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인터넷이나 OA 따위가 학생들에게 생소한 때였고 나는 이미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대학시절 쓴 레포트를 모두 파일로 보관할 수 있었다. 어설프고 성글지만 나름 고민한 흔적과 지금은 떠올리지도 못할 사고의 단편들을 돌이켜 보는 즐거움을 버릴 수 없어 그 파일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데스크톱 검색 프로그램으로 검색된 결과에서 아무리 찾아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나오지 않길래 살펴봤더니 레포트 파일 상당수가 유실된 상태였다. 수많은 포맷과 복구 중에 어느 순간엔가 사라졌음에 틀림없다. 파일 몇 개 날아갔는데 나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디지털 세대의 슬픈 한계인가 싶다.

나는 이 영화의 많은 면이 좋다. 시대의 모순에 저항한 좌파활동가의 경직된 언어를 잘 씹어주는 것이나 그들의 뒤에서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들의 후원자, 어머니, 여성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려는 태도가 좋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딴지를 걸고 싶다. 왜 바깥에서 오현우를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는 한윤희는 단 한 번도 기다림과 생활의 고단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그는 80년대 산골에서도 커리어 우먼과 같은 세련미를 지니고 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번듯한 화방을 꾸리고 잘 산다. 심지어 어머니는 한의원으로 생각되는 멀쩡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딸 은결의 양육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윤희는 오현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고 시대의 아픔을 가만히 참아내기만 하면 될 만큼의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성적, 계급적 약자에 대한 묘사는 까만 땅콩이라는 학출 공순이에게 위임하고 한윤희는 세련되고 쿨하기까지 한 이상적 어머니의 모습만 취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윤희는 좀더 세밀히 다듬어졌어야 했다.

진진님의 블로그에서 우울증에 대한 글을 보고 문득 드는 생각.
어느 한 연예인의 자살로 다시한번 애꿎은 우울증의 위력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 같다. 낌새를 알아차리기도 힘든 데다 치료하기도 힘든 우울증. 진진님이 말한 바와 같이 우울증 환자에게 처방되는 항우울제는 우울증을 화학적으로 억제할 수는 있어도 심리적,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항우울제는 우울증이 해결되어야 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만일 우울증이 두뇌의 호르몬 작용에서 출발하는 문제라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처한 심리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울의 화학작용이 생기는 거라면 우울증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사랑, 우정, 사업 따위에 실패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잘 풀리는 사람에게도 우울증은 거부할 수 없는 복병이다. 생략하고, 우울함의 근거는 예정된 실패에 대한 직감에 있는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암시 위를 까맣게 덧칠하고 버텨내고 있을 때 어떤 예민한 사람들은 그 암시가 눈앞에 계속 어른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항우울제를 투여하고 술을 마셔 댄들 눈앞의 망령은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은 우울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멀쩡한’ 우리들은 그 밀봉된 어둠의 진실을 꺼내 볼 용기가 없는 것뿐이다. 우울을 근원으로부터 제거하려면 생각하는 존재이기를 멈춰야 할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