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우간다 구호재단인 UWESO로부터 한 장의 팩스가 날라온다. 한동안의 시민전쟁으로 남편과 젊은 남성 부양자들을 잃고 적게는 대여섯명에서 많게는 스물 남짓의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여성들, 에이즈에 감염돼 열명 넘짓의 가족이 모두 죽는 등의 자국 현실을 영화로 찍어 세계에 알려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이에 키아로스타미는 비행기를 타고 우간다로 가 2000년 4월부터 1년동안 머물면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다.
이 영화는 지금의 우간다를 이루는 두 면들을 보여준다. 근대화의 여파와 전통문화의 잔재, 카톨릭 신앙과 세속적 인간, 영어와 토속어, 비참과 행복 등으로 구성되는 우간다의 두 얼굴이 균형있게 다루어지면서 그들의 존재성을 일갈한다. 키아로스타미는 단지 구호 차원의 동정심 유발만을 기대했을지도 모를 구호재단의 의도보다 한발 더 나아가 현대인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고뇌라는 보편성까지 성취해낸 것 같다.
어느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에는 우간다의 그늘만이 아니라 이방인과 문명의 이기를 마냥 신기해하고 그 앞에서 즐거워하는 어린이들의 웃음과 순박함까지 담겨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우간다의 그들은 극빈과 질병 속에서 저주에 휩싸인 존재들, 그래서 우리가 보살피고 구조해야 할 연약한 존재라는 식의 일방적 우월감을 일찌감치 배제해 내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아로스타미는 어린 아이들의 –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 매우 중대한 고민과 사건들을 너무도 충실하게 담아내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진실된 의미에서의 이방인이자 관조자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이는 그가 존재를 어떤 값싼 몰입 없이 자신의 체험 속에 참여시켜 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 점에서 우간다의 그들에게 절망과 파멸의 무거운 짐만 채색해 버리는 우를 1년동안이나 경계하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나에게 첫 번째로 각인되는 중요한 몇몇 장면들은 키아로스타미가 방문한 에이즈 환자 센터와 한 촌락에서 벌어지는 집단 가무들이다. 치유 불가능한 현대 최악의 병을 간직한 어린 남녀 학생들, 한 방에서 수십 명의 자녀들과 생활해야 하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쉽게 감내하기 힘든 고통들은 그들의 흥겨울 수밖에 없는 – 집단적 가무는 어떠하든 흥을 돋운다 – 노래와 율동들 뒤에 말없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암묵적인 비극을 감지하면서도 이 낯선 이방인을 환영하는 듯한 그들의 행위들과 그들 속에 파묻혀 같이 손뼉을 치는 감독의 몸짓 속에서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밖에 없다. 침울한 표정으로 이 이방인을 경계해야 할 터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쉬운데 그들은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행복하다 하며 웃음을 지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은 구조해야 할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웃지 못할 아이러니가 있다. 그들에게 번진 에이즈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이 서구 제국주의의 첫 번째 얼굴이었던 가톨릭의 교리 때문이다. 콘돔을 쓰는 것은 자연과 신의 섭리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민속 음악으로 유대하고 고통을 승화하며 이방인을 반기는 것과 이렇게 대비된다. 이것 뿐만 아니다. 시민전쟁 또한 자세히는 모르나 서구 국가들의 이해 관계 안에서 조장된 비극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게 얼룩진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든 보듬으려 애쓴다.
영화 도중 키아로스타미는 화면을 약 5분 남짓 꺼 버린다. 우리에게 암흑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만하냐고, 영화 볼 만하냐고 짐짓 묻는다. 그러고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강한 적응력, 전기 없이도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한참 동안의 암흑으로 가득찬 스크린은 어느새 번개의 번쩍임으로 뒤바뀌면서 시각을 자극하여 그 진공상태와 채워짐 안에서 근대화가 야기한 인간의 물질화 – 물질의 제약을 극복하려던 인간이 외려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된 상황 – 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현대적 문제성의 근원을 우간다의 참상과 포개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우간다의 두 얼굴들 속에서 자연히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힘을 획득한다.
다큐멘터리가 극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인 것 같다. 오히려 다큐멘터리는 자신의 형식이 지니는 사실성에 의해 강화된 극적 페이소스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위의 장면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해 낼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호주의 부부가 입양해 가는 한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빛과 1년간의 촬영을 마치고 이란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눈에 비치는 구름 속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더 강력한 페이소스를 이끌어낸다. 엔딩으로 장식되는 구름과 아이들의 오버랩은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장면이기도 한데, 아이들의 얼굴은 구름만큼 선명해지지는 않고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현재 바라보고 있는 시각의 강렬함을 뒤흔들 정도로 선명한 정신의 잔상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표현한다면 딱 그 장면만큼일 것 같다. 그리고 1년간의 체험과 기억이 강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우간다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이란의 한 감독이 그들과 함께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존재론적인 연결의 끈을 몸으로 각인함을 뜻한다. 정신과 몸이 중첩되는 이미지는 그렇게 달성되는 것이며 존재들의 상호 연쇄, ‘아멜리에’가 말하고 ‘레드’가 말하기도 한 숭고한 성찰이 키아로스타미로부터 나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