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 개관기념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개막작, ‘청춘의 십자로’를 봤다.
이 영화는 1934년 작품이다.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보유 중인 최고의 필름, 그래서 공식적인 한국 최고의 영화 필름이다.
발성영화로 이행하기 조금 전, 그러니까 한국 무성영화 시대의 끄트머리 쯤에 만들어진 이 작품이 이번에 변사, 악단, 가수와 함께 함으로써 온전히 부활한 느낌이다.
영화의 처음은 변사 조희봉이 무대 위 놓여 있던 카메라를 들고 객석과 자신을 번갈아 비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무대 위 변사와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연결된 실시간 영상의 스크린이 교차하더니 변사가 스크린 가장자리 막 속으로 들어가, 이제는 스크린 안에서 다소곳한 무성영화 풍 여배우와 짤막한 상황을 연출하더니 다시 무대로 튀어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이걸 공연 이틀 전에 떠올려 밤새 찍고 준비했다는데 김태용 감독은 아마 이 생각을 떠올린 순간 이미 만족감으로 흥분했을 것이다.
(물론 보는 나 또한 흥분되었다. 이제 들어가는구나 하는.)
과거로 진입하는 스타 게이트로 카메라와 스크린을 직접 이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 당시 무성영화 상영 때에는 가수나 만담꾼 등이 영화 시작 전, 상영 중 필름 릴 교체 시간, 영화 마지막 등에 나와 공연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당시 영화 상영의 관습 또한 재현해 냈기 때문이다.
영화가 카메라와 스크린에서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 김태용은 프루스트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영화 자체도 흥미로웠다.
물론 서울역 주변을 오가는 수많은 자동차, 바가 있는 술집, 다방, 엘리베이터, 심지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 가스 걸(가스 스테이션, 그러니까 주유소 종업원), 악덕 사채 자본가까지 당시 조선의 근대화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진전돼 있었고 심지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도 들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도 언급해야겠지만, 이보다 영화 자체가 보여주는 형식미가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을 길러 가는 영복을 트래킹으로 따라가는 장면 – 덜컹거리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화면은 잘 계산된 구도를 유지하며 움직인다. 이런 트래킹 숏이 이 영화에는 많이 쓰였다.
개철과 계순의 거울 대화 장면 – 단순히 둘의 대화를 숏-반응숏으로 쪼개지 않고 거울을 활용했다는 뻔한 참신함 말고도 이 장면은 흥미롭다. 거울이 형성하는 프레임은 개철의 음흉한 계략이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계순이 포위된 듯 놓여 있고, 개철이 이 앞에서 스크린을 등지고 얘기하다 이 공간으로 들어간다.
농락당한 영옥과 계순을 보고 분노의 화신이 된 영복의 정면 트래킹 숏 – 영복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뻔하지만) 셔츠 앞 가슴을 약간 드러내낸 채 바로 앞을 응시하며 낫을 들고 달려온다. 화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영복의 분노에 찬 얼굴을 적절한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미디엄 숏은 표현주의적이다.
그리고 영옥(김연실)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가 담배 피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눈빛과 담배 연기는 화면을 직시하는 듯 당당하고 시각을 뿌옇게 만들 정도로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김연실이 당시 스타 배우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 장면이 고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희봉의 변사 역할은 처음이라 그런지 화면과 몇 번의 공백을 보였지만 그의 톤은 과거스러웠고 몇 번의 현대적 멘트(예를 들어 “이거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거에요” 같은)는 관객을 여러 번 소리 내 웃게 만들었다. 호응이 좋아 몇 번 더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면 화면과의 어긋남은 줄어들 것이고 즉흥 멘트는 더 기발해질 것이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연극적인 몸짓과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이제 그만 쓰고 싶지만) 음악과 노래도 괜찮다. 뮤지컬스럽지만 당대 음악스럽게 잘 어울린다. 따로 들어도 나쁘지 않아 일회성으로 쓰기에는 조금 아깝다.

아무튼 여러 모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을 것 같다.
한국영화는 영화사적 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데(영상자료원에서 낸 몇 개의 한국영화사 책을 대충 읽은 느낌으로는 영화사적 과거라기보다 영화 사회학적 과거에 가까웠다) 이런 영화에 영화사적 이름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오늘 퇴근길에 어제 사진동호회에 올라온 한 글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글은 브레송이 현상, 인화 작업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진을 찍는 일에 더 전념하겠다고 한 말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때가 되면 반복되는 주제다.
요지는 현상, 인화작업을, 현대적으로 본다면 스캔, 포토샵 보정 작업을 포괄하는 이 보정작업을 예술적 범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진의 미학적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미술 또는 그래픽 아트를 구분짓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미술이나 그래픽 아트는 없는 형상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나 사진은 현실에 존재하는 형상을 바라보는 작업이다.
미술과 달리 사진은 ‘복제의 원본’과 복제 결과물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은 불가피한 원본의 왜곡에 대한 이유와 정당성을 묻는다.
왜곡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은 곧 사진가의 원본에 대한 태도를 뜻한다.
내가 보기에 이 태도가 사진이라는 미학의 핵심이다.
사진의 원본에 대한 왜곡이 극단으로 간다면 그것은 사진적 범주가 아니라 회화적 범주에 가까울 것이다.
이 지점 어딘가에 현상, 인화의 예술적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크로스 오버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사진은 곧 태도다.
이 태도는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발현되는가.
나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포토그램처럼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건너뛴 것이라 해도 이를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화지에 상을 박는 그 순간 사진가는 찍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과 현실에 대해 당신의 시선은 빛과 구도와 감정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게 사진인 거다.
그렇다면 현상과 인화는…
이 시선의 태도를 관철하기 위한 하나의 사후적, 수단적 방법이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 사이에서 헤매지 않고 딱 사진적 범주에 정주하고 볼 때는 말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는 현상, 스캔, 포토샵 스킬, 스캔 스킬, 좋은 렌즈, 좋은 바디…이 따위에서 사진의 미학적 원인을 찾지 말고 바로 당신이 사진을 찍는 행위 속에서 당신의 태도에 대해 더 고민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리 아마추어 사진 동호인들은 이런 기술 미학에 많이 혹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 이건 덫이다.
사진 재미없게 하는 덫.

사진 찍는 것은 작곡하는 것과 같을 것이고
인화하는 것은 연주하는 것과 같을 것인데…
뛰어난 작곡자나 연주자 모두 예술가로 인정해주죠.
브레송은 작곡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니 사진으로 작곡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고
삐에르 가스망은 연주에 소질이 있으니 브레송이 작곡한 사진을 암실에서 연주 하는 것이 효율적인 것입니다.

오늘(2008.05.10) 이 댓글을 보고 또 아래와 같이 댓글을 달아 버렸다.

저도 현상, 인화 전문가에 대해 예술적인 어떤 영역을 인정하자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인화에는 연주처럼 작품에 대한 해석이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결국 우리는 사진을 인화물(또는 후보정 완료된 스캔본)로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음악과 달리 한 사진에 대해 다양한 인화본이 존재하는 게 아니니 사진이라는 작품에 있어 현상, 인화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사진은 음악과 달리 위대한 원곡에 대한 다양한 편곡과 연주 방식에서 그 미적 가치를 논하는 분야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많은 위대한 사진가들만큼이나 많은 위대한 인화 작업가들의 이름을 (미학적인 수준에서) 기억해야겠지요.
영화도 감독 이외의 크고 작은 기여를 한 수많은 스탭들은 잊혀집니다.
이건 분명 불공평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이유는 사진이나 영화 작품이 사진가의, 영화감독의 태도라는 시원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를 보고 ‘촬영감독 실력 죽인다’라고 기억하기 보다는 ‘드 팔마 영화의 화면 구성은 정말 죽여’ 이런 식으로 기억하는 것처럼요.)
저는 영화든 사진이든 주어진 결과물로서의 작품 자체만 두고 봐야 한다고 믿는 편입니다.
(심지어 사진가나 감독의 의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작가라는 작자를 불러내야 한다면 그건 인화한 사람이 아니라 찍은 사람, 스탭들이 아니라 감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감상자, 비평자에게는 작품의 미적 가치에 가장 많은 책임을 져야 할 단 한 사람이 필요할 뿐이니까요.
(애가 잘못하면 선생보다 부모 탓하는 것처럼요)
어쨌든 사진이라는 예술 활동에 있어 현상, 인화의 기능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미적 가치는 사진가가 책임진다, 이게 제 생각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좀 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 분 댓글이 틀린 말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든 찍는 것이 뽑는 것보다 우위에 있다고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인다.
굳이 이럴 것까지야…

onedayontheroad

한국에는 10만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고 한다. 이는 환산하면 반경 1제곱 킬로미터 내에 1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도로 밀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란다. 그런데 한국도로공사는 2020년까지 도로를 20만 킬로미터로 늘리겠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야생동물 중 가장 작은 활동영역을 가진 너구리조차도 1제곱 킬로미터의 영역을 움직이며 산다. 적어도 도로 하나는 생활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한국의 야생동물들은 절대 안전한 제 집을 가질 수 없다.
지리산 인근 88고속도로와 산업도로 등지를 중심으로 로드킬 사례를 조사 연구하는 최태영, 최천권, 최동기 세 사람은 30개월동안 5천 7백여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지리산은 하나의 섬이다. 이 산 둘레를 도로가 완전히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리산의 야생동물들이 지리산 안에서만 고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생활 영역과 습성을 섬처럼 두른 도로가 강제할 수는 없다.
로드킬을 조사하는 이 세 사람은 각 동물들마다 로드킬을 주로 당하는 지역과 시간대 등에 어떤 패턴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매일 인근 도로를 돌아 다니며 로드킬 데이터를 쌓아 간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종들이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지도상에 로드킬 지점을 표시하는 점들은 빼곡하게 표시되어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는 동물들에게 전방위적 재앙이다.
세 연구원은 어느 날 88고속도로에서 조금 전 차에 치인 삵 한 마리를 발견한다. 의식은 없지만 다행히 호흡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삵을 데리고 와 정성스레 치료한다. 이 삵에게 연구원들은 ‘팔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몇 달 후 팔팔이는 예의 건강을 되찾고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다. 팔팔이에게 부착한 무선 신호 장치로 팔팔이의 생활을 추적하던 세 사람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팔팔이는 약 일주일간 고산 지대를 넘어 약 30킬로의 여정 끝에 88고속도로 인근으로 가 버린 것이다. 채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삵이, 그것도 사고 당시 기억할 수도 없었을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팔팔이는 그 여정 중 12개의 도로를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다. 본능에 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팔팔이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 치어 발견된 그 지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미가 차에 치여 쓰러지자 이 곳을 떠나지 못하던 새끼들이 어미 주변에서 똑같이 차에 치여 먼지처럼 사라지는 곳. 금슬 좋은 너구리에게 의도하지 않은 이별을 강요하는 곳. 이 곳이 바로 인간이 만든 자동차 도로다.
약 3년 전.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저 편 연신내 로타리 가운데에 거무스름한 작은 무언가가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비닐 봉지려니 생각했다. 계속 시선이 그 쪽으로 가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마리 개였다. 도로를 횡단하던 중 차에 치인 것이 분명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반쯤은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있고 반쯤은 일어나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차로 한 가운데에서였다. 자동차들이 사방에서 지나갈 때마다 나는 머리 뒤가 찌릿함을 느꼈다. 처참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하게 걸레처럼 붙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 개의 무력해 보이는 몸부림이 교차로를 오고가는 자동차들을 멈추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야생동물은 너무나도 무고하지만 그들의 먼지 같은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처럼 절규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죽음은 떳떳하고 무고했다. 인간은 이러한 타자의 비극을 모른 채 하고 문명을 키우고 있으니, 문명은 그 자체가 인간의 원죄이고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 소음은 그 물질적 현현이다. 나는 우리의 원죄를 한 시간 반 동안 똑똑히 지켜봐야 했고 그 앞에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비극은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중간 중간 도로 위의 동물 시체 위로 도로 개발 소식과 이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전망하는 뉴스 멘트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개발이 곧 복음인 곳이다. 이제는 인간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정복이 불러온 응징의 상징과도 같은 광우병 소도 제 손으로 들여 오고 있고 온난화의 위협은 갈수록 음험해지고 있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 희생되는 인간들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이 땅에 한낱 야생동물들의 쉴새 없는 떼죽음을 심각하게 자책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생각보다 길거리에 내던져진 동물들의 시체가 알리고 있는 것은 동물 애호가의 측은지심 이상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개발 문명의 살해현장, 공모하고 묵인하고 있는 것의 증거 제시로서 이들의 시체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생동물들의 죽음으로부터 가난한 인간의 고난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퍼다 쓰면서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크기에서 동물들의 죽음이 차지하는 양은, 남한에서만 전국 도로에서 1년에 3만여 마리 그 이상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보기 싫어도 보이고 하기 싫어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도로 한 가운데 바짝 엎드려 야생동물들의 소리 없는 죽음을 지켜보는 시선은 오히려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