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퇴근 대중교통 이용시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그만큼 걷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말) 씨네21을 읽는 속도가 무척 줄어들었다.
3주 전 600호 중(ㅡ.ㅡ;) 가장 재미있었던 기사는 바로 이것, ‘정윤철 감독, 평론가에게 묻다.’
당연히 정성일과의 인터뷰가 분량이 가장 길다 ㅋㅋ
[년도:] 2007년
Children of Men (칠드런 오브 맨/멘)
세상의 진보를 얘기하기에는 지쳐버린 시대에 불안은 진보의 불가능이 아니라 번식의 불능으로 옮아간 것인가. 번식 불능의 시대는 역사의 종착지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출산/육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는 사회적 출산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종용한다. 자의에서 시작한 불임 장애.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이 더이상 번식하지 않는 것을 이 역사의 마지막으로 가정하는 상상은 충분히 개연성 있다.
나는 이 가정으로도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짧았다. 바로 지금 우리는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바로 뒤에는 전쟁, 테러, 폭력, 배타와 차별, 격리, 환경오염과 쉼없는 파괴가 있다. 2027년의 미래는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세련된 도심 뒤에는 황무지와 폐촌을 볼 수 있고, 영화 속 영국 불법이민자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시가전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죽은 남편을 안고 통곡하는 아랍의 여인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난민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재현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 동일한 형태로 절망적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국일까? 하필이면 미국이 아니라 영국일까? 과거의 영국, 지금의 미국, 그리고 다시 미래의 영국. 시대를 뒤집어 시대의 원류와 원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덧붙여 이 영화가 원하는 희망의 대안은 무엇일까? 백인-앵글로색슨-청교도-남성이 아니라 흑인-오리엔탈(아랍-동양)-불교-여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Music and Lyrics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에서 소피 피셔는 노래의 멜로디가 형식, 육체적인 것, 상대방의 첫인상 같은 것이라면 가사는 내용, 정신적인 것, 상대방과의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영화에서 멜로디는 알렉스 플레처를, 가사는 소피 피셔를 가리킨다.
예전에 나는 팝송을 듣기 싫어했다. 가사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노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가사보다 멜로디로 노래를 듣는다. 가사가 노래를 듣는 중요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시보다 시를 실은 몸으로서의 소리 그 자체를 더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팝송을 즐겨 듣는다. 소피의 말이 맞다면 나는 점점 알렉스형 인간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소피와 알렉스, 시와 소리 그 사이 적절한 자리에 내가 있으면 좋겠다.
Way Back into Love [Demo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