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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한 극장이 떠난다.
네오이마주 편집장의 글에서처럼 나 역시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말없이 나와 담배 한 모금을 피고 해머 맨을 지나고 나서야 같이 본 친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그만큼 씨네큐브는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특별한 공간이었다.
어떤 과시할 만한 고상한 문화 따위가 아니라 영화 앞에서 침묵과 비움에 가까운 경험을 이 곳에서 즐겼다.
내 20대의 극장에 대한 기억은 씨네큐브를 통해 형상화됐다.
내게 어떤 극장에서의 영화적 경험을 말하라면 씨네큐브를 떠올릴 것이다.
이화여대 거대한 인공 협곡에 자리한 아트하우스 모모는 내게 씨네큐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안타깝고 미안하다.
안녕, 씨네큐브.

몇 년 전 EBS 시네마 천국이 매주 한 주제를 정하고 그와 관련된 영화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나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그 주 주제를 보고 그 어구에 그만 반해 버렸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니.
이 얼마나 반골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나는 언제나 게으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상은 나를 부지런히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다그치기만 한다.
생존을 위한 부지런함에 이 순간이 괴로울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미 누군가의 책 제목이었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살구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과 살구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된 이후로 살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다며 ‘무용한 지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버트란드 러셀은, 수다스럽게 지식을 실용성과 효율성으로 강제하는 세상과 비합리성, 광신도적 맹신으로 치닫는 반작용을 비판하고 모두가 노동의 고단함을 줄이고 게으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그 텅 빈 속에서 피어나는 무용한 지식에의 열정을 찬미한다.
게으를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 내부에서 시작하는 이해와 표현과 존중의 욕구다.
나를 성숙하고 안정된 존재로 형성하는 데 게으름의 빈 틈은 필수적이어서 우리는 여가 속에서 사색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노동의 피로 또는 실직의 피폐함 속에서 자신과 세상의 진실을 피하고, 많은 창의적인 사고와 인류애가 생산과 효율성의 논리로 인해 묻히고 만다.
서로가 적당한 수준의 노동 시간을 나누고 그만큼의 여가를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지금(1930년대) 인류의 과제다…
버트란드 러셀은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여가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사회 변화를 고민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지났는데 지금 여기에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진심으로 모두가 덜 일하고 더 많이 여가를 즐김으로써 사색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게으르게 (어떤 결과물을 기대 받아 그것이 노동이 되어 버리지 않는 한에서) 어떤 가치와 미적 개념에 골몰하고 심연에 뿌리를 두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삶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