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그려지는 문명의 종말이 무엇에 연유한 것인지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쓰러지는 나무와 우르릉 하는 굉음 소리, 그치지 않는 비와 극심한 추위, 그리고 길에서 만나는 90세 노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지진과 기후 변화로 요약되는 자연 재앙일 것 같기는 하다.
폐허를 감싸는 중저음의 땅울림과 귀를 찢을 듯한 나무 넘어지는 소리는 이 영화의 주된 감각이다.
나는 이게 인상 깊었다.
소설을(나는 당연히 읽지 않았다) 영화화해야 하는 최소한의 이유는 바로 이 소리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영화는 문명이 무너지는 상황에도 간절하게 유지되는 아버지의 자리를 말한다.
말 그대로 문명은 몰락했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인간들은 심지어 식인을 일삼는 상황에 빠졌으며 절망한 인간들은 자살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아버지는 동족의 위협과 추위로부터 아들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하고 그 책임감만으로 멈추지 않는 노마디즘을 버틴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의 책임감에 동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걸까.
아니면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동정하게 된 걸까.
아버지의 돌봄 행위에 나는 어느 정도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돌봄은 타인에 대한 적대로 연결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적대와 배타를 순화시키는 것은 아들의 몫이다.
지치고 눈 먼 노인과 생필품을 훔친 흑인을 먹이고 동정하는 아들은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배척하고 투쟁하는 아버지에게 윤리의 보루다.
(식인을 금기시하는 아버지의 원칙은 갱단인 그들과 가족인 우리를 구분하는 기준점일 뿐이다. 식인 갱단 또한 커뮤니티는 형성하고 있으니까.)
애초에 아버지는 집을 떠나지 않으려 했지만 “추운 이 곳은 아이를 키울 만한 곳이 아니야. 남쪽으로 떠나”라는, 자살하듯 떠나는 아내의 마지막 말 한 마디를 붙들고 정처없이 길을 나섰다.
(세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아이를 낳지 말자 하고, 떠나는 마지막에도 따뜻한 곳으로 아이를 데려 가라 하는 어머니가 자손번식이 인륜지대사라 여기고 어디든 그저 정처하고 보호하려는 아버지보다 더 현실적이다.)
따뜻한 남쪽이라는 아버지의 근거 없는 희망은 그래서 아내에 대한 자신의 (아들을 잘 키울 수 있다는) 마지막 증명이자 어머니의 따뜻함으로…라는 유일하게 남은 환상이다.
죽음의 임박과 책임감의 피로를 느끼기에 충분한 기침 소리, 비고 모르텐슨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누구나 보호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낄 법하게 연기한 코디 스미스-맥피도 좋았다.
죽은 아버지 옆에서 멍하니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죽은 어미 고양이 옆에서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새끼가 연상돼 순간 그렁그렁했다.
나는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종말의 순간에도 숭고하게 남아 있는 부성애를 찬미하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아버지의 역할과 피로, 그리고 강박과 그 자리의 한계를 함께 고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아들의 뒤를 따라온 또다른 가족 무리의 어머니가 건네는 “너희를 따라왔단다. 네가 걱정됐어”라는 말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P.S. 1 – 내가 좋아하는 평론가 황진미는 20자평으로 이렇게 썼다. “선악은 인육먹기로 구분되고, 가족구성 여부로 판별된다?” 이 또한 의미심장하다.
P.S. 2 – 코디 스미스-맥피는 영화 ‘렛 미 인’의 헐리웃 리메이크작에 출연한단다. 렛 미 인이 또 번안되는구나. 이 로맨틱한 영화를 제발 망치지 말아줘…

내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엠비씨 라디오에서 새벽 두 시 영화음악을 듣고 그 여운에 세 시를 넘기면 어김없이 김성호의 ‘회상’이 흘러 나왔다.

그 노래가 슬펐고 새벽의 감성에 취했었다.
어떤 청취자의 사연 있는 노래였는지 디제이가 특별히 아끼는 곡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같은 시간(아마 새벽 세 시 삼십분 경이었던 것 같다)에 꼭 틀어주는 그 곡은 새벽에 애틋함을 반복 경험케 했다.
김성호의 ‘회상’은 그래서 지금 나에게 십 년 전 감정의 기억을 소환하는 마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 새벽 세 시 엠비씨 에프엠 ‘뮤직스트리트 전종환입니다’의 첫 곡은 윤건의 ‘갈색머리’다.
들을 때마다 이 노래 구매해야겠다 하면서 놓쳤던 노래.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노래를 새벽 세 시 라디오의 첫 곡으로 반복해서 들으면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 트위팅을 찾아보니 지금 내 기시감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확신하게 됐다.
그 때도 오늘처럼 이 프로그램의 첫 곡으로 갈색머리가 나왔고 나는 노래를 찾아 다운받고 정리한 후 트위터에 포스팅을 한 거다.
이제 나는 훗날 윤건의 ‘갈색머리’를 들을 때면 내 삼십대 초반의 불안과 외로움과 어떤 감정적 상태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 지금 내리고 있는 눈과 겨울의 추위도…
그러고 보면 디제이라는 직업은 이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적 기억에 노래를 머물게 하는 마법사 같은 면이 있다.

트위터 프로그램을 한 번 써 보자 하면서 구글링해 봤더니 트위티가 맥용 프로그램도 있더라.

아이폰 어플 Tweetie2를 아주 잘 쓰고 있었는데 맥용 프로그램도 있다니…

복잡한 구성의 Tweetdeck에 비해 단순하면서 예쁘다.

트위터 프로그램 중에서는 이만큼 예쁜 인터페이스를 가진 건 없는 듯.

트위티로 낙점.

새로고치는 주기 등 세부 설정이 없고 가로 너비 조정이 제한적이라 좁은 막대형 창으로만 써야 한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That’s OK.

http://www.atebits.com/tweetie-m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