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는 짝을 이루어야 해”와 같은 말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할 때, 그렇다면 나는 영원히 연애 또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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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는 정신분열은, 말 그대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적 공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자아와 이론적․실천적 자아 사이에 일어나는 분열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후자의 분열이 비교적 간단한 수준에서 벌어졌다면, 요즘의 나는 전자에 입각한, 후자의 분열이기 때문에 더 복합적이다.
친구는 나를 이해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이해 못한다. 한편에서 나는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런 면에서 친구가 나를 이해하기 바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공식적인’ 주체로서의 나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는가. 최대한으로 “나는 말할 수 없어”이어야 했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 나라는 주체의 오만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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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적 대의 명분이 실패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의 형식적 순수함 속에서 그의 교육극들에 의해 함축된 주체 위치로서, 거절의 몸짓, 포기의 몸짓을 윤곽 그리기 위해서 브레히트로 돌아가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첫번째 예스는 윤리적 사명의 수준에 남아 있고 윤리적 위임을 떠맡는 행위를 나타내는 반면, 두 번째 예스는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 윤리적인 것의 보편적 차원의 종교적 중지의 방향을 가리킨다. 윤리적인 것에 대한 ‘예스’는 그 극단으로 운반될 때 조만간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보다 급진적인 예스, 우리의 발 밑에서 근거를 잘라내 버리는 예스,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에 대한 예스를 취하도록 강제한다. 즉, 진실에 대한 ‘예스’는 진실을 위해 거짓말하도록 우리를 강제하고, 싸움에 대한 예스는 도망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간단히 말해서, 규칙에 대한 예스는 우리를 규칙의 정초적인 예외로 데려간다. 브레히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싸울 수 있으면서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약속을 지키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면서 인정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모든 미덕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다. 즉,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

 주체는 윤리적 의무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인 완수로서 출현하는 이 보편적인 것의 ‘주름ply’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브레히트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해 관계를 따르도록, 진실이 아프게 하지 않을 때 진실을 말하도록, 거짓말이 우리에게 이득을 줄 때 거짓말을 하도록 강제하는 표준적인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윤리학의 내재적인 자기-부정, 즉 윤리적 보편성을 중지시키는 윤리적 명령이다. 거절이 현저하게 현대적인 현상인 것은 바로 이 ‘윤리적인 것의 중지,’ 명예와 윤리 간의 이 분열(불명예스럽게 행동하라는 윤리적 명령)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브레히트가 우리는 혁명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당신이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아닌’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고 단언할 때,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대의를 위한 자기-말소 self-obliteration 라는 통상적인 윤리학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또 다른 나사를 돌려 말소 자체를 말소해야만 한다. 즉 자기-희생의 감상적인 몸짓으로서의 말소를 폐기해야만 한다. 이 보충적인 포기가 라캉이 ‘주체적 궁핍 destitution subjectiv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