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이 시청 앞 제자리에서 경찰의 저지로 멈춘 상태로
12시가 다 돼 오고
이런 저런 상황이 많이 발생했다.
시청 분수대 앞에 선 닭장차에 어느 시민이 깔릴 뻔한 아찔한 상황도 연출되고
경찰서장과 시민들 사이의 설전도 오고가고 등등…
그 중 하나 드라마틱한 장면이 있었다면
그건 어느 작은 밴드가 대한문 앞에서 공연을 시작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그 공연을 지켜봤고
대한문 돌담을 따라 서 있는 전경들도 볼 수 있게 다들 앉기 시작했다.
조용하게 음악이 흐르고 진짜 문화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폰카라서 사진이 영…


참, 가운데 피리 불고 아코디언 연주하던 홍일점 처자 한 눈에 반했다…
그나저나 너무 피곤하니 일단 자자…

+ 아, 이들의 정체가 궁금한데…누구일까?

촛불들을 ‘지도’하지 마세요 – 촛불시위 참가자가 운동그룹 ‘다함께’에 보내는 공개편지

다함께 진영이 촛불집회에서 많이 나대기는 하더라.
마치 자신들이 이 집회에 대단한 책임과 의무를 느끼는 것처럼, 아니 자신들이 아니면 이 집회를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 것처럼.
소위 운동권의 필요 이상의 시대적 사명감은 스스로에게도 주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을 보면서도 사실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주인공 오형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목도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 하다가 결국 시대의 증인이 되기는커녕 마지막에 느닷없이, 정말 느닷없이 자살해 버리는데, 이게 운동권의 감수성과 어떤 면에서 닮아 있는 것 같다.

내가 원했던 바를 절반만 이룬 상태이다 보니 지금 상황에 불만족스럽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하는 것 같고.
(예를 들어 질질 끌던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고 영화도 더 생각하며 보고 여기 블로그에 글도 좀 더 말 되게 써 보고 사진도 자연스럽게 찍어 보고 하는 것들, 지금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한데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 부족한 절반(좀더 나은 급여, 그리고 좀더 많은 책임과 권한. 지금은 시키는 것만 하고 단순 반복 작업인데다 내가 어디까지 움직여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수동성의 늪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을 채워 줄 다른 기회들에 대해 항상 후회하고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절반에 투항하면 다시 예의 괴리감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사실 앞뒤 가릴 필요 없다면 공부 좀 더 해 보는 게 제일 좋은데…
나, 지금 과연 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