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정치의 가장 추악한 측면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한 말처럼 나치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획득한 그것과 이 곳의 현재 모습이 어찌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현대 민주주의 속에 숨은 히스테리가 폭발하는 것만 같다.
이 상황에 정상적일 수 있는가?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 31명은 청와대근처까지 접근했다가 단 한 명을 남기고 전원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무장공비 김신조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북조선 1240부대 소속이며,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중앙 정보부는 북한에 “이 치욕을 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내려보낸 것과 똑같은 숫자의 31명을 선발해서 ‘김일성 주석궁에 침투시켜 모가지를 따오는’ 계획을 세웠다.

공식 부대명은 공군 7069부대 소속 2325전대 209파견대, 하지만 1968년 4월에 만들어져 ‘684부대’라고 알려진 특수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사형수와 무기수, 혹은 중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로 구성해 그들에게 “작전 성공 시 모든 형벌 및 전과기록을 말소하고 새로운 삶을 정부가 보장한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의 훈련은 실미도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끔찍한 훈련은 그들을 고작 3개월만에 ‘김일성 목을 따올 수 있는’ 부대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작전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평화통일을 내세웠고, 이제 684부대는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3년 4개월을 기다렸다.

김일성 모가지 따러간다던 그들

정부는 부담스러워진 684부대를 ‘말소’시키려고 했고, 684부대원들은 그 결정이 부당하다는 것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실미도를 벗어나 전원 청와대로 향했다. 그들은 인천에 내리자마자 버스를 탈취해서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을 가로  막고 나선 군부대에 의해서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대낮 총격교전 끝에 전원 자폭하였다. 1971년 오후 2시 25분의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은 4명도 그 이듬해 3월 10일 사형집행 하였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미도 사건이다.

강우석의 열 번째 영화 「실미도」는 그냥 거두절미하고 북한의 1240부대가 청와대를 눈 앞 에 두고 전멸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남한의 684부대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대낮에 자폭하는 것으로 끝난다. 거의 기록이 남겨져있지 않은 이 묻혀진 역사 속의 사건을 다루면서 인물들은 모두들 하나의 결론만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들은 집단의 결론을 따르고, 그 결론에 의해 운명을 결정한다. 아무도 여기서 피해가지 못한다. 거기서 선택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운명에 저항하며 죽을 것인지 사이의 차이뿐이다. 그 선택은 신기하게도 31명의 684대원들도 그러하지만, 악역을 떠맡고 역사의 그 자리에서 그들의 운명을 관장한 것처럼 보이는 중앙정보부의 간부들도 마치 사후적으로 역사를 승인하듯이 오직 그들의 죽음에만 몰두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협상도 없으며, 마치 역사를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저 상투적으로 말한다면 강우석은 여기에 또 다른 드라마가 개입하기를 원치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 목표는 결국 허망한 전원 자폭이다.

이 영화를 그저 주어진 대로 보면 별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너무 명백해 보인다. 31명은 범죄자들이었고, 사면을 대가로 지옥과 같은 훈련을 견뎌낸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결정에 따라 ‘모두 죽는다’. 실미도 사건은 그 이야기만으로도 듣는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그건 박정희 시대의 모든 사건이 그러한 것처럼, 혹은 전두환이나 노태우 정권의 저 비도덕적이고 반인간적인 대부분의 사건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냉전 이데올로기 아래 분단의 이름으로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희생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31명의 무의미한 죽음을 다룬 것만으로도 감동적일 것이다. 별다른 감상적인 드라마를 끌어들이지 않은 이 영화는 역사에 대한 고발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그 반대로 역사를 끌어들인 스펙터클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누가 찍어도 슬픈 것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역사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영화는 생각할수록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이 영화가 어설프게도 그 모든 인물들이 피와 살을 얻지 못한 채 그저 역사의 인형처럼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적으로만 말한다면 그 누구도 역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그저 사건 주변만을 빙빙 맴돈다는 생각을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강우석의 잘못이다. 하지만 정말 괴이한 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미도」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다시 구성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를 사후적으로 승인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를 올바르게 구성했냐고 물어보는 것은 사이비 논쟁이다. 올바른 질문은 그 역사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가 정당하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사건주변만을 맴도는 역사의 주인공들

강우석은 처음에는 단도직입적으로 사건을 찍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훈련과 배신, 그리고 죽음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이야기는 단순하고,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 배경을 알 수가 없다. 잘못은 저질러졌으며, 그것은 결국 잘못 수습되어진다. 그걸 다루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해져도 피할 수 없는 함정이 생겨난다.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과 자기가 다루어야 할 사건을 주어진 역사 안에서 통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 안의 사건은 언제나 매우 불균질하며,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은 복합적인 모순을 끌어들인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건이 벌어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이데올로기가 스며들기 마련이며, 그것을 사건으로 성립시키는 이야기가 되기 위해 환상이라는 버팀목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첫 장면. 깡패로 살아가는 강인찬(설경구)는 청와대에 김신조의 1240부대가 침투하던 날 횟칼로 상대편 조폭 두목의 배를 쑤신다. 이 장면은 김신조의 부대와 강인찬의 칼질을 교차 편집해서 마치 김신조의 부대가 청와대에 들이닥쳐 박정희의 ‘배떼기를 쑤시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니까 영화적으로는 이미 죽인 것이기 때문에 강인찬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거나, 처음부터 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강인찬은 사형 선고를 받고, 그런 다음 684부대장 최재현 준위(안성기)가 찾아와 “나를 위해서 다시 한번 칼을 잡지 않겠냐”고 묻는다. 강인찬은 왜 다시 칼을 잡고 북한에 올라가 김일성의 목을 따려는 것일까? 단지 사면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여기에 여전히 우리 시대를 맴돌고 있는 저 뿌리깊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기괴한 설득이 개입한다.

강인찬의 아버지는 북한에 자진 월북하였으며, 그로 인한 연좌제로 강인찬의 인생은 망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강인찬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이 도착된 상태로 “김일성의 목을 따서 남한에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어머니와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동기라면 그 지옥을 버틸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드라마 전체를 밀고 나간다. (정말 놀랍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영화가 아니라 2003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강인찬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사회적으로 이미 죽은 인물이다. 죽은 아들이 정부의 부름을 받고 그 임무의 수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약속하는 ‘제도적’ 아버지 최재현의 약속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 이 영화의 사실상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강인찬에게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북한에 자진 월북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에 수시로 침투하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아들 강인찬은 두 명의 아버지 모두로부터 배신당한다. 그래서 결국 강인찬이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러” 북한에 침투하건, 그 반대로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건 그에게는 결국 같은 행위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 아버지의 배신에 대해서 맞대면하는 상징적 자살의 몸짓이다.

그러나 그 몸짓은 역사의 무대에서 아버지의 연출 아래 펼쳐지는 아들의 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진정한 비극이다. 아들 강인찬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 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을 대상으로 이제 아버지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강인찬의 아버지, 역사의 권력은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려는 그에게 벌이 내려지고, 강인찬은 그의 새로운 아들(들)과 함께 자살한다.

그들은 왜 교전하지 않고 자살했나

여기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미 벌어진 사건과 허구적으로 더해진 사건을 하나로 봉합시키기 위해서 북한에 보내지기 위한 특수부대의 주인공으로 북한에 의해 상처받은 아들을 필요로 하는 저 복수심에 불타는 냉전주의 이데올로기와 박정희 시대, 독재권력의 관료적 체제에 의한 희생으로 버림받은 아들을 같은 자리에 가져다 놓은 믿음이다. 거기에는 희생의 이름 아래 두 개의 역사적 결과를 동일한 수준으로 다시 재구성하는 기괴한 봉합이 있다.

강인찬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괴물이다. 왜냐하면 두 명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실미도」는 거기에 권력과 역사의 희생 아래 죽음을 받아들인 비극적 숭고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사실은 그 믿음이 괴물인 셈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때 생겨나는 거짓 비난이다. 그것이 어쩌면 여전히 박정희의 유령이 우리 사이를 배회하는 이유일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31명의 684부대 대원들은 역사 속에서 죽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하소연하지 못한 그들도 함께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31명의 집단 자살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올 수”도 있었던 그들은 교전하지 않고 자살한 것일까? 자살은 명백히 소멸이 아니라 메시지이다. 더 이상한 질문. 대통령이 시간 날 때마다 조건절을 달아 그만 두겠다고 공공연하게 약속하는 지금 왜 「실미도」와 같은 대중영화가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안고 만들어질까? 신문을 보다가 푸념을 했다. 사건이 안 생기는 날이 하루도 없군요. 옆에 앉은 낯선 분이 대답했다. 그게 남한에서 사는 재미지요. 나는 그 사람이 31명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이상한 나라에서 우리는 역사 속의 살아있는 시체들과 함께 이상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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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정성일

월간말 2004년 211호

나에게도 결국 행운은 왔다.
하지만 다시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금 불안은 지속될 것이다.
잠시의 여유도 없이 다시 달려야 하는데
어떻게든 그대들을 만나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