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노무현은 없고 대통령만 남았다. 원칙과 소신을 상실한 노무현은 이미 노무현이 아니며, 지지자들을 배반한 노무현은 ‘노짱’이 될 수 없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라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가장 부도덕한 전쟁을 지지하고 동참하여 파병을 결정하는 사람은 노무현일 수 없고 전쟁광 부시에게 복속된 한국의 ‘푸들 대통령’일 뿐이다. 노무현은 왜 정치를 하고 대통령이 될 꿈을 꾸었는가. 노무현 자신을 배반하기 위해서?

파정결정 노무현 ‘푸들대통령’

정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을 바꿀 만한 위치에 오른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바뀌어야만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이 부조리한 사회의 작동원리 중 하나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희망을 걸었고 또 지지를 보냈던 것은 그의 바뀌지 않는 바보스러움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리와 환경 변화가 사람을 바꾼다’는 또 하나의 명제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소시민의 일상이 민중성을 잠식하듯, 대통령 권좌라는 환경 변화가 노무현에게서 노무현을 없앤 것이다.

‘국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국익’은 동물왕국의 국익이다. 실제로 ‘국익을 위해서’라는 말은, 전쟁이 불러온 참화와 인명피해 소식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하면서 반전을 호소하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각자 안방에서 전자게임 구경하듯 허상의 세계처럼 바라본 다음 뉴욕 증시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는 동물들의 세상에 가장 부합하는 말이 아닌가. 그 정치적 수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온 흔해빠진 소리 중 하나다. 바로 노무현이 청산하겠다던 ‘낡은 정치’의 수사다. 파병 결정에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쌍수로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무현은 지지자들의 반대 속에 그가 개혁 대상으로 삼았던 수구세력의 품에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지금 ‘전쟁 반대, 파병 반대’를 외치는 촛불시위대의 일원이 되었을지도 모를 노무현이다. 누구보다도 노무현을 상실한 사람은 노무현 자신이다.

토론을 좋아한다는 노무현도 없다. 검찰과 벌인 것은 토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검찰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노출시킨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토론은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가는 민주적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국민의 의식은 고양될 수 있다. 살얼음판과 같은 북-미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첨예하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민과의 기탄없는 토론 기회를 없앤 노무현은 앞으로 토론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올바른 정치인은 사회구성원들의 낮은 정치사회의식에 영합하지 않고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중우정치를 실현하려는 저급한 정치인일수록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 제5조 1항을 어기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의식 수준보다 낮은 정치적 선택을 했다. 사회구성원들의 30여년 전의 의식수준과 오늘의 의식수준을 비교할 때 그의 파병 결정은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보다 훨씬 퇴행적이다. 그런데 역시 한국사회의 권력의 맛은 다른 사회에 비해 단 것인가. 노무현 정권에 들어간 이른바 개혁인사들 가운데 토니 블레어에 반대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영국의 각료들과 같은 모습을 보인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까닭은.

반기드는 ‘개혁’ 각료도 안보여
오늘 미 제국의 대량살상무기는 뜨거운 태양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그러나 제국의 영광의 날도 기어이 저물고 만다. 그때에야 비로소 대통령은 노무현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새벽이 오기 전에 무기들은 녹슬고 인간에겐 자기정화의 시간이 찾아온다. 도대체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미국이 공습을 시작했다
좀 우스운 일이지만, 토익 공부하기가 더더욱 싫어진다
이효인의 ‘우리 영화의 몽상과 오만’이라는, 그리 재미 없는 책이나 읽고 있다
전쟁은 또 한 번 TV로 중계되고 캠퍼스는 몇몇 반전 시위가 스쳐 지나가면 금새 평온해져 버린다
지금 이 지구 한 켠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태롭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WireTap 인터넷판 3월 5일자에 게재된 샬롯의 호소, What About the Iraqi Children? 을 소개한다.

지오리포트 <georeport@georeport.net>

사람들은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하면, 군복을 입은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나, 총을 들고 있는 검은 콧수염을 기른 군인들이나, 알라시드 호텔 바닥에 ‘범죄자’라는 글씨와 함께 새겨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걸 아세요? 이라크에 살고 있는 2천400만 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걸.

이라크에는 1천200만 명의 아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바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요. 저는 열 세살이니까, 어떤 아이들은 저보다 나이가 좀 많을 수도 있고, 저보다 훨씬 어릴 수도 있고, 남자 아이일 수도 있고, 저처럼 붉은 머리가 아니라 갈색 머리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아이들은 바로 저와 너무와 비슷한 모습의 아이들입니다.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리 속에는 바로 제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제가 운이 좋다면, 1991년 2월 16일 바그다드의 공습 대피소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이 떨어뜨린 ‘스마트’ 폭탄에 살해당한 300 명의 아이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그날 공습으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고, 벽에 몰려 있던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돌더미에 붙어 있는 시커먼 살조각을 떼어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운이 없다면, 바로 이 순간 바그다드의 어린이 병원의 ‘죽음의 병실’에 있는 열 네 살의 알리 파이잘처럼 천천히 죽게 될 겁니다. 알리는 걸프전에서 사용한 열화 우라늄탄 때문에 악성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는 18개월 된 무스타파처럼 ‘모래파리’라는 기생충이 장기를 갉아 먹는 병에 걸려서 손을 써 볼 수도 없이,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겁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무스타파는 단돈 25달러밖에 안되는 약만 있으면 완전히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라크에 취한 경제봉쇄 때문에 이라크에는 약이 없습니다.

아니면 저는 죽는 대신, 살만 모하메드처럼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심리적 외상을 안고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살만은 1991년 여러분이 이라크를 폭격했을 때 여동생과 함께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만의 아버지는 온 가족을 한 방에서 함께 자게 했습니다. 모두 다 살든가, 아니면 같이 죽고 싶어서. 살만은 아직도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악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면 저는 걸프전이 벌어졌던 세 살 때 여러분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알리처럼, 고아가 될 겁니다. 알리는 3년 동안 매일같이 아버지 무덤에 덮힌 먼지를 쓸어내리며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ꡒ아빠, 이제 괜찮아요. 이제 여기서 나오세요. 아빠를 여기에 가둔 사람들은 다 가버렸어요ꡓ라고. 하지만 알리는 틀렸어요. 아버지를 가둔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것처럼 보이니까요.

아니면 전 걸프전이 벌어져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늦게까지 밤을 샐 수 있었다고 좋아했던 루아이 마예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루아이는 지금 학교에 갈 수 없어서 길에서 신문을 팔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바로 여러분의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조카나 이웃집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들이 사지가 절단되어서 고통속에 몸부림치고 있는데도, 아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없고 편안하게 해줄 수도 없이 그냥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딸이 무너진 건물의 돌더미에 깔려서 울부짖고 있는데, 구해줄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아이들이 자기 눈 앞에서 여러분이 죽는 걸 보고 나서, 굶주린 채로 혼자서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액션 영화도 아니고, 공상 영화도 아니고, 비디오 게임도 아닙니다. 바로 이라크의 아이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최근에 한 국제 조사단이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지금, 아이들이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라크를 방문했습니다. 조사단이 만나 본 아이들 중 절반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전쟁이 뭔지 알고 있고 전쟁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다섯 살 짜리 아셈에게 전쟁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셈은 전쟁이 ꡒ총과 폭탄에 날씨는 춥거나 덥고, 우리가 불에 타게 되는 것ꡓ이라고 말했습니다.

열 살 먹은 아에사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렇게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ꡒ이라크의 수많은 아이들이 죽을 거예요. 당신이 TV에서 아이들이 죽는 걸 보게 되면 후회할 거예요.ꡓ

저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른 아이들과 문제가 생기면 때리거나 욕을 하지 말고, 대신에 ‘나’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라고 배웠습니다. ‘나’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한 행동 때문에 자신이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제 기분을 이해하게 되면서 하던 행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게 ‘나’라고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나’는 ‘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라크에 사는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는 지금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의 다른 아이들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고, 그 모든 결과 때문에 고통받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목소리는 너무 작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를 때 두렵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미래를 훔치려 할 때 화가 납니다. 우리는 내일도 엄마와 아빠가 살아있기만을 바랄 때 슬퍼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를 때 혼란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