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엇과 이효인은 당연히 좋아한다. 하지만 케케묵은 글을 우연히 보고 퍼다 나르는 것은 순전히 한 줄 남짓의 두 문장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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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매순간을 사랑하자

<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그 자존심의 세세한 내용물들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유쾌하게 보여준다. 아마 그것은 ‘재능 있는 신념’에서 나왔을 것이다. 실의와 좌절에 오랫동안 빠져 있다 보면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거나 개나 고양이를 부러워 하게 된다. 사는 게 치사하고 사랑조차 역겨울 때 인간은 예술을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그런 것 속에서 튀어 올라오는 것이고, 그 예술을 통해 인간은 실의와 좌절, 불안과 역겨움을 극복하게 된다. <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런 불안정한 상태에 관한 영화이자 그 상태를 극복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30대 중반을 넘긴 듯한 옆좌석 남자는 훌쩍거리다가 가끔은 환호했다. 사실은 내가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반강제로 권투 도장에 다니는 빌리는 오히려 발레 수업에 더 관심이 있다. 탄광노조 위원장인 형과 아버지는 매일 시위를 하러나가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가난의 상징처럼 남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무용교사 윌킨슨 여사의 특별 지도로 빌리의 춤은 점점 재능을 드러내지만 형과 아버지의 반대는 완고함 그 자체였다. 빌리에게 남은 것은 일찌감치 죽은 어머니의 편지, 여자를 꿈꾸는 남자친구, 윌킨슨과 그녀의 딸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소중하지만 세상을 향해 재능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사소한 것들이었고, 아버지와 형을 둘러싼 가난과 파업 상황은 너무 큰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빌리는 해낸다. 왕립 발레학교의 입학 오디션에서 빌리는 터져나오는 격정을 춤으로 드러내고, “춤출 때는 자신이 사라지고 새가 된 기분”이라고 대답한다. 마을이 죽음과 같은 침울로 뒤덮인 날, 빌리는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노동자들의 삶은 패배자의 것이었지만 재능은 노동자에게도 ‘균등하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본가의 앞잡이 대처가 노동자들과의 전면 전쟁을 선포했을 때 가장 강력하게 앞장서 싸운 노동자들은 탄광 노동자들이었다. 싸움은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났지만,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켄 로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패배했지만 자존심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언제나 말했다. 반면 <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븐 달드리는 그 자존심의 세세한 내용물들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유쾌하게보여준다. 아마 그것은 ‘재능 있는 신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시위와 가족 상황과 빌리라는 세 개의 축을 균형 있게 뽑아내고, 현명하게 동기들을 엮어낸 시나리오 덕분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유머를 배합하고 문제를 조작된 어설픈 화해로 해결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노동자적 낙관성과 연출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빌리를 런던으로 보낸 날, 형과 아버지는 다시 광 속으로 들어가는 창살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곳은 실의와 좌절 그리고 침울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은 자본이 얼마나 ‘노동계급의 재능’을 무시하거나 말살해 왔는가를 드러내는 파리한 수채화다. 하지만 그것은 파리한 수채화에만 머물지않고, 실의와 좌절을 온몸으로 뚫고 가야 한다는 명제이자 의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BBC가 평한 “이 영화의 매순간을 사랑하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2001.02.14 / 이효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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