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 이 영화는 정말 우정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런 질문을 먼저 하는 이유는 <퍼스트 카우>가 다루는 피고위츠와 킹 루의 우정이 기대한 것만큼 깊고 자세하지는 않아서인 것 같다. 차라리 영화는 이 둘의 이야기를 빌어 미국 초기의 시대상을 살펴 보려 하는 것 같다. 변방을 지키는 군대가 오가고,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백인 이주민과 원주민이 섞여 살며, 수렵과 채집이 흔해 보이고, 허름한 움막 같은 것이 듬성듬성 자리잡은 시장이 가장 번화한 곳이라 해도 될 정도로 척박하게 묘사되는 미국 서부 오리건주 틸리컴이라는 마을은 현대 미국의 정치경제적 삶이 시작된 지점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이끌어 낸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는 꾸준히 미국의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
미국은 킹 루의 말대로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회의 땅이다. 체제가 공고해지기 전에, 누구든 그 기회를 잡아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 희망, 또는 욕망에 이끌린 자들이 미국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기회에 대한 믿음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미국을 번성하게 하는 원동력일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성공은 극소수의 몫일 뿐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팩터 대장과 빵장수나 비버 사냥꾼 또는 금광을 찾아 헤매는 서부 개척자 사이에 성공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비교 불가능하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를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고찰로까지 밀고 가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는 이런 생각을 촉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있다. 화폐와 암소. 피고위츠와 킹 루가 맛있는 빵으로 거둘 수 있는 교환 가치가 당시 암소 자체의 교환 가치를 초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피고위츠의 빵이 팩터 대장의 암소로부터 훔친 우유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더욱. “우유 한 컵이면 빵이 열 두 개, 그럼 최소한 은화 60개는 벌어”라며 성공을 꿈꾸는 킹 루의 구상이 팩터 대장이 쥐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해서 안타까워진다. 게다가 이 같은 킹 루의 사업 아이디어가 팩터 대장이 데려 온 암소 한 마리를 보고 떠오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허용치를 넘어 선 모방 욕망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양적 징벌을 다룬 우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두 남자가 사업 성공의 꿈을 좇는 과정을 차분하게 대한다. 그 꿈이 위법한 경계에 걸쳐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예정한 것처럼. 그리고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관계의 표면 이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영화를 보고 나면 그래도 피고위츠와 킹 루는 이 세상에서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남자의 개별적 우정의 감정에 대해서보다 우정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불평등한 세계가 조건 지은 도처의 착취적 위험 속에서 인간이 기거할 안식처는 선의와 믿음에 기반한 우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개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구축하기보다 그것의 공백을 만들고 그 공백을 구성하는 태도에 관심을 둔다. 서사의 결 바깥, 또는 그 위에 진짜 재현하고 싶은 것이 놓여 있다고 해도 될까.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서사의 부피가 커 보이는 <퍼스트 카우>에서도 공백은 중요하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대화 사이에 재현되는 온갖 종류의 노동, 질퍽한 시장 바닥 곳곳에서 물건을 팔고 음식을 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 사이를 돌아 다니는 개 한 마리나 팩터 대장의 저택에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를 듣고 있는 원주민의 표정 등이 서사에 통합되지 않은 채 영화의 물리적 시간을 채운다. 나는 이것이 앞서 말한 미국의 역사성에 대한 구체적 재현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역시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에 속할테지만, 미국적 신화를 희구하는 역사의 변방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환경의 척박함과 생존의 양태,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생략된 타자를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미국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켈리 라이카트에게 구체적 경험이란 곧 타자를 감각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타자들 중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드러내는 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언제나 특별하게 시선을 끈다고 생각한다 — 플롯이 분절된 지점에는 반드시 원주민이 나타나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첫 만남이 끝나고 암소가 오리건주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 전환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원주민의 시선이다. 틸리컴을 찾은 피고위츠가 홀린 듯 따라 가 당도한 선술집에서 킹 루를 재회하게 이끄는 것 역시 붉은 옷을 입은 원주민 소녀다. 두 남자가 빵을 만들어 첫 장사를 시작할 때에도 붉은 옷의 소녀가 동행한다. 우유를 훔치는 범행이 적발되는 순간도, 피고위츠와 킹 루의 도주 도입부에도 원주민이라는 존재가 분기점처럼 등장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기 힘들 법한 이런 규칙성이 이 영화에서 원주민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활용되는 것을 유념해 봐야 하지 않을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이라는 타자가 영화의 서사가 구획되는 순간에 환상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주민이 서사에 환영 같이 직접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팩터 대장 일행으로부터 도주하던 피고위츠가 머리를 다치고 어느 원주민 노부부의 집에서 회복하는 장면은 인물 주변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처리하여 시야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 장면이 정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정신을 차린 피고위츠가 집을 나설 때에는 노부부의 집이 폐가처럼 변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원주민 노부부는 온데간데 없고 창에 쳐진 커튼도 부인이 앉아 있던 의자도 사라졌다. 집 주변은 어쩐지 정돈되지 않은 수풀이 무성해 보인다. 이 장면을 영화의 현실 내에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피고위츠가 위중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 말고는. 물론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서사일 것이다. 그 때 영화는 이전보다 더 과감한 방식으로 원주민을 환영화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타자를 감각하기 위해 환상이 개입할지언정 이처럼 명징한 환영 자체로 경험하게 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중심 서사 자체가 환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시대적으로 현재로 보이는 때부터 시작한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어느 여인이 강가로 보이는 어딘가에서 유골을 발견한다. 여인이 옅은 미소를 띠고 올려다보면 앙상한 나무를 오가는 새들이 화면에 담긴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유골의 형체가 화면에 제시된다. 이윽고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인이 발견한 유골이 피고위츠와 킹 루의 것인지는 영화가 확증해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이 유골이 촉발시킨 옛날 옛적 있었을 법한 어떤 것이라 가정해 볼 근거가 된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를 이렇게 유골이라는 기호가 중계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어 사라진 것, 그 흔적으로부터 이야기가 생산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은 없다. 최소한 발굴한 여인이 상상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여인의 마지막 시선을 유골에 두지 않는다. 유골을 응시하는 것은 차라리 여인이 바라 보는 나무 위 새일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인간의, 기록된 역사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또는 생략된 타자의 응시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때 피고위츠와 킹 루의 중심 서사는 차라리 착시에 가깝고 숲속의 뒤집어진 도마뱀부터 강가를 따라 걷는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이 영화가 포착하는 무심한 존재의 양태야말로 유골로부터 떠올리는 과거에 대한 재현의 실질적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제 피고위츠가 젖을 짜며 암소에게 건네는 선량한 대화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기록된 자를 향해 자신도 아우르는 우정을 지녀 달라는 타자의 바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