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언제나 방해받고 실패한다. 그것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에서조차 그것은 우리에게서 항상∙이미 빗나간다. – 그것은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주체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 나와 너에 대한,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에 대해서, 그러나 말하기를 포기하지는 말자.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이 듣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면 전혀 말이 없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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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열흘 동안의 아르바이트는 TV를 장만하고자 하는 얄팍한 동기에서 시작됐지만 끝내는 그 열흘이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함께 하는 노동 속에서 생기는 연대의식과 사회적 높낮이에 의해 피라미드처럼 구성된 억압의 사슬들이 지니는 의미를 머리에서 몸으로 조금이나마 옮겨 새기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짜릿하기보다는 씁쓸하고 아련하기보다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일은 보람될 바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개점 1주년 사은행사랍시고 10만원, 20만원, 30만원, 50만원, 그리고 100만원대로 나뉘어진 사은품들이 구매 고객들의 충동구매를 부추겨 이윤을 좆나게 극대화하려는 백화점 측의 기획을 대신하는 일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그렇게 좆나게 극대화된 이윤이 미천한 알바생들에게까지 돌아갈 리 만무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우리는 그저 일당 23,000원 남짓의 돈을 위해 충동구매의 중추적 기지, 사은행사 현장에서 전판과 귀접시와 여행 가방, 차렵 이불 등을 옮기고 쌓고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있었을지라도 일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배우며 내 생활 리듬이 자연스레 일에 맞추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일찍 사회에 뛰어든 사람, 학교를 도중에 그만 두고 온 사람, 학교를 잠시 쉬는 사람, 입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두터운 연령층을 이루며 포진하고 있는 현대 백화점 미아점 판매 기획팀 소속 알바생들이었지만, 일을 가운데 놓고서는 연대하였다.
그러나 일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 다른 어떤 일도 그러할 것이다. – 소위 알바생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장 낮은 직급에 속한다. 백화점 주위의 쓰레기나 빈 박스 수거하는 아저씨나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 쉴 곳이 남자 화장실 밖에 없는 아주머니들 – 처럼 말이다. 게다가 나이도 어린 이들에게 사무실 직원들은 초면에도 경어조차 사용하지 않으니, 간혹 경어를 쓰면 크게 인심 쓰는 일이다. 알바생은 부려먹기 좋은 상대인지라 원래 하기로 한 일과 상관없는 잔업을 시키는 것도 거리낌 없고, 일을 잘 해 문제삼을 것 없으니 행사 현장 내려와 – 일에 손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 손가락으로 틀 닦고 먼지 상태를 확인하거나 – 군대서나 볼 법한 경악할 만한 악취미! – 정식 직원, 그것도 판매직 사원이나 할 것 같은 인사 연습이나 국민 체조를 시키려는가 하면, 일하고 쉬는 사람 갈구기까지 괴롭히는 종목도 다양한 싸이코 직원이 한 마리 기생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겠다. 성서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나는 이 미친 싸이코가 활개치는 것이 가능케 하는, 이 작자 만큼은 아니라도 그와 똑같은 위치에 한 마리씩은 꼭 있도록 해야 하는 구조를 차라리 미워할 것이다. – 솔직히 이 미친 싸이코 한 마리도 기름에 볶아먹고 싶을 정도로 싫다. 이건 어쩔 수 없다. 구조의 대리인은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 그 작자는 내가 배운 바 대로 자본의 일을 대신 수행할 뿐이라고 믿자. 아무리 그 작자는 자신을 자본이 지니고 있을 권력 그 자체인 양 비행기 태우고 있을지라도 그는 단지 자본의 개, 자본이 지배해야 할 노예들을 대신 통제할 뿐인 경비견에 불과하다고 콧방귀를 껴 주자. 무시할 만하지 않은가. – 실은 무시할 수 없다. 단지 빙산의 일각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무시하고 간단히 거부함으로써 해결될 일이 아닌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 세상이란 말인가. 마지막 날, 동료들이 공히 분노할 일이 밝혀져 버렸다. 규정상 알바생들에게 매일 간식을 제공하기 위한 7만원 가량의 자금이 지급되어야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음료수와 과자 몇 개를 단 한 번 ‘쏴’ 주는 것을 봤을 뿐이었다. 더한 것은 사무실 직원들은 그 돈으로 (썼을 법한) 샤브샤브를 쳐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런 썩을!” 혼잣말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함께 느낀 분노였다. 일은 이제 다 끝나버렸고 떠나는 마당이 되어버린 동료들에게서는 엇갈리는 고민이 생겨 버렸다. 단체로 항의할 것인가, 가는 길 고이 떠나 드릴 것인가.
전자에 대해 진지하게 중지를 모으는 중에,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분노는 조직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장기로 일한 몇 명의 개인적인 친분이 결정적이었다. 분노가 뭉칠 수 있었던 순간은 그들의 망설임 속에서 지나가 버렸고 해소되지 못한 더러운 감정만이 씁쓸하게 삭혀지고 있을 때 쯤, 힘없는 자들에게서 믿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수적 우세라지만, 그 힘은 결코 쉽게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억누르는 모순의 구조는 직시하기 어렵고, 그것을 덮고 있는 사적 관계는 이렇게도 잘 보이는구나. 인간은 갈수록 원자화되고 자본은 갈수록 조직화되는구나…
그래서 남게 된 것은 해답 없이 던져진 케케묵은 질문들의 반복이다. 문제는 알바 속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의 크고 작은, 영원한 굴레 같은 반복 속에서 그 반복이 지니는 의미를 점점 더 또렷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그 반복이 종말을 고할 날을, 그야말로 역사의 종말을 언젠가는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약하고 나이 든(?) 형이 일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웃는 얼굴로 “형, 가서 쉬세요. 제가 할게요.” 하는 동료의 선의 만큼 존중 받을 만한 일을 나는, 그들은 과연 했던가 하는 질문들…

첨가 : 내가 한 일이 개 같은 일이라 하지만 자본, 백화점은 고마워 해야 할 일이다. 이 말단 알바생들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은 그만큼 일이 보잘것 없거나 직원들이 꺼리기 때문이지만, 언제나 가장 보잘것 없고 꺼리는 바로 그것이 무의식의 비밀을 갖고 있다고 하거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생산의 주체라고 하거나, 진실은 바로 그 곳에 있는 법이다. 생각보다 그 일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사가 애초에 없다면 백화점의 이윤은 좆나게 피 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백화점 측은 각종 행사들을 알바생들에게 위임하면서 그 중요성을 은폐함과 동시에 자본 회수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종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도 노동(특히 육체노동)은 지속적으로 평가절하되지만 그것이야말로 생산의 동력일 수밖에 없다는 진부한 진실이 드러난다고 하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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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라깡, 응시’로 웹 검색 중 찾아낸 글입니다. 출처는 http://myhome.naver.com/ifnotso/Oasis.htm이며 <리버스>라는 웹진에 게재된 서환희 님의 글을 발췌/보관하고 있는 것이라고 운영자가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글은 서환희님의 글입니다. 원래 웹진 <리버스>에 실렸던 글인데, 웹진이 폐간되어서 임시로 서환희님의 동의없이 제 홈페이지에 보관합니다.

오아시스

당신은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다.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불이 꺼진다. 오프닝 씬이 시작됨과 동시에 당신은 영화에 빠져든다. <유로파>[1]Lars von Trier, Europa , 1991, 113min.의 첫 나레이션은 바로 이 부분을 폭로한다. “당신은 열을 셈과 동시에 이 영화에 들어간다. 열, 아홉, 여덟, . . .” <유로파>를 보는 당신은 첫 대사가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당신임을 어느새 까맣게 잊고 만다. 극장 안에서 당신은 스크린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걱정할 것이 없다. 마치 자신이 엄마의 자궁에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 그렇다. 극장은 자궁과 유사하다. 컴컴한 내부, 오로지 빛은 스크린이 위치한 바로 그 쪽 방향에서만 들어온다. 태아가 장차 자기가 세계로 나갈 구멍으로부터 빛이 들어옴을 경험하듯이. 어쩌면 바로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정신분석학을 영화이론에 도입하려했던 많은 이론가들이 종종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관객과 영화의 행복한 만남이 원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안락한 상상계로 이끌어준다고 파악하였다. 하지만 영화관을 자궁이라 느끼기에는 관객들의 머리가 너무 굵어져버렸다.

1.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눈-신체는 통일적으로 상상된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크린-카메라 기구(apparatus)[2]이는 초기 기구이론가들이 사용했던 용어인데, 그들은 라캉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영화의 특징들이 기구의 효과라고 이해한다. J. L. Baudry에서부터 C. … Continue reading에 부착된다. 관객은 스크린에 투영된 형상들의 조합들을 자신이 본다고 믿는다. 그리고 스크린 속에 펼쳐지는 세계가 곧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스크린-세계란 쇼트shot들의 다발로써, 즉 분절된 시·공간의 연속성, 통일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써 구축되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는 관객은 분절된 쇼트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의 감독은 관객이 쇼트(shot)들의 분절을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영화를 찍어야 한다.

여기서 영화의 한가지 전략이 발생한다. 관객 모르게 하기. 장르란 이러한 전략들의 전술로서 발생한 고전영화 문법과 관습(convention)이 시스템과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굳혀진 체계이다. 관객 모르게 하기의 결정적인 증거로서 쇼트/대응쇼트(shot/counter shot)체계[3]쇼트/역쇼트(shot/reverse shot) 체계에 대한 연구로는 J. P. Oudart의 Cinema and Suture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쇼트/역쇼트의 체계를 이미지와 관객의 최초 관계 … Continue reading를 들 수 있다. <국가의 탄생>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사실 <국가의 탄생>을 기억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한 남자가 목화밭에 서 있다. 그를 카메라는 꽤 멀찌감치 잡는다. (2) 그가 땅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어 그것을 본다. 이 쇼트의 대응쇼트는 (3) 어떤 손에 쥐어진 목화를 클로즈업한 쇼트이다. 그리고 카메라의 앵글은 그 손의 임자가 바라보고 있음직한 눈높이에서 맞추어져 있다. (1)→(2)→(3) 쇼트의 연속은 다음 문장의 영화적 표현이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관객은 이 장면을 보자마자 (1)→(2)→(3)의 연속은 망각한 채, 위의 문장만을 기억한다. 바꿔 말하자면 관객이 모르게 문장은 발화되었다.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또 다른 보편적인 예를 생각해보자. 바로 대화 장면이다. 두 등장인물 A, B가 있다. 프레임에서 A만 보이는 쇼트, 그 역쇼트(reverse shot)로 다음 프레임에 B만 나온다. 이 때 A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면, 다음 쇼트에서 B는 왼쪽으로 시선을 두어야 한다. 프레임에 A나 B만 홀로 나오는 것마저 부담스럽다면 오버 더 숄더 샷(over the shoulder shot)으로 처리해도 좋다. 이 쇼트/역쇼트 체계는 그에 대한 응용과 더불어 하나의 관습이 되었고, 영화 감독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공식, 기법으로 이해된다. 배우들이 교차되는 클로즈 업으로 보일 때 쇼트/역쇼트 패턴은 가장 유용한 해결책 중 하나이다. 이것보다 헐리우드 스타일을 더 잘 대표하는 편집전략은 없다.[4]스티븐 디 캐츠, <영화 연출론Shot By Shot>, 시공사, 1998, p. 187. 이 책은 영화를 연출하는데 있어서 공식적인 문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 Continue reading 쇼트/역쇼트 체계에 뒤따라오는 몇가지 제작 기법들이 있는데, 이들은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을 위해 필수적이다. 180도 규칙, 가상선 규칙 등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관객과 카메라 간에 시선의 동일화를 꾀함으로써 관객을 모르게 한다. 무엇을 모르는가? 관객은 A를 바라보면서 B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한 역쇼트에서 B를 바라보게 되는데 방금 자신이 B의 시점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A의 시점으로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모르는가? 사실 관객은 안다. <국가의 탄생>에서 쇼트 (3)에 보여진 목화를 쥔 손의 임자가 쇼트 (2)의 그 남자라는 사실을 관객은 안다. 그 손의 임자가 쇼트 (2)의 그 남자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지만, 관객은 너무나도 당연히 안다. 왜냐하면 관객은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쇼트 (3)이 보여지고 난 후에야 문장이 완성된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쇼트 (2)에서 이미 문장 구조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문장의 빈 틈, 구멍을 채워 줄 요소일 뿐이다. 그리고 이 또한 이미 한계지어져 있다. 왜냐하면 관객은 쇼트 (2)에서 이미 쇼트 (3)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쇼트에서 관객은 그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그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쇼트 (3)에서 성취된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쇼트 (3)을 욕망한다. 쇼트 (2)에서 문장의 주-술-목 구조의 랑그는 이미 구축되어 있으며, 쇼트 (3)에서 기대되는 것은 발화된 파롤이다. 영화는 쇼트 (3)을 욕망한다. 따라서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말할 수 있게된다. 이 말은 관객이 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말과 매우 동일하다.

영화는(관객은) 관객이(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진술은 라캉에게 있어서 mOther-child unity의 구조와 유사한 영화와 관객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는 라캉의 용어를 연상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채로 screen-spectator unity, 줄여서 “ssun”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ssun은 sun이라는 단어와의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그 보다 강렬한 발음으로 인해 뜨거운 태양을 연상시킬 것이다. 이는 곧이어 등장할 oasis라는 개념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이 용어 자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 하다. 영화를 보는 관객을 의미하기 위해서는 주로 audience를 사용한다. 하지만 시각적 동일화를 강조하려는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면 ‘보다’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spectator가 더 적절할 것이다. 아울러 spectator가 다소 ‘멍하니 보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직 주체화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은 child에 조응될 수 있다(물론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은 mOther-child unity를 통해 아이가 어떻게 대타자(the Other)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5]대부분의 라캉 해석자(특히 국내의)들은 mOther-child unity에 거의 주목하지 않고 거울단계-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을 통해 주체화 방식을 설명하곤 … Continue reading mOther-child unity는 논리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이전 시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다른 맥락으로 설명된다. 아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엄마를 욕망하게 된다. 아이는 엄마가 자신만을 욕망하기 원하는 까닭에 기꺼이 자신이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이로써 아이는 엄마와 자신의 연합체(unity)를 구성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감각-운동 조정작용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에 대한 일체의 감각이 결여된, 아직은 일종의 분화되지 않은 감각 덩어리로서의 아이는 아직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구분할 수 없는 바, 어머니의 신체를 자신의 몸의 단순한 확장으로서 여기며 그것과의 일종의 “직접적, 무매개적 접촉” 속에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의 관심의 사실상 전부를 아이에게 바치려 할 수도 있으며, 아이의 모든 욕구를 예상하고 자신이 아이에게 100퍼센트 접근가능하고 소용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6]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 55.

이 때 엄마는 대타자의 은유이다. mother의 o가 대문자로 표시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과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 역시 언어에 의해 결핍되고 소외된 채로 욕망하는 주체이다. 부모는 분열되어 있는 빗금쳐진 주체이다. 그들의 욕망은 모호하고 모순적이며 끊임없이 흐른다. 아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부모의 욕망을 해독하고자 노력한다. “엄마는 내게 무얼 원하는거지?”[7]같은 책, p. 54.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정확히 해독할 수 없는 까닭에 엄마의 욕망이 될 수 없다. 그는 끊임없이 엄마가 욕망하는 바를 따라다녀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인 엄마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하는 쪽을 택한다.

이로 인해 아이는 분리(seperation)의 과정을 겪게 된다. 아이는 엄마의 결핍된 욕망을 찾아 헤맨다. “엄마는 내게 무얼 원하는거지?”라고 끝없이 질문하는 과정은 아이가 엄마의 결핍을 자신이 채우고자하는 관심, 즉 욕망의 과정이다. 이로써 라캉의 유명한 정식이 성립된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또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Ecrit, p312)[8]같은 책, p. 54에서 재인용 이 분리의 과정은 욕망의 본성(the nature of desire)에 기인한다. 아이는 엄마의 애정을 받는 독점적인 대상이 되고자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항상 아이를 초과한다. 즉 아이로부터 도망치고, 아이의 통제를 넘어서는 그녀의 욕망이 존재한다.[9]같은 책, p. 59. 이로써 그들간의 unity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으며, 균열을 초래한다.

균열 자체만을 두고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에게 있어 대단히 위험한 체험이다. 균열은 대타자로부터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하며 아이 자신이 분열된 주체임을 폭로한다. 하지만 균열은 즉시 object a 를 출현시킴으로써 분열된 주체가 자신의 분열을 무시한 채 통일감의 환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object a 는 욕망의 원인이자, 욕망의 대상이고 상징계의 도입으로 실재계의 이면에 남겨진 잔여물이다.[10]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역, 인간사랑, 1998, pp. 400∼402. object a 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대상을 지시하며, 실제로 욕망이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욕망의 원인이다. 즉 욕망을 작동시키는 어떤 대상으로서 욕망이 그것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주위를 맴돈다. 아이는 결코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으로 인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이로써 아이의 욕망은 완벽히 만족될 수 없으며(왜냐하면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은 상징계의 기표들을 따라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단지 object a 의 주위를 맴돌면서 지연될 뿐이다. 한편 아버지의 이름이 기능하게 됨에 따라 아이-욕망(아이가 욕망하는 동시에 아이가 욕망되는)의 대상은 모두 기표들을 얻게 되어 상징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 때 object a 는 기표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object a 의 지위는 아버지의 이름이 대체하게 되지만 object a 는 잔여로서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잉여이다. 하나의 기표는 모든 다른 기표들을 위한 주체를 표상하나 불가피하게 항상 잉여가 생산된다. 이 때 잉여는 라캉이 고백한 대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와 동일한 구조로 인해 ssun은 불가피하게 object a 를 출현시킨다. 나는 그것을 object a seen in screen, 줄여서 oasis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우선 ssun과 mOther-child unity의 동형성을 살펴보자. ssun은 영화가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는 핵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흔히들 영화를 꿈 혹은 환상에 비유해오곤 했는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영화에 은밀히 내재하는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 때문이다.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은 관객과 카메라의 동일시라는 일차적 전술을 감행하는데 이는 ssun의 분리(seperation)에 근거한 것이다. spectator를 어두컴컴한 극장 좌석에 고정시켜 놓는다면 screen은 대타자-mOther로서 기능한다. spectator는 screen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를 기대한다. 앞서 [국가의 탄생]의 그 문장을 상기해보자.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 문장을 좀더 욕망의 차원에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나는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혹은 안다),” 이 때 남자가 목화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쇼트 (3)에 의해 관객이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다. “나는 내가 (..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이 문장은 라캉이 시선에 대해 언급했던 문장과 매우 동일하다. 그는 <젊은 파르크(La Jeune Parque)>의 대사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를 인용하면서 이 구조가 의식의 환상을 드러내주고 있으며, 그것이 응시의 구조에 기초해있음을 보여준다.[11]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권택영 외 역, p. 207.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단지 분열된 나를 통일적으로 상상하는 그 환상의 구조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나는 내가 screen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는 문장은 자기 의식의 통일성을 ego 차원에서 상상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으며, 동시에 screen과 spectator의 분리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를 역으로 말한다면 ‘ssun에서의 분리가 곧 관객과 카메라의 동일시를 요구한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문장 구조가 이루어진 후, 이 문장을 spectator가 “나는 내가 screen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라는 문장으로 전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즉 관객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쇼트 (3)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있는 목화의 클로즈업 쇼트가 예정된다. 그것도 마치 관객이 직접 보는 것 마냥. 설령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쇼트 (3)에서 그 남자가 그냥 가버리는 장면일지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문장만 다소 달라질 뿐이다.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무언가를 딴 후 바라보고는 그냥 갔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그것을 보겠다.”

한편 screen을 전적으로 대타자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screen은 좀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screen은 분명 spectator가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지만, 그에 앞서 감독, 배우, 카메라, 조명, 마이크 등등이 집중하고 있던 제작 현장의 재현이기도 하다. 감독들은 종종 관객으로부터 자신의 표현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백하기도 하는데, 이 때 감독들은 저마다 자신이 상상하는 관객들을 염두에 둔다. 감독은 항상 관객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인해 갈등하게 되는데, 이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screen을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때 (이렇게 가정할 수 있다면) 감독이 가지고 있을 의도 등의 재현으로서 screen은아직 극장 좌석에 자리잡지도 않은 spectator와 대면하게 된다. screen은 자신이 바라보는 (동시에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대상과 대면한 상태에서도 관객들의 응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도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이처럼 screen은 극장 좌석 앞에 앉아있는 spectator에게 분열된 주체로서의 대타자로 기능하는데 이 때에는 mOther-child unity에서의 mOther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제작되는 시기에는 항상- 이미 존재하는 spectator 앞에 자신을 주체화시키는 child로서 역전되기도 한다.

결국 ssun은 mOther-child unity에서 연원하지만, 도식적으로 대응된 결과물은 아니다. ssun에서의 동일한 철자 ‘ss’는 그 내부에서 수시로 상호 교환되는 screen과 spectator의 관계를 반영한다. 즉, screen과 spectator는 고정된 타자-주체의 관계가 아닌, 국면마다 타자-주체의 기능을 교환하며 서로를 구성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선 극장 좌석에 spectator를 고정시켜 놓았을 때의 ssun에 주목하자.

ssun은 카메라와 눈의 동일시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동일시를 넘어서는 효과를 지닌다. 동일시를 위해, 그리고 그에 근거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ssun은 구성되지만 역설적으로 ssun이 형성되자마자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분리seperation가 일어난다. 그리고 항상 잉여를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oasis이다. object a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인지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상상적 부분대상(part-objet), 즉 몸의 나머지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상상되는 요소이다.[12]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401. 따라서 영화의 경우 oasis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신체에서 눈(eye)이 분리된다. 이것이 카메라와 눈이 동일해질 수 있는 조건이다. 스크린에 부착되는 신체로부터 분리된 눈. ssun의 역설적인 측면을 잊지 않기 위해 한번 뒤집어서 말한다면, 카메라와 눈 사이에 시각적 동일시가 이루어지려면 눈이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이는 oasis가 없다면 가능치도 않은 일이다.

2. object a seen in screen = oasis

다시 말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 영화와 관객은 screen과 spectator로서 ssun을 형성시키는데 이를 통해 관객은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그가 카메라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영화와 ssun을 형성하는 동시에 분리(seperation)의 과정을 겪기 때문인데 그것은 아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취하게 되는 생존전략과 같다. “나는 엄마를 욕망하기에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제 나는 엄마가 욕망하는 대상을 욕망해야 한다. 이것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영화가 관객이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할 때 이는 명백한 분리의 과정이다. 아이가 엄마의 욕망대상이 될 수 없듯이 영화는 관객의 욕망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없다. 카메라와의 동일시를 통해 관객의 욕망은 성취되는 듯 보이지만 순수한 지각적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고 욕망하는 대상을 봄으로써 만족되는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단지 욕망의 지연만을 획득될 뿐이다.[13]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시각과 언어, 1995, p. 132.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 Continue reading 영화가 욕망하는 바를 욕망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영화가 결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객은 단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리라는 미래적 약속만을 획득할 뿐이다. 관객은 계속해서 “다음에는 . . ., 다음에는 . . .”하고 중얼거린다. 이 중얼거림은 중의적인데 그것은 두가지 어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에 차 말꼬리를 올리는 어조와 회의적이고 자조적인 어조.

영화가 관객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까닭은 oasis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oasis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그것이 획득 될 수 없기에 다른 대상들을 욕망하게끔 만드는 원인이다. 동시에 획득되지 않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그것은 기표화되지 않는 잔여물이다. oasis는 계속 관객의 욕망대상들을 자신의 주위에 맴돌도록 만듬으로써 그것들이 영화를 통해 기표화될 수 있게끔 한다(oasis의 원형적 심상). 또한 oasis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관객이 영화와 환상fantasy을 유지하게끔 관여하는 수학소이다(oasis가 지닌 신기루의 심상).[14]라캉은 object a가 번역되지 않고 “대수학 기호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캉 정신분석 사전>, p. 400). 한편 환상(fantasy)이란 … Continue reading

영화를 보면서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내러티브에 의해 지연된다. 관객의 중얼거림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쯤에서 <국가의 탄생>에서 분석한 문장을 상기해보자. 그 문장은 (1)­(2)­(3) 쇼트의 연쇄로서 구성된 것인데 자칫 오해하면 (3)쇼트에서 관객의 욕망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영화의 욕망 구조를 예시하기 위해 추출해낸 최소 단위일 뿐이며 실제 영화에서는 이보다 복잡하게 작동한다. (1)­(2)­(3)의 연쇄는 곧 (2)­(3)­(4)로 연쇄될 수도 있고, (3)­(4)­(5)로 또는 (3)­(4)­(5)­(6) . . . 등등으로 연쇄 가능하다. 이러한 연쇄의 구조는 계속해서 지속되며 마침내 영화가 종결되었을 때 (첫쇼트)―(마지막쇼트)의 연쇄 구조로 내러티브는 완성된다. “. . . 그것을 바라본다”는 문장은 마침표가 찍어지지 않은 채 다시 다음 욕망(시선)의 대상을 찾는다. 도식적으로 표현하자면,

한 남자가 목화밭에서 목화를 딴 후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고는. ..

<시티라이트>[15]Charles Chaplin, City Light, 1931, USA, 87min.에 대한 지젝의 분석은 이토록 지연된 내러티브가 oasis의 작동 효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16]S. Zizek, <당신의 증후를 즐겨라!: 헐리우드의 정신 분석>, 한나래, 1997의 1장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시티 … Continue reading <시티 라이트>는 지젝의 말마따나 마지막 장면에 모든 것을 거는 영화이다. 이 영화 전체는 궁극적으로 마지막 종결의 순간을 준비하는 데 봉사할 뿐이며, 그 순간이 도래할 때 영화는 즉시 끝날 수 있다.(Zizek, p. 30) <시티 라이트>는 방랑자를 부자로 오해하는, 번화한 거리에서 꽃을 파는 소녀에 대한 방랑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방랑자는 시력을 잃은 소녀를 수술시키기 위한 돈을 어찌어찌하여 마련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다. 출소한 후 방랑자는 소녀의 주위를 맴도는데, 어느날 소녀는 창 밖으로 방랑자를 보고 장미 한 송이와 동전 한 닢을 건네주게 된다. 이 순간 그동안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멋진 왕자님이라 상상했던 소녀는 손의 감촉을 통해 방랑자를 알아본다. ①”당신이군요?” 방랑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눈을 가리키며 묻는다. ②”이제 볼 수 있나요?” 소녀는 대답한다. ③”네 저는 이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나서 영화는 소녀를 바라보는 방랑자의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컷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Zizek, p. 32)

이 영화는 방랑자의 시선에 대한 소녀의 반응을 보여주는 대응 쇼트(counter shot)를 누락시킨 채 끝을 맺는다. 그리고 “소녀가 그를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통상적인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희망과 떨리는 불안으로 소녀를 바라보는 방랑자의 쇼트에 대한 부가적인 대응 쇼트가 필요하다. 방랑자를 받아들이는 소녀의 모습이던지, 두 사람이 다정하게 포옹하던지.(Zizek, p. 40)

소녀가 ①을 말하며 방랑자를 본다

                             방랑자가 ②를 말하며 소녀를 본다

소녀가 ③을 말하며 방랑자를 본다

방랑자가 소녀를 본다

그리고는…어? (끝)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에 구두점을 찍으면서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관객은 내러티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지연시킴으로써 환상을 유지시켰으나 <시티 라이트>는 그 기대를 과감히 져버린 채 관객의 환상이 oasis의 작동효과였음을 폭로한다(oasis가 폭로되는 것은 아니다). 관객들은 내러티브를 경유하며 마치 자신의 욕망이 충분하게 만족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는데, 그것은 다만 oasis가 은폐됨으로써 절반으로 분열된 주체가 자신의 통일성을 상상한 결과였을 뿐이다. 채플린의 위대함은 관객의 욕망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영화에서 전유했다는 데 있다. 분명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에 소녀의 대응 쇼트를 마지막에 첨가함으로써 관객의 환상에 봉사하는 해피엔딩의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영화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티 라이트>에서 행복한 해피엔딩을 맞이하더라도 관객의 환상은 여전히 oasis의 작동 효과일 뿐이다. 해피엔딩을 위해 삽입될 소녀의 대응 쇼트는 단지 내러티브를 둥그렇게 말아 영화의 처음과 끝을 꼬아 붙인 띠를 만들어낼 터인데,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이다.[17]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p. 186. 각주 13의 그림에서 환상의 수학소 $◇a는 아래 뫼비우스의 띠에서 a와 b가 만나면서 형성하는 것이다. 대응 쇼트가 있는 <시티 라이트>는 닫힌 체계의 영화이다. 반면 대응 쇼트가 부재한 <시티 라이트>는 열린 체계의 영화인데, 이렇게 말함으로써 채플린이 감독으로서 지녔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일한 해석틀을 통해 분석할 수 있는 작품으로 채플린의 또 다른 수작 <독재자>[18]Charles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USA, 126min.를 들 수 있다. <독재자>는 히틀러와 유사한 외모를 지닌 한 유태인 이발사가 겪는 좌충우돌 코미디이다. 영화 말미에 이 이발사는 히틀러로 오해를 받아 연단에 서게된 나머지 연설을 요구받는다. 그는 인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장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씬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동적이지만 그야말로 장황한 이발사의 (채플린의 의도가 집약되어 있는) 연설 장면은 굉장히 긴 시간동안 지속되는데 이를 통해 방금 전까지 관객들을 웃긴 코미디적 요소들은 완전히 무화되고 만다. 연설 장면으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데 관객이 연설에 감동 받아 코미디 내러티브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던가, 아니면 긴 연설장면을 참아내지 못하고 지루해 하거나. 두 가지 모두 내러티브 지연을 통해 구축된 관객의 환상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 채플린은 이것도 모자라서 이발사의 장황한 연설장면에 대한 대응 쇼트를 생략시켜 버린다. 우리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발사의 연설로 영화 속에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즉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대오각성을 했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다. 이는 애매함으로 남아있다. <시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가졌던 환상이 oasis를 둘러싸고 맴도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환상을 빚어냈던 내러티브에 의한 지연된 욕망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최근 흥행 영화 <글래디에이터>[19]Ridley Scott, Gladiator , 2000, USA, 154min.를 살펴보자. <글래디에이터>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인 영화이다.[20]흥미로운 사실은 지젝 역시 앞서의 책에서 히치콕의 <로프Rope>를 헤겔적인 영화라고 말한다는 점이다(Zizek, p. 53). 맥락은 다소 다를지라도 … Continue reading 콜로세움에서 최후의 검투를 벌여야 하는 막시무스와 코모두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최초의 두 인물과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의 위대한 장군이었다가 정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코모두스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고 검투사로 전락한 막시무스는 콜로세움에 자리를 잡은 로마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음으로써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한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로마 황제에 등극한 코모두스는 자신의 결핍된 정통성을 은폐하기 위해 지금으로 보자면 일종의 3S 정책인 검투 시합을 부활시킨다. 그는 금지되었던 검투 시합을 부활시킴으로써 로마 시민의 지지를 얻어 안정적인 통치를 꾀하려 한다. 막시무스와 코모두스의 관계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최초 두 인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변증법>에서의 두 인물은 자기 의식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죽일 수 없기에 주인과 노예로 남는 반면 막시무스와 코모두스는 그들을 인정해줄 로마 시민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기에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숨막히는 검투 장면 사이사이로 흥분한 로마 시민들의 모습들이 교차 편집된다. 하지만 정작 막시무스가 코모두스에게 승리하고 영화를 마쳐야만 할 때 로마 시민의 대응 쇼트는 부재한다. 대신 아주 높은 곳에서 콜로세움의 전경을 찍은 쇼트로 마감하는데, 이 쇼트 내에서 로마 시민들의 표정은 뭉뚱그러져 있어 그들의 반응을 알아볼 수가 없다. “콜로세움에 자리했던 로마 시민들은 검투 시합의 승리자에게 환호를 보낼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황제를 살해한 반역자를 처단할 것인가?”

하지만 이 물음은 <글래디에이터>를 관람한 관객에게는 과도해 보인다. 왜냐하면 관객들은 막시무스가 승리하는 동시에 이미 환상을 닫힌 체계로 구성해버렸기 때문이다. 영화의 내러티브적 논리는 막시무스가 로마 시민의 절대적 지지를 얻기 위한 아슬아슬한 게임을 펼치지만, 사실상 막시무스의 자기 의식을 인정해주고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줄 수 있는 (이미 빗금쳐져 있는) 주체는 로마 시민이 아니라 관객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마치 <국가의 탄생>의 문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콜로세움에 자리 잡은 로마 시민들은 바로 관객 자신이다. 이는 결코 비유가 아니다. 뭉뚱그려진 로마 시민들의 표정은 관객의 시선에 앞서 존재하는 응시(gaze)가 돌려보내는 한 점이다. 그것은 얼룩stain이다. 감독은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숨김으로써 응시를 은폐한다. object a 는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통해 발생되는데 이를 영화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oasis는 screen을 바라보는 spectator의 시선과 screen에 의해 돌려받은 spectator의 응시간의 분열을 통해 발생하다. oasis는 이 응시를 숨기면서 관객에게 자신을 통일된 주체(실상은 ego차원에서의 통일감일 뿐이다)로 상상하는 환상을 제공한다.

방금 전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물었던 질문은 이 얼룩을 물었던 것으로서 곧 관객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던진 문제제기이다. 이는 마치 비례항 공식과 같다. a : b = x : c일 때, b = c라면 a = x이다. a는 screen, b가 screen 속의 로마 시민, c가 spectator라고 할 때 x 는 결국 다시 screen이 된다. 따라서 로마 시민의 반응을 물었던 질문은 곧 screen과 spectator간의 관계 자체에 대한 재설정을 요구한다. 이 질문은 실재계와의 만남(encounter with the real)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능한 것이며, 자신의 환상이 oasis의 효과였다는 사실을, 자신의 응시를 돌려받고 있음을, 즉 자신이 분열된 주체임을 인지하는 순간 가능한 것이다.

oasis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이해해야 한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언급들을 발췌 요약해 본다.

사물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이다.[21]자크 라캉, <욕망 이론>, p. 195.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설명은 위 책의 3부 “시각예술이론”을 주되게 참조할 것이다. 이 책의 3부는 Four … Continue reading 응시는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 나는 한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진다.(Lacan, p. 194) 시선과 응시는 이율배반적인 관계이다. 바라보는 시선은 주체의 것인 반면 응시는 대상쪽에 있어서 그 둘 사이에는 일치나 공존이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결코 나를 볼 수 없기”때문이다.[22]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214. 시각의 영역에 욕동(drive)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시선과 응시의 분열이다.(Lacan, p. 195) 시각의 영역에서는 응시가 외부에 존재하고, 나는 보여진다. 즉, 나는 그림이다.(Lacan, p. 237) 세계 속에서 우리는 보여지는 존재들이다. 세계는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에게서 응시를 촉발하지 않는다. 세계가 응시를 촉발시키는 그 순간 생소함(strangeness) 역시 시작된다.(Lacan, p. 198) 내가 보는 것 속에는, 나의 시선에게 열려 있는 것 속에는,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지점, ‘아무 의미가 없는’ 점, 즉 그림의 얼룩stain으로서 기능하는 점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그 그림이 응시를 돌려 보내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지점이다.(Zizek, p. 57) 의식의 자기충족성이란 의식이 스스로를 발레리의 젊은 파르크(Young Parque)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식의 자기충족성에는 응시의 기능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Lacan, p. 197)

의식의 자기충족성은 응시가 은폐되면서 형성된 나르시즘이다.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말은 응시가 은폐된 의식의 환상인데, 이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겨냥한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주체는 응시를 은폐시킨 채 ‘나는 사유하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절반짜리의 분열된 주체이다.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통해 욕망이 발생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욕동(drive)이 발견된다. 욕동은 욕망의 부분적인 발현으로서 결코 만족될 수 없고, 한 대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주위를 계속해서 맴도는 것이다.[23]같은 책, p. 275. 이로부터 object a의 특권적 지위는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욕동을 돌게 하는 것으로서의 object a.

3. 소결

이제 <글래디에이터>에서 관객의 반응을 묻는 질문이 곧 관객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었다는 말은 물론, [국가의 탄생]에서의 전화된 문장 또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제시되었던 그 문장은 비록 투박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졌을 것이다. “나는 내가 (. . .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는 문장에서 구멍난 목적어의 자리를 채우는 쇼트의 연쇄는 곧 주체의 시선을 담보해줌으로써 응시를 은폐하고자 한다. 그렇게 환상은 구축되어지고 유지되며, 동시에 이미 유지되어진 채 구축된다.

‘관객 모르게 하기’의 전략은 사실상 영화가 ‘관객이 아는 바를 안다’는 사실을 관객이 모르게끔 하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신의 응시를 영화로부터 돌려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의식 속에 빠뜨려도 무관하다. 아니, 빠뜨려야 한다. 이것이 감독이 그토록 배우들에게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지 않도록 지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가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 영화는 자신이 떠맡을 수 없는 짐, 관객이 진작에 떠맡았어야 하는 짐을 지게 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몇몇 영화들은 그 짐을 기꺼이 떠맡고, 더 나아가 해체해버리려고도 하지만 그 영화들 역시 관객들이 지니는 의식의 환상을 전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환희

각주

각주
1 Lars von Trier, Europa , 1991, 113min.
2 이는 초기 기구이론가들이 사용했던 용어인데, 그들은 라캉의 개념들을 사용하여 영화의 특징들이 기구의 효과라고 이해한다. J. L. Baudry에서부터 C. Metz까지. 후에 Metz는 이를 넘어선 데까지 나아간다. (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이영재·김소연 역, 시각과 언어, 1995, pp. 112∼117.)
3 쇼트/역쇼트(shot/reverse shot) 체계에 대한 연구로는 J. P. Oudart의 Cinema and Suture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쇼트/역쇼트의 체계를 이미지와 관객의 최초 관계 속에서 균열을 봉합하고 영화적 담론을 상상계 내로 제한하는 역할로서 이해하는 데, 곧 심각한 반론에 부딪힌다. 하지만 나는 쇼트/역쇼트 체계를 포함하는 쇼트/대응쇼트(shot/counter shot)로서 영화와 관객의 욕망을 밝히고자 한다.
4 스티븐 디 캐츠, <영화 연출론Shot By Shot>, 시공사, 1998, p. 187. 이 책은 영화를 연출하는데 있어서 공식적인 문법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대부분의 내용들을 영화의 시각화 전략들에 있어서 각종 전술들을 기술한 일종의 병법서이다. 나는 이 책이 관객 모르게 하기 전략에 대한 병법서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책은 이 책 외에도 물론 많다.
5 대부분의 라캉 해석자(특히 국내의)들은 mOther-child unity에 거의 주목하지 않고 거울단계-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을 통해 주체화 방식을 설명하곤 하였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도식적 이해, 실재계의 무시 등으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김형효,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1989의 4장 “라캉과 무의식의 언어학”을 보라.)
6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Between Language and Jouissanc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 55.
7 같은 책, p. 54.
8 같은 책, p. 54에서 재인용
9 같은 책, p. 59.
10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외 역, 인간사랑, 1998, pp. 400∼402.
11 자크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1994, 권택영 외 역, p. 207.
1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401.
13 R. 웹슬리, M. 웨스틀레이크, <현대 영화이론의 이해>, 시각과 언어, 1995, p. 132.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해서는 라캉, <욕망이론>, 문예출판사, Ⅲ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나는 이를 잠시 후에 살펴볼 것이다.
14 라캉은 object a가 번역되지 않고 “대수학 기호의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라캉 정신분석 사전>, p. 400). 한편 환상(fantasy)이란 object a 와 분열된 주체와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형성되어지는 것인데 이로써 그/녀는 환영적인 전체감(phantasmatic sense of wholeness), 완전함, 충족감 등을 얻을 수 있다(Fink, Lacanian Subject, p. 60). 아래 [그림1]은 분리(seperation)를 함축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a는 환상의 수학소이다. [그림1]

Subject       Other

   ↙   ↘      ↙   ↘

ego     ◇    a       $

15 Charles Chaplin, City Light, 1931, USA, 87min.
16 S. Zizek, <당신의 증후를 즐겨라!: 헐리우드의 정신 분석>, 한나래, 1997의 1장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시티 라이트>에 대한 분석에서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을텐데 이 책을 인용할 시(Zizek, page)방식으로 표시하겠다.
17 Bruce Fink, The Lacanian Subject, p. 186. 각주 13의 그림에서 환상의 수학소 $◇a는 아래 뫼비우스의 띠에서 a와 b가 만나면서 형성하는 것이다.
18 Charles Chaplin, The Great Dictator, 1940, USA, 126min.
19 Ridley Scott, Gladiator , 2000, USA, 154min.
20 흥미로운 사실은 지젝 역시 앞서의 책에서 히치콕의 <로프Rope>를 헤겔적인 영화라고 말한다는 점이다(Zizek, p. 53). 맥락은 다소 다를지라도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나의 분석과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는데, 한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지젝의 글을 읽기 전에 이 영화를 보았으며 보자마자 헤겔적인 영화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나는 지젝을 무단 도용했다는 혐의를 입고 싶지 않다.
21 자크 라캉, <욕망 이론>, p. 195. 시선과 응시의 분열에 대한 설명은 위 책의 3부 “시각예술이론”을 주되게 참조할 것이다. 이 책의 3부는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 Alan Sheridan, New York & London : W. W. London & Company, 1981 중 pp. 67∼119의 네 편의 논문을 국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시선은 eye의 번역어로, 응시는 gaze의 번역어로 선택되었는데, 지젝은 앞서의 책에서 eye 대신 view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역자는 이를 조망이라고 번역한다. 한편 ‘라캉 정신분석 사전’에서는 gaze를 시선이라 국역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욕망 이론>의 국역에 따를 것이다.
22 딜런 에반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p. 214.
23 같은 책, p.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