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잔에 술 한 모금과 초밥 하나, 간만의 얼굴들과 모든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을 되새김질하는 자리.
이 당연한 일상 속에서
나는 지젝을 교주로 모시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아래 문장을 써 놓고는 위 문장을 쳐 버렸는데…
재미있군.
죽잔에 술 한 모금과 초밥 하나, 간만의 얼굴들과 모든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다는 것을 되새김질하는 자리.
이 당연한 일상 속에서
나는 지젝을 교주로 모시려 하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아래 문장을 써 놓고는 위 문장을 쳐 버렸는데…
재미있군.
꿈에서 발터 벤야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제 그의 말들도 가물가물한데 왜인지…
그리고 나에게 또하나의 행운은 낙엽처럼 떨어졌다.
http://emerge.joins.com/200204/200204_16.asp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
정신분석학적 사회이론
사회적 환상이여,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실재계에 대한 재해석을 중심으로*
양운덕 / 고려대 강사
I. 들어가면서
지젝은 흥미로운 이론가이다. 우리가 라깡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난해한 개념들을 그가 대중문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점만으로도 흥미를 끌만하다. 물론 이런 해석이 단순히 라깡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는 것만은 아니고 라깡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그가 라깡을 사회이론, 이데올로기 이론의 한가운데로 불러와서 무의식 이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개인의 주관적 욕망과 사회 현실을 접맥시키려는 시도들이 별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지젝은 나름대로 욕망의 사회철학으로 현재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고자 한다.
먼저 예를 보면서 얘기를 시작하자. 두 남자가 스코틀랜드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선반에 있는 꾸러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맥거핀MacGuffin’이라고 하면서 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 사자를 잡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대에는 사자가 없으니 어쩌랴! 그럼 맥거핀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 at all’이다.
그러면 이것은 쓸모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히치콕의 생각은 다르다. 다음과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그려보자. 몇 사람이 포커를 하러 방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 전에 누군가가 테이블 밑에 몰래 시한폭탄을 장치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포커를 시작하고 폭탄에 장착된 시계 초침은 계속 자신의 목표지점을 향하여 긴박하게 가고 있다.
긴장감. 포커를 하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과 시계 초침이 가는 장면이 번갈아 나온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한 사람이 엉뚱한 제안을 하고(영화나 보러 가자!) 그들은 무사히 방을 빠져나간다. 결국 이 장치는 줄거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관객들을 혼란과 서스펜스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맥거핀은 영화 줄거리에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필수적이다. 플롯의 한 장치로서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갈 때 계속 헛짚게 만들면서 영화적 효과를 만든다.
지젝은 이런 맥거핀을 라깡의 ‘실재적 대상'(대상-a)으로 설명한다. (히치콕) 영화를 그저 즐기던 사람과 라깡의 대상-a에 대해서 오랜 궁금증을 안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너무나 멋진 안내가 아닌가? 지젝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욕망의 텍스트들을 라깡의 영역으로 이끈다. 그래서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대중문화 현상들을 욕망, 무의식의 눈으로 볼 수 있다.
라깡이 자신을 ‘프로이트주의자’라고 선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수많은 자기 추종자들 앞에서 그들이 ‘라깡주의자’를 고수하더라도 적어도 자기만큼은 ‘프로이트주의자’로 남겠다고 했다. 라깡은 자신의 모든 이론적 작업이 ‘프로이트로 돌아가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틀 안에서 프로이트를 (프로이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보충하고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런 주장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그가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의 도움으로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다시/다르게 말할 때 누구도 이런 해석이 갖는 독창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記標 이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틀, 보로매우스의 매듭 등이 프로이트를 프로이트답게 만들기 위한 것이란 묘한 주장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지젝은 라깡을 재해석하고 보충하고 응용하려고 한다. 그는 ‘라깡주의자’로서 라깡 이론이 지닌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 영역―대중문화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에 걸친 영역―에 펼치면서 그 이론의 가능성을 한껏 넓힌다. 이제 사회 현실과 정치적 영역은 욕망-현실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갖는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무의식의 문제틀이 사회적 욕망, 증상,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는 틀로 발전된 셈이다.
지젝이 몸담고 있었던 슬로베니아 라깡 학회는 라깡의 틀로 전통적인 근대철학(독일관념론)을 재해석하고, 문화예술(특히 영화)을 라깡주의적으로 분석하고, 라깡의 틀로 이데올로기와 권력 이론을 구성하는 데 몰두했다. 지젝 역시 이런 이론적 지향을 공유했고 그들 가운데 이론적 성과가 두드러진 인물이다. 물론 이 학회와 지젝의 관심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슬로베니아의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정치적 활동과도 연결된다.
지젝의 지적처럼 라깡 이론이 후기에 초점을 옮겼다고 한다면 종래와는 다른 해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지젝의 재해석 가운데 라깡을 ‘실재계’의 이론가로 보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흔히 라깡을 상징계 이론가로 볼 때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기표들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기표들이 마련한 자리, 의미, 역할을 부여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것을 주체를 무력한 존재로 보는 반주체주의적인 구조주의의 상투적인 논의라고 보면서 못 마땅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라깡을 ‘양처럼 순하게’ 늘어서 있는 주체들을 질서의 이름으로 길들이려는, 주체들에게 욕망의 허망함을 가르치려는 이론가로 여겼다. 지젝은 이런 해석에 반대하고 라깡의 ‘실재계’를 전면에 부각시켜서 새로운 방식으로 주체와 사회적 관계의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효과가 지젝의 이데올로기 이론, 사회적 환상, 전체주의적 욕망 만들기에서 잘 나타나므로 이런 사회적 욕망의 영역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II. 상징계의 두 얼굴―상징계가 온전히 전체가 아니라면?
라깡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설명한다. 이 세 영역은 서로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이처럼 상호작용하는 세 영역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상상계l’imaginaire; the Imaginary는 라깡이 거울 단계로 설명하듯이 어린이가 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를 자기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영역이다.
여기에서 자기와 타자(거울에 비친 자기 이미지)는 구별되지 않는 ‘하나’이다. 이 영역에서 차이나 구별은 없고 두 항은 보완적이다. 아이와 엄마―또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는 조화로운 총체를 이룬다. 여기에서 각 항은 다른 항에게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것을 준다. 그래서 각자는 타인 안에 있는 결핍을 채워준다(고 상상한다). 나와 너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
상상계가 조화로운 전체인 데 반해서 상징계le symbolique; the Symbolic는 차이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상징’은 대상을 대신하는 기호이다. 예를 들어서 ‘강아지’는 실제의 강아지를 대신한다. 그래서 ‘강아지’가 있는 곳에 실제 강아지는 없다. 그리고 ‘강아지’ 기호는 다른 기호들―’송아지’, ‘망아지’ ‘박아지’ ‘호랑이 새끼’ 등―과 관계맺는다. 이 관계에서 한 기표는 다른 記票들과 다르기 때문에 자기일 수 있다. ‘사랑’은 원래 사랑이어서 사랑이 아니라 ‘사탕’이 아니어서 ‘사랑’이다. 이렇게 차이와 대립을 통해서 각 기표는 자기 의미-동일성을 마련한다. 한 기표는 이런 관계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어떤 기표도 이런 차이관계 바깥에 있을 수 없다.
상상계의 조화로운 관계와 달리 ‘상징적’ 관계는 차이를 통해서 만난다. 각 항은 저마다 결핍을 안고 있고, 자기의 결핍을 상대방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각자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서 채우려고 하는 ‘반쪽’들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나의 잃어버린 반쪽인가?” “그럼 너는?” 반쪽을 찾는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을까? 라깡은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매정한 표현은 성관계를 맺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서 자기의 결핍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계는 두 얼굴을 지닌다. 한 얼굴은 상징 질서가 각 요소를 일정한 자리에 배치하고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징질서는 요소를 뛰어넘는 전체이고 의미를 배당하는 우월한 주인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 질서는 그 요소들에게 낯설고 넘볼 수 없는 ‘他者l’Autre’로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군림하는 상징 질서가 온전한 전체를 이루지 못한 채 어떤 결핍을 지닌 점이 그 다른 얼굴이다.
1) 먼저 첫 번째 측면을 보자. 주체들은 말의 세계에 들어갈 때 어떻게 달라지는가? 말이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주체가 자신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표현할 매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체는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말은 이런 주체에게 표현수단을 빌려준다. 구별 없는 혼돈에서 벗어나 이것과 저것이 다름을 표시함으로써 주체는 다른 것과 다른 자기를 나타낼 수 있다. (A는 B와 C가 아니기 때문에 A일 수 있다)
말을 통해서만 주체는 자신을 발견한다. 곧 주체는 기표에 의해서 표상된다. 그런데 주체는 기표에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주체의 자기 동일성의 상실을 말한다. 곧 언어 기호가 주체를 대신하면서 주체는 그 기호들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정립한다. 라깡은 이것을 “한 기표는 다른 기표들에 대해서 주체를 표상/대리한다repr senter”고 표현한다.1)
그런데 문제는 주체와 그것을 표상/대리하는 기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체는 자신에게 맞는 기표를 찾을 수 없다.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름을 지시할 뿐이다. ‘운덕’은 ‘준영’, ‘영준’과 다름을 나타낼 뿐이고, ‘아버지’는 ‘아이’와 ‘엄마’ 사이에 있다.)
주체는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표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 기표라는 매개 수단 때문에 정작 자기 동일성을 잃어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역설, 또는 기표들 안에서 주체가 소외되는 것은 주체가 말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피할 수 없다. 라깡은 이처럼 말의 세계에서 주체가 자기를 표현하는 적합한 기표를 얻을 수 없음을 ‘상징적 거세’로 본다(Zizek, 1996, 46∼7). 이것은 한 요소가 자기자신으로부터 분열되고 구조 안에 자리잡는 것을 가리킨다. 주체는 처음부터 탈중심화된 채로 있고 그 의미와 논리가 자기 통제를 벗어난 구조의 한 부분이 된다.
기표들의 연쇄는 주체가 갈 길을 규정한다. 말하는 존재parl tre(말하다parle+존재 tre)인 주체는 상징계의 기표들 사이에 있다. 기표들이 주체를 자리 매김하고, 욕망을 배당한다. 그래서 주체들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 우편배달부facteur에 해당된다. 하지만 상징계 안에서 주체는 자기가 기표들을 사용하여 충분히, 제대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오해한다.
주체는 자신이 기표들의 주인이고 능동적인 존재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주체는 기표들의 작용에 따른 산물,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상호주관성에 사로잡힌 주체들은 ‘양보다 온순하게’ 자기들이 지나가는 기표 연쇄 속에서 자리잡는다. 이런 주체들에게 상징 질서는 그를 지배하는 낯선 ‘타자'(l’Autre: 대문자 타자 또는 큰 타자)로 나타난다.
2) 다른 얼굴은 어떤 것인가? 라깡은 이런 차이관계網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전체를 이루거나 모든 요소들의 안정된 동일성을 마련하지 못한다고 본다. 상징계는 어떤 빈틈, 결핍을 지니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모든 요소를 총괄하는 구조가 전체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런 구조가 어떻게 전체를 이룬 것처럼 여겨지고 각 요소들 위에 군림하는가?
앞에서 기표들의 차이관계에서 각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마련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하려면 (원리적으로) 각 기표가 갖는 개별적인 차이들에 앞서는 ‘차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사랑과 미움의 차이’이다. (이런 차이에 바탕을 두어야만 각 기호들이 자기 동일성을 세울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차이 자체’를 나타낼 기호는 없다.2) ‘차이’는 고정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
원리적으로 차이 자체를 가리키는 기호를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차이 자체를 제거하거나 은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차이관계망에는 어떤 빈곳이 있는 셈이다. 이 구멍을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메워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기표들은 S1→ S2→ S3→ …처럼 끝없이 지시, 순환하므로 이것을 고정시킬 어떤 것을 상정해 보자. 그래서 어떤 Sw를 Sx에 고정시키자 (Sw=Sx라고 하고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상a를 상정하자). 이런 경우에 비로소 기표들의 끝없는 지시관계가 매듭지어진다. ‘두 기표가 같아져서’ 차이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곧 다른 두 기표가 같은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런 요술 때문에 ‘차이 자체’가 마치 대상a로 구현된 것처럼 여길 수 있다(홍준기, 2001, 137∼8).
다시 정리해 보자. 차이 자체를 가리키는 기표는 가능하지 않지만 그런 불가능성, 부재, 결핍에 몸을 빌려주는embody 것을 가정할 수는 있다. (물론 이것은 다른 것들의 의미를 만들어주지만 정작 그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무의미’이다―모든 의미 밑에는 무의미가 숨어있다.4)) 이런 것이 있고, 그것이 이런 은밀한 작용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런 조작을 통해서 차이관계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불안정한 상징계가 마치 단단한 지반 위에서 잘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상징질서는 안정된 의미체계로서 조화롭고 整合的인consistent 전체인 듯이 여겨진다.
라깡은 이런 점 때문에 상징 질서가 결핍을 안고 있고, 이런 결핍 주위에서 상징질서가 구조화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큰 타자(상징질서)는 완결된 전체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큰 타자의 욕망’이란 표현이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런 타자(상징질서)가 전체가 아니므로(pas-toute; not-all) 나름대로 완전성을 추구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정신분석 치료가 단순히 병든 개인을 치료해서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분석자 역시 결핍을 안고 있다. 그는 단지 ‘안다고 상정된 주체sujet suppos savoir’일 뿐이다. 사회 질서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치료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점 때문에 라깡은 정신분석을 부적응자를 치료하여 사회에 적응시키고 개인의 성숙한 인격 발달을 권장하는 것으로 본 미국식 ‘자아심리학’을 거부했다.
지젝은 상징계에 우연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든 왕의 역할을 보자. 합리적 총체성을 구현하는 국가는 그것이 왕의 신체로 구현되는 한에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왕은 (비록 그가 비합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현존을 갖는 것에 불과하지만) 국가이다. 국가는 그의 몸에서 그 유효성을 완성하고 국가의 필연성은 이런 우연성에 바탕을 둔다.
사실 왕이 하는 일은 글자 i에 윗점을 찍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끝맺음이 없이는(사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국가 조직은 움직일 수 없다. 이처럼 어떤 한 요소가 형식적 구조 자체를 구현하고 그 우연성 위에 필연성을 세운다.
어쨌든 라깡에 따르면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종래처럼 상징계를 앞세우는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성에 머물러’ 그 역설을 견디어야만 욕망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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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내용
1) 이런 기표의 ‘대리’ 때문에 주체는 대리되는 기표 뒤로 사라진다. 주체는 기의의 자리에 놓이고 기표 차원에서 보이지 않은 채로 억압된다. 라깡의 ‘은유’, ‘증상’에 대한 설명을 참조할 것.
2) 만약 A, B를 다르게 만드는 차이를 기호 X로 나타냈다고 하더라도, 다시 A, B, X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 Z가 또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뒤로 물러서는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3)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회해보자. 우리는 이미 해결책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상품교환을 보자. 각 상품(노동산물)은 다른 상품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된다. A상품 1 단위와 B상품 2 단위, C상품 3 단위를 등가로 교환한다고 하자. A=2B=3C. 이 경우에 각 상품은 다른 상품의 가치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 경우는 앞에서 본 기표들의 차이관계가 처한 상황과 ‘형식적으로’ 같다.) 각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가치들과 일정한 ‘차이’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이런 물물교환 방식 대신에 기준이 될만한 한 상품(이 경우에 상품A)으로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정하거나, 더 간편하게 아예 상품 대신에 모든 상품의 가치를 표상하는 ‘화폐’를 사용할 수 있다. 화폐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비추는 ‘일반적인’ 거울이 된다. 화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상품이 아니란 점에서), 다른 상품들의 가치 차이를 재는 ‘어떤 것’처럼 작용한다.
이제 상품A와 B의 가치 차이(외적인 차이)가 화폐의 많고 적음의 차이(내적인 차이)로 표상된다. 화폐는 ‘차이 자체’를 순수하게 표상한다. 재미있게도 상품들의 차이 놀이는 이런 상품 아닌 것의 도움으로 조화롭게 진행된다. 화폐 그 자체는 차이 놀이에 참여하지 않지만 이 놀이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런 화폐가 물질적인 몸을 갖추고 자신도 다른 상품과 같은 상품인 듯이 꾸미면 이런 화폐의 작용은 은폐된다.
4) 서로 다른 기표가 직접 일치함을 뜻하는 이 대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고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