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 한국사회에서 집회는 합법적이기가 하늘에 별 따기 같다.
모든 집회를 위법, 불법의 티끌 같은 여지도 사전, 사후에 감시 받으며 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동자, 철거민, 농민,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집회를 교통 체증을 유발하거나 경제 순환을 발목 잡는 것쯤으로 치부해 온 일반적인 인식을 보면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집회는 공공연한 터부 같은 것으로 비쳐진 것 같다.
집회는 부적절하고 성급하며 공격적이고 이기적이어서 곧 악인 것, 이게 한국인이 갖고 있는 정치 사회의식의 상징적 수준이다.
그런데 계급적, 사회적, 문화적 구분의 틀에서 가장 광범위한 당사자를 포괄하는 광우병 수입 논란이 일어나자 시민들은 이제서야 스스로 발목잡고 있던 터부가 자신의 힘임을 느끼는 것 같다.
명박이와 미국과 조중동이 시민을 자극하는 분위기는 점점 90년대를 넘어 8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이로 인해 촛불집회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광우병과 관련한 안전한 식량을 확보할 권리, 자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가기관을 가질 권리라는, 시민 내부의 차이를 굳이 따질 필요 없는 포괄적인 의제 앞에서 소위 집회와 이를 통한 연대의 자유는 재조명된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 집회를 지지한다.
그리고 종종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이게 바로 한국 시민들이 자초한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눈꼽만큼도 대변해 주지 않을 명박이를 (그에게 투표함으로써, 또는 비슷한 다른 부류로 표를 몰아 줌으로써, 또는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한국 사회에 한 줌도 안 될 핵심 기득권에 봉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그 멤버인 녀석을 떡하니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 것은 자기 자식은 모두 명문대 갈 거라 믿고 자기는 곧 죽어도 중산층 이상이라 믿고 뉴타운 개발하면 바로 자신이 수혜자일 거라 믿던 한국 시민들 자신이다.
이건 말하자면 계급에 대한 배반이라기보다 계급에 대한 착각이다.
나아가 사회적 연대에 대한 배반이라기보다 연대할 대상에 대한 착각이다.
이 착각은 계급적, 성적, 환경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사회 연대의 힘을 수없이 갉아먹었다.
수많은 가능성들이 진전되지 못한 것은 이 연대에 대한 착각, 그리고 자기 규정에 대한 착각에 원인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항세력이 제대로 뭉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일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광우병 문제가 일단락되고 명박이가 이 건에 한해 시민들의 원성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득이 되지 않을 정책들이 바로 뒤에 한 트럭 이상 줄 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시민들은 자신이 뽑은 이명박을 대면하면서 자신이 연대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자기 규정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선 직전에 한 친구가 한 말처럼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에 명박이를 시민들의 학습의 계기로 보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쩌면 21년 전에 했어야 했고) 지금 피했어야 할 학습을 하고 있다.

11
(중략)

시선으로서의 가시적인 것,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 즉 이면, 숨겨진 곳, 유보된 장소 쪽으로 뚫린 구멍이라는 의미에서의 시선. 그것은 보는 주체로서의 가시적인 것이다. 개개의 사물이 가시적이 되는 것은 보기 시작함으로써, 어떤 시선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니까. 그 시선이 그것에게 진정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도록 주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또다시 그리고 항상 예(exemplum, eximo – 공통되고 구별되지 않는 조건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라는 의미)를 들건대, 마틴 루터 킹의 사무용 책상 뒷벽에 걸려 있는 자격증은 오직 그것이 나름대로 카르티에-브레송의 시선의 그 어떤 것, 또 그와 더불어 그 시선이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 그의 두 눈을 통해서 그 가시성이 드러나는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는 – 바와 같은 마틴 루터 킹의 시선의 그 어떤 것을 담고 있어야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두 눈은 그 뒤에 있는 자격증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까. 그 무슨 덧없는 추억 효과로서라면 모를까 그 일상적인 존재는 결코 그 시선을 끌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 자격증은 지금 우리를 바라보면서 우리들 쪽을 향해서 어떤 타이틀, 어떤 자격, 어떤 직업 혹은 권위, 소속을 우리에게 지시해 준다. 우리 눈앞에 있는 초상의 장본인의 생각들과는 아무리 봐도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부차적인 물건에 대한 호기심 혹은 무관심을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처럼 신호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어떤 의미작용이 소진되어 가는 가운데 신호를 하는 것에 대한 어떤 호기심 혹은 무관심, 시야 속으로의 포착 혹은 은폐, 시선의 존재 혹은 부재를 우리에게서 적발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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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이건 우리를 ‘본다(regarde)’.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눈이 그 대상을 대하는 것같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고들고 우리들 마음을 차지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쓰는 프랑스 말 “Ça me regarde!” 즉 “그것은 내 문제다” “그건 내 소관이다” “그건 내 책임에 속한다”라는 그 말의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를 어떤 한 의미나 방향으로, 무수한 의미들이나 방향들 중 하나로 우리들을 끌어들인다. 사진은 마틴 루터 킹의 모자, 북 나이프 혹은 수염 못지않게, 마릴린 앞에 있는 개의 목끈 못지않게 그 의미나 방향의 동시적인 광채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어떤 의미를 만든다. 그러나 감지할 수 있는 의미를, 만져 보아도 느낄 수 없는 미세한 터치처럼, 무슨 공기처럼 – 어떤 분위기와 태도처럼 – 어떤 방식, 의향, 아비투스(habitus), 에토스(ethos), 표현방식, 은총 혹은 배려처럼, 요컨대 어떤 시선, 어떤 선물처럼, 눈에 붙여 놓은 의미를 만든다. 시선이 그 대상들에 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물로 주는 것은 오직 그들, 즉 흔히들 ‘모델’ 혹은 ‘주제’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지칭하는 그 남자들, 그 여자들이 그것을 취했기 떄문에 가능했다. (선물이란 그것이 받아지고 취해질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 쪽으로 이끌었고 그들의 신비 속으로, 다시 말해서 그들의 말없이 빛나는 자명함 속으로 유인했다. 그 선물이 거기에 편안하게 맡겨지려면 이 자명함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는 그것이 언제 어떻게 맡겨지는지 알지도 못한다. 그는 그 정확한 시공간을 계산하고 깊이 생각하긴 하면서도 그 시공간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이것이 선물의 포인트이며 순간이다. 결코 그것 자체의 이유와 동기가 설명될 수 없는 자명함과 확신의 순간이다. 설명된 동기는 이미 타자의 속에, 즉 그것 자체로 환원된 이미지, 즉각적으로 그것에게로 환원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부재로부터 이끌어낸 이미지 속에 있으니까 말이다. 도처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이미지는 환한 빛으로서, 잘 보이는 얼굴로서, 그러나 또한 그것의 디테일들 속으로, 그것의 그림자들 속으로 물러나 숨는다. – 그러나 그 물러나 숨는 행위는 다름 아닌 선물의 비밀, 바로 그것이다.

내면의 침묵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찍은 시대의 초상 (열화당) 중
 ‘시선을 주었다’ (장-뤽 낭시 Jean-Luc Nancy) p20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