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이 프레시안에 정식 기사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강금실의 포스팅deupul님의 포스팅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영어 원문 링크: http://www.imposemagazine.com/bytes/slavoj-zizek-at-occupy-wall-street-transcript

프레시안 기사 링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018111141&section=05

http://m.pressian.com/article.asp?article_num=40111018111141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WS) 시위의 진원지인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했던 연설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젝은 지난 9일 1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이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은 이번 시위의 상징이 된 ‘인간 마이크’를 통해 전달됐다. (☞동영상 기사 보기)

다음은 미 방송이 제공한 지젝의 연설문 전문(☞원문 보기)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중의 발언 내용을 종합해 재정리한 것이다.

▲ 연설 중인 슬라보예 지젝 ⓒ미국 언론 인터넷판 화면캡쳐 (www.imposemagazine.com)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카니발은 싸구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말라. 이 시간들의 진정한 가치를 시험하는 것은 앞으로 닥칠 날들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일상 생활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 우리는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우리의 기본 메시지는 이것이다. “금기는 깨졌다. 지금 우리는 가능한 가장 좋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대안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은 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진짜 어려운 질문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떤 사회 조직이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가? 지난 세기의 대안들은 분명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월스트리트의] 사람들과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지 말자.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체제)이다. 해답은 ‘월스트리트가 아닌 메인스트리트’가 아니다.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 없이 기능할 수 없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적에 대해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항의를 희석시키는 거짓 동료의 잘못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알콜 없는 맥주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처럼 그들은 우리를 무해한 도덕적 항의자들로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겨우 콜라 캔을 재활용하거나, 몇십 달러를 자선 기금으로 내거나, ‘스타벅스’ 카푸치노를 사면서 수익의 1%가 제3세계의 어려운 이들에게 간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세계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3세계에]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한 이후, 결혼정보회사가 우리가 데이트하는 것까지 아웃소싱하기 시작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의 정치참여마저 아웃소싱되는 것을 지켜봤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오길 원한다.

그들[1%]은 우리가 ‘비미국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당신들에게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때, 기독교성(Christianity)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 성령이다. 성령이란 사랑으로 결합된 믿는 이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가 기독교성이다. 여기 있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 월스트리트의 저들이야말로 거짓 우상을 좇는 이교도다.

그들은 우리가 폭력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점령’ 같은 우리의 말이 폭력적이라고. 그렇다. 우리는 폭력적이다. 하지만 단지 마하트마 간디가 폭력적이라고 할 때와 같은 맥락에서만 폭력적이다. 우리는 기존의 방식을 멈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순수한 상징적인 폭력을 매끄러운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폭력에 비길 수 있을까?

우리는 ‘루저’라고 불렸다. 하지만 진정한 루저들은 월스트리트에 있지 않은가? 그들이 우리들의 돈(세금) 수천 억 달러를 날리지 않았는가? 우리는 사회주의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미국에는 이미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이 사유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의 투기적 행태가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결과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 이룩한 사유재산을 날려 버렸다. 우리가 여기서 몇 주 동안 밤낮으로 사유재산을 파괴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이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수천 채의 집들이 빚에 넘어간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만약 공산주의가 1990년 무너진 그 체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자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럽이나 미국의 자본주의보다 더 역동적인 중국 자본주의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성공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이혼에 이르렀다는 불길한 징조다.

여러분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있다는 협박에 굴하지 말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맥락이 있다면 우리는 ‘공유'(the commons)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공유, 사유화된 지식의 공유, 생명공학의 공유 말이다. 이들은 현 체제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꿈을 꾼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꿈을 꾸는 것은 지금의 방식이 몇 가지 장식만 바꿔 달면 무한히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꿈에서 깨어났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체제가 천천히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고전적인 만화의 한 장면에 대해 알고 있다. 절벽에 다다른 고양이는 발밑이 허공이라는 것을 모른 채 계속 걸어가다가, 아래의 심연을 내려다본 순간 비로소 추락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은 월스트리트의 권력자들에게 ‘이봐, 아래를 봐’라고 일깨워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정말 변화는 가능한가? 오늘날 언론을 보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분포가 이상한 방식으로 돼있다. 개인적 자유의 영역과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점점 가능하게 돼간다. (아니면 그렇다는 말을 들은 것이거나)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is impossible)라는 말처럼, 우리는 온갖 기괴한 섹스를 즐길 수 있고, 모든 음악, 영화, TV 시리즈도 인터넷에서 내려받을 수 있으며, (돈만 있다면) 우주여행도 누구에게든 가능해졌다.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유전자 치료를 통해 강화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을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변형시켜 영생이라는 테크노-그노시스적인 꿈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는 ‘할 수 없다’의 폭격을 맞을 것이다. 전체주의적 테러를 불러올 것이라는 이유로 집단적 정치행동에 참여할 수 없고, 당신을 비경쟁적으로 만들고 경제위기를 불러온다는 이유로 과거의 복지국가 모델을 고수할 수도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그리고…. 긴축정책이 취해지면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얘기만 반복적으로 들었다.

만일 부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약간만 올리자고 한다면 그들은 경쟁력을 잃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것이냐며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곧 영생도 가능해진다는데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한 약간의 지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한다.

어쩌면 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조합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오면] 어쩌면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더 많은 연대와 건강보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국은 시간여행과 대안적 역사를 TV나 영화, 소설의 소재로 삼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중국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대안을 꿈꾼다는 면에서 좋은 징조다. 중국 정부는 그런 이야기가 진지한 역사적 사건을 경박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안적 현실로의 가상 속에서의 탈출조차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서방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는 필요치 않다. ‘이데올로기’는 최소한의 진지함마저 갖춘 대안적 역사 이야기를 막을 충분한 물질적 힘이 있다. 지배 체제는 우리의 상상력마저 막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은 쉽게 떠올린다. 종말론적 영화는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끝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구 동독에서 유래된 오래된 농담이 있다. 동독 노동자 한 명이 시베리아에 일하러 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당하기 때문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호를 정하자. 만약 나에게서 편지를 받았을 때 보통 쓰는 파란 잉크로 글씨가 쓰여 있다면 사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는 부분은 거짓말인 것으로 하자.”

한 달 후 그의 친구는 파란 잉크로 쓰인 첫 번째 편지를 받았다. “여긴 모든 것이 완벽해. 가게는 물건으로 가득차 있고 식품은 풍족하고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잘 돼. 극장은 서방에서 온 영화를 틀어주고 예쁜 여자들이 줄을 서 있어. 근데 딱 하나 없는 건 빨간 잉크야.”

이게 지금까지의 우리의 상황 아닌가? 우리는 원하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딱 하나 빠진 게 빨간 잉크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부자유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빨간 잉크의 부족이 오늘날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분쟁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 모든 용어들, 예를 들어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은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신 우리의 인식을 미혹시키는 틀린 용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있는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당신들이 우리 모두에게 빨간 잉크를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여러분이 1년에 한 번씩 만나 맥주나 마시면서 오늘을 떠올리며 ‘아, 그때 우린 젊었고 참 멋졌지’하고 생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 사람들은 진정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곽재훈 기자(번역)

나 부산영화제 갔다 온 것을 알아 챈 회사에서 사보 좀 쓰라 해서 아주 귀찮아 하며 끄적였다. 써 놓고 보니 영화 관련 간단 소개 글 정도는 될 것 같아서 블로그에도 옮겨 놓는다. 별 내용은 없다.

10월 6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매번 각국의 영화 스타와 거장들이 찾아 화제가 되는 부산영화제에 대해 내 관심은 오로지 어떤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예매 경쟁이 치열해 원치 않은 영화를 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가열찬 예매 경쟁을 뚫고 힘겹게 본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짧은 소감을 적는 것으로 나의 부산영화제 참관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질서와 도덕 포스터

1. 마티유 카소비츠 감독의 <질서와 도덕>: 1980년대 프랑스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식민지 뉴칼레도니아의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진압을 그린 영화다. 특공대 소속 주인공은 독립 운동 단체와 평화적인 협상을 시도하지만 선거 기간에 돌입한 프랑스 정부는 정치적 성과를 목적으로 이 단체를 유혈 진압한다. 프랑스에는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이 있지만 제국주의적 국가 시스템은 시민의 의식과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한다.

자전거 타는 소년 포스터

2.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타는 소년>: 아빠가 양육을 포기하자 상처 입고 방황하는 시릴이라는 소년이 주말 보모 사만다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시릴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대신 사만다의 사랑을 받으며, 자전거를 잃었다 되찾으며, 방황 속에서 사람을 때리고 앙갚음을 당한다. 이렇게 영화는 한 소년의 어떤 시기를 다루면서 소년의 상처와 잘못에 대해 공평하게 되돌려 받는 시점에서 무심하게 끝난다. 정의로운 결말에도불구하고 나는 슬프고 소년 시릴은 여전히 아플 테다. 상처에 대한 공평한 보상은 그것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직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코누르 포스터

3. 바이트 헬머 감독의 <바이코누르>: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 이 근처 초원에는 우주선 발사 후 하늘에서 떨어지는 추진체 같은 잔해를 주워 고철 판매상에게 팔면서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가가린이라는 청년은 우주비행사 줄리를 흠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줄리가 지구 귀환 중 불시착으로 기억을 잃고, 가가린은 줄리가 자신의 아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이후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전반적인 내용 구조는 선녀와 나무꾼의 다른 판본에 가까운데 결국은 우주와 첨단 기술을 흠모하던 가가린이 별빛과 초원의 마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초원과 별빛이 간직한 상상력의 세계를 현대 문명이 훼손하는 것에 대한 귀여운 풍자가 담겨 있다.

멜랑콜리아 포스터

4.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나는 사실 이 영화를 고대하며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우울과 비관과 절망으로 가득 찬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선체험하는 것이니 결코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위기 앞에서 지구를 구해 내는 그 흔한 헐리웃 영웅들이 은폐하고 있는 파국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다. 하늘에는 파란 색 행성이 달처럼 떠 있고, 이 달은 점점 가까이 커다랗게 하늘을 채운다. 결혼식을 망친 한 여자와 그의 언니 가족은 불안 속에서 멜랑콜리아 행성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우를 준비한다. 우울한 정서를 물질화한 거대하고 파란 별 멜랑콜리아는 공포보다 무력감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지 않는 마지막을 예정해 놓고 곧장 달려 한 치의 희망도 없이 끝내 버린 이 영화는 한 동안 나를 앓게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