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전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안타까워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액션 신.
각종 사극이나 액션을 가미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건 도무지 어떤 앵글로 어떤 장면을 찍어서 어떻게 편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소리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감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가 액션신에서 힘을 쭉 빼 버리고는 했다.
관심이 없어 줄거리는 잘 모르지만 태왕사신기에서 수지니인가가 주작으로 변해 불바다로 만들고 배용준(환웅인지 담덕인지 모르겠다만)이 이를 다스리는 상황이었던 장면에서 나는 그래픽 뒤로 상황의 긴장감은 완전히 숨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태조 왕건에서도 온갖 전투신은 퍼부은 물량과 수많은 엑스트라 동원으로도 전혀 전투의 규모감과 치열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도 나는 잘 진행되던 드라마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는 장면만 가면 보는 이의 힘을 쏙 빼 놓는 걸 느꼈다.
연주 음향과 배우들의 손발, 악기, 심지어 편집마저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는 어제 잠시 본 ‘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인가 하는 여자 주인공이 어느 의료사고 사망자 영정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장면, 이서진이 비열한 의사를 살해하는 장면, 이후 모종의 차량과 잠시 동안 벌어진 추격 장면에서 나는 오그라 든 손발을 펼 틈을 찾지 못했다.
상황의 긴장과 공포를 이끌어내는 것에 대한 고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성의 없는 연출과 편집.
한국 드라마의 한계는 신파조의 멜로 감성에 있는 게 아니다.
멜로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다른 장르가 시도되면 여지없이 드러나는 연출력의 한계야말로 문제다.
쫓기는 일정에 공장처럼 찍어내야 하는 촬영 여건 때문이다 변명을 하기에는 궁색할 정도로 상황 연출과 편집, 촬영이 엉망이다.
사회 통념과 편견, 평균 이하 수준의 이야기 감각 또는 단순히 순간적인 이미지나 배우 얼굴 따위에 의존하는 한심한 태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좀더 납득할 수 있는 감정선, 납득할 수 있는 상황, 최소한의 고민을 던져 주는 이야기 정도를 기대할 수 있게는 해야 하지 않는가.
드라마가 영화를 선도하거나 자양분이 되는 많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한국 드라마는 영화에서 창출되는 재능과 힘을 모조리 빼 먹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륜 드라마, 막장 드라마, 트렌디 드라마, 블록 버스터 드라마 등등 이야기와 연출, 편집에 대해 별 고민 없는 드라마가 판을 치는 척박한 한국에서 일드, 미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 드라마에 드라마의 기본기를 촉구한다!

“이 감독 아주 재주 있네”, “영화를 아주 자유자재로 만드는구나”, “그 영화의 카메라는 최고였어”와 같이 기술적 범주에서 영화를 평가하는 수많은 표현들이 있다.

“그 영화는 아주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 감독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는 존경스러워”와 같이 세계관의 범주에서 평가하는 표현들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영화를 평가하는 데는 기술과 세계관이라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
성의없이 설정한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두 범주는 동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억지로 밀어붙여, 예술이 고유함을 원천으로 한다고 할 때 이를 재능의 고유함과 태도의 고유함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영화적으로 잘 직조해 내는 또는 새로운 영화적 개념을 만들어 내는 재능의 고유함과 인간과 사물, 세상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태도의 고유함.
재능의 고유함이 천재의 영역이라면 태도의 고유함은 현자의 영역일 것이고, 나는 가급적 천재의 결과물을 즐기되 천재를 숭배하거나 자신이 천재적이지 않은 것을 자책하기보다 자신이 충분히 현명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재능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세계 또는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서 태도의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니까 섣불리 말한다면 누구나 고유한 세계를 구성하고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성찰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예술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혜택이 아닐까.

요즘 이별하는 일이 참 많다.
한국은 또 한 번 민주화를 견인한, 동시에 결과물인 한 인물과 이별했다.
역으로 반동적이고 폭압적인 정치적 인물들은 질기고도 떳떳하게 살아남았다.
여기서 얻어야 할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내 이십대 첫 대통령 선거 표를 던졌던 김대중은 노무현처럼 애증이 섞여 있고, 객관적으로는 달리 평해야겠지만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라는 장에 어쨌든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이제 김대중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1세기와 함께 시작한 한국 민주화 세력의 어떤 행보가 다시 외면받게 된 과정과 떼 놓고 볼 수 없다.
반동의 시대에, 명박이는 또 한 번 추모의 물결을 반정부 불법 세력으로 간주하려 하고 있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35091
캄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