 들었습니다.
문장을 좀 수정하심이 어떨지.
민주노동당 어떤 분 말씀마따가 선생이 왜 그리
천박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