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 문화에 대한 한 단상
김동훈(국민대 법학과 교수) dohookim@kmu.kookmin.ac.krI.
들어가는 말
‘고시’하면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 신림동 고시촌의 닭장같은 공부방에서 또는 한적한 산사에서 사과궤짝을 책상삼아 도를 닦는 수험생들, ‘합격’이라고 쓰여진 머리띠를 두르고 핏발선 눈으로 수험서에 밑줄을 긋는 모습, 시험합격을 알리는 고시 잡지사의 전화벨소리 그리고 눈물과 감격, 수없는 도전에도 실패를 거듭하고 고시낭인이 되어버린 중년의 아저씨, 드디어 고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어 왕년의 집안의 원수를 갚는 드라마의 단골소재 등등.
그러나 외양상으로는 고시문화도 정보화시대에 부응하여 화려한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며칠 전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배너를 보았다. 이른바 ‘인터넷 사법시험’이란 것이었다. 클릭하였더니 조선일보사가 어느 고시관련회사와 손잡고 참가비를 내는 회원을 모집하여 인터넷 상으로 사법시험 1차의 모의고사를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참가비 할인제도와, 또 무슨 해외여행권 등 각종 경품까지 걸려있었고 내로라 하는 법과대학의 교수들이 그 시험의 출제위원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이를 보면서 조선일보의 발빠른 상업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이제 정보화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에까지 떠돌게 된 사법시험이라는 고물단지의 그 부조화에 실소를 지었다.
그러나 우리의 고시문화를 문제삼는 핵심은 고시제도의 기층에 봉건적이고 신분적인 사회의 가치관이 침전되어 있다는 데 있다. 고시준비의 유일한 목적은 그 사회체제가 마련해 놓은 간판을 따는 것이다. 그 간판은 그 사회가 생산하는 한정된 재화와 권력을 노력없이 누릴 수 있다는 정당화된 수탈의 면허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를 억누르는 체제를 존속시키는 억압과 수탈의 기제인 것이다. 또 이것은 시험제도의 준비과정을 거친 사회의 엘리트에게 그 사회의 체제를 옹호하는 기득권층의 가치관을 체화시키고 모든 변혁의 동력을 질식시킨다. 이를 위하여 수많은 선발방법의 하나에 불과한 ‘제한된’ 시험제도와 그 결과물에 대한 신화화의 작업이 덧붙여진다. 장원급제한 이도령의 금의환향의 신화가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 문화에 그늘을 드리워오지 않았던가.
오늘날 고시제도는 학벌과 함께 우리 사회의 봉건적 가치관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고 있다. 대학입시나 고시공부 모두 그 기본적인 평가의 메커니즘은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에 양자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직 명문대 합격만을 목표로 곁눈질 한번 안하고 달려온 시험기계들은 다시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이 이 고시의 대열에 합류한다. 명문대 학벌취득자는 그 학벌의 기득권에 더욱 확실한 안전판을 마련하기 위해, 비명문대생들은 마지막 패자부활전에서의 화려한 재기를 위해. 이들이 책상 앞에서 흘리는 땀방울만큼 이 땅의 민중의 눈물은 깊어가고 이들의 합격의 기쁨과 환호 뒤에 우리 사회의 퇴락의 그림자도 깊어간다.
II. 고시제도의 뿌리를 찾아
흔히 고시라 하면 단순히 시험의 동의어로서의 고시(考試)와 고등고시(高等考試)의 줄임말로서의 고시(高試)가 있는데 주로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주로 법조인의 선발시험인 사법시험을 선두주자로 행정부의 중견공무원을 뽑는 행정고등고시, 외교관 즉 외무공무원을 선발하는 외무고등고시, 국회사무처의 간부공무원을 뽑는 입법고등고시, 법원의 중견행정공무원을 뽑는 법원행정고등고시, 지방자치 시행 이후 지방행정청의 중견공무원을 뽑는 지방행정고등고시, 그 외 기술고등고시 나아가 공인회계사시험, 변리사시험, 감정평가사시험 등 합격 후 높은 과실이 기대되는 여러 시험도 열거되고 있다. 중견공무원이라면 5급직급인 사무관을 뜻하는데 대졸자도 9급 서기보로 들어가서 평생 근무해야 6급 주사로 끝나기가 보통인 철저한 계급사회인 공무원사회에서 사무관으로 첫 출발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사법시험은 전통적으로 공무원 임용을 위한 고시보다도 조금 더 격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어 왔고 그 실제적인 처우에 있어서도 – 예컨대 판·검사의 경우 별정직이기는 하지만 – 초임이 국장급이고 검찰에만도 차관급이라는 검사장이 40여명이나 우글거린다고 한다.
이러한 고시제도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국가에서 천여년 동안 국가관리의 충원체제였던 과거시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려 광종대에 처음으로 도입되어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천여년 동안 그 근본골격은 거의 바뀌지 않은 채 유지되어 왔다. 과거제도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과거제도는 사회질서를 고착화시켜 사회발전의 역동성을 저해하고 기존의 가치관과 권력의 세습에 기여하는 면이 더 컸다. 그 시대의 지식인층에 있어서는 어린 시절부터 지식 습득의 목적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험제도만으로는 정말로 정치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을 수 없고, 곪을 대로 곪은 기득권체제에 봉사하는 자들만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하에 중종대의 개혁가인 조광조는 과거제도를 조금 보완하는 선에서 별시(別試)의 형태로 현량과(賢良科)라고 하는 천거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기득권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그만 딱 한번 이 제도를 시행해보고 조광조는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고 첫 현량과 합격자들은 모두 파방을 당하였다. 이후로는 과거제에 대한 어떠한 개혁도 이루어지지 못했고 조선시대는 아무런 자기혁신의 에너지를 갖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일제시대에 고등문관시험으로 대치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관리를 뽑는 이 시험에 출세욕에 불타는 많은 식민지 청년이 응시하였고 합격한 소수의 인재들은 판검사나 군수가 되어 영화를 누리고 일제지배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해방후 그대로 이어져 50여년간 이 땅의 속칭 엘리트의 충원코스가 되었다.
III. 고시합격자들의 초라한 초상
고시합격 또는 고시패스라는 단어는 이 땅의 야망있는 젊은이들에게 꿈의 단어가 되었다. 고시합격증서는 이 사회의 유한한 권력과 재화를 놓고 다투는 현실에서 힘들이지 않고 이를 누릴 수 있는 권력 정당화의 근원이 되었다. 또 이것은 자연스럽게 고시합격과 지적 능력을 동일시하는 허구적 신화가 정착되게 하였다. 이러한 왜곡되고 허황된 엘리티즘에 빠져버린 고시합격자들이 사법부와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우리 사법과 행정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매우 경직화되고 권위적으로 되고 방자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검사들은 옛날 고을의 원님처럼 피조사인에게 함부로 반말과 욕설, 때로는 폭행까지 해대기 일쑤였고 힘쓰는 부서의 고급공무원들의 목은 전부 기브스를 한 것같이 뻣뻣하였다. 판검사로서 한창 대접 받다가 40대쯤에 변호사로 개업하여 전관예우(前官禮遇)도 받고, 때로는 엄청난 성공보수도 받으며 경제적 부도 누릴 수 있었다. 공무원도 힘쓰다가 유관기업체에 이사 등으로 스카웃되어 고액의 연봉을 수령하는 등 비슷한 행태를 걸어왔다. 이런 기득권 층의 행태는 의정부 사건, 대전법조비리 사건 등 법조계 비리와 무능하고 부패한 경제관료로부터 빚어진 IMF 사태로 나타난다. 다 선량한 이 땅의 민중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건이다.
고시에 합격하여 일단 그 신분의 매력을 느낀 자들은 평생 양지를 좇아 다니는 해바라기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며칠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주인공은 장애인으로서 헌법재판소장까지 역임한 김용준씨였다. 여러 존경할 만한 일화가 많이 소개되었지만 필자의 눈을 찌푸리게 한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영예로운 관직인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퇴임하자마자 모 로펌의 법률고문이 되어 그리로 출근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정도로 국가에서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굶어죽을지라도 그런 일은 피해야 한다고 믿는다. 연금으로 생활하면서 보다 공익적인 활동을 모색해보는 사회의 지도층으로서의 품위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의 말년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하기는 그 이전에 역시 존경받는다던 전 대법원장도 물러나자마자 모 법률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던가. 어느 판사는 이러한 현상을 비꼬아 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신 교장선생님이 그 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구멍가게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정곡을 찌르는 비유다. 평생을 고시합격증이 가져다주는 특권에 젖어 살던 몸이라 잊혀지고, 낮고, 봉사하는 자리에 처하는 것을 모른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라면 명예나 사회적 책무같은 것에는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다.
또한 고시출신들은 고시출신자들끼리 여러 징표를 가지고 소그룹을 만들어 결속을 도모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시 기수이다. 마치 군대문화를 연상케 하는 이 후진적인 문화를 볼 때마다 한없이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고시에 한번 붙으면 고시 몇 회라는 것은 마치 계급장처럼 평생을 따라다닌다. 가끔씩 인사철이 되면 언론에 보도되는 코미디같은 한바탕 어수선이 있다. 법조계에서 사시 몇 회가 검찰총장이나 대법관에 임명되면 그 기수 이전의 사람들은 다 옷을 벗는 것이다. 뭐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나. 그 중에는 계속해서 법관직을 천직으로 알고 근무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잖은데도 주위의 무언의 압력에 떠밀려 옷을 벗고 변호사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것이 결국에는 후배판사들의 재판에 더 많은 심적 부담을 지우는 길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봉사하는 자세로 시골의 시·군 법원에 내려가겠다는 자도 없다. 원로법조인을 임용하려던 시·군 법원은 지원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렇게 법조인이나 고시출신자들은 고시 몇 회니 또는 사법연수원 몇 기니 하는 각종 소모임을 만들어 수시로 만나 우의를 다지고 업무에 협력을 도모한다. 변호사, 판사, 검사 등 접촉의 통제가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할 사람들 사이에 연수원동기라는 끈이 생기고 이는 최근의 의정부나 대전의 법조비리로 나타났다. 이래저래 희생당하는 것은 학연없고 지연없는 억울한 국민들이다. 나아가 법조계 전체 또는 고시합격자들이 집단적 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이는 현상도 적지 않다. 어제까지만도 고시합격자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자들도 시험에 합격한 다음 날부터 자기의 고시합격의 간판가치의 하락을 염려해서 합격자 수를 줄여야 한다며 보수·반동으로 돌아서는 일이 다반사다. 이는 결국 간판에 대해 특권이 주어지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그 간판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의 형성과 그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집단이기주의가 발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우스운 기사를 보았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법조인 대관(大觀)’이라는 초호화양장의 사진첩이 있다. 사법시험 합격자를 기수별로 정리해 약력을 소개해 놓은 것이다. 어느 사기꾼이 이 법조인 대관에다 자기 사진을 감쪽같이 붙여놓고 사무실에 비치해 놓고 돈많은 유부녀들을 유혹해 농락했다는 3류주간지에나 나올 듯한 이야기이다. 이 두툼한 법조인 대관이라는 책자가 바로 고시제도의 신분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 신분의 족보에 들고자 하는 전쟁이 고시제도이고 이 족보 안에 든 자들끼리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고시제도의 사회적 결과물이다.
IV. 고시제도와 학벌의 함수관계
결국 고시제도란 경제학적으로 보면 독점적인 지대추구(rent-seeking)행위를 가능케하는 온상이요, 사회학적으로 보면 실질보다는 간판에 의하여 지배되는 간판주의 사회를 고착화시키는 기제이다. 이런 점에서 고시는 대학입시와 매우 유사한 구조와 기능을 담당한다.
물론 고시합격간판과 학벌간판 사이에는 다소의 기능적 차이가 있기는 하다. 우선 학벌간판은 우리사회의 전 계층과 전 영역에 걸치는 포괄성을 띠고 있다. 학벌간판은 그가 우리 사회의 어느 영역에서 활동하든지 거대한 동문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의 각종 유무형의 이익을 안겨다주며 개인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고양시켜준다. 이에 비해 고시간판은 그 합격자체가 임용시험이므로 직접적인 사회적 보상으로 이어지고 주로 자기의 업무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학벌간판자들이 다시 고시간판으로 몰려드는 것도 고시간판의 직접적이고 확실한 환금성의 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고시제도는 보다 광범위한 학력 내지 학벌이라는 간판과 통합되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고시제도가 학력과는 별도로 능력과 야망을 가진 자의 입지전적 출세의 가교역할을 해주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지금 차세대 대권후보주자로 항시 물망에 오르는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도 그 이력이 거론될 때마다 상고출신으로 고시에 합격한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사실 상고를 나와 잘 되어봐야 말단 은행원으로서 돈다발이나 세고 있어야 할 사람에게 사법시험의 존재와 그 합격은 그 인생의 웅비의 발판이 된 것이다. 또 옛날에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고시패스로 변호사의 길을 걸어온 김모 변호사의 자서전은 많은 이들에게 꿈을 주었다.
또한 비록 대졸의 딱지를 달았으나 이른바 명문대, 대충 거명해서 서울대, 고·연대라는 빅쓰리에 들지 못하는 학벌을 가지고서 좌절하기 쉬운 능력있는 젊은이들에게 고시제도는 새로운 패자부활전을 치를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비명문대생들이 고시합격으로 학벌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직이나 법조 등의 분야에서 자기 성취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점에서 고시제도가 의의가 있다고나 할까. 어느 사회저명인사는 가난한 시절의 희망없는 자신에게 대학입시의 존재는 밝은 미래의 보장을 의미했다고 말하며 그에 대한 예찬의 글을 썼다.
이것은 고시옹호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논리일 터이다.
우리가 대학입시를 치르던 53년은 한국전의 와중이었다. 병역 보류라는 특전 때문에 의과대학은 경쟁이 더 치열했다. 거길 뚫은 것이 이른바 ‘출세’를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어 준 것이다. 난 이점에서 한국의 수험 경쟁이 많은 젊은이에게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는 관문을 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수험 경쟁이 없었던들 시골 두메에서 보리죽으로 겨우 연명이나 하던 나에게 어떻게 예일 대학 유학의 문이 열릴 수 있었겠나! 따지고 보면 오늘의 나의 모든 영광은 —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 수험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 코리안 드림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 높지도 않은 곳에 있다. 조금만 열심히 뛰면 잡을 수 있다. 수험 공부가 우리에게 코리안 드림의 실현을 약속해 주고 있다.
(이시형, 『그래도 대학은 보내야지』(1997.1) 중에서)
게다가 고시제도의 문이 다소 넓어지면서 – 특히 사법시험의 경우 합격인원이 몇 년전의 300명에서 현재 700명 선을 유지하고 있음 – 고시간판과 학벌의 결합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가고있다. 즉 고시에 붙으면 그 고시자격증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혜택을 누리지만 – 물론 그것도 상당한 프리미엄이지만 – 정작 그 분야의 핵심권력에 접근하기 위하여는 학벌이라는 그 내부의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서울대 출신의 독식이다. 예컨대 사법시험에 붙어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어도 일정한 고위직급에 – 법원의 경우라면 지방법원장급, 검찰이라면 검사장급 등 – 오르려면 학벌의 울타리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법원이나 검찰의 인사발표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출신학교를 분석해보라. 대략 60-70%는 서울법대출신이고 고·연대가 10-20% 차지하고 어쩌다가 기타대학출신이 하나 둘씩 끼는 형국이다. 행정부서로 가도 독점비율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대동소이하다. 가장 최근의 개각발표시 장관급인사를 출신학교별로 보니 서울대, 고대, 연대의 이른바 빅쓰리 출신이 22명 장관급중 18명을 차지하고 있다. 비율로 따지면 81.8%, 이 정도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시장지배력을 남용할 위험이 있다하여 시정명령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는 듯하다.
즉 고시에 붙어 법조계나 공무원사회에 발을 들여놔도 학벌이 나쁘면 일정한 선에서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예컨대 법조계에서 내로라하는 몇몇 빅 로펌에서는 오로지 서울법대 출신만으로 충원하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 고시에 붙으면 그 수재성의 재확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어쩌다 고시 하나 붙었다가 되는 것이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근래에 700명선을 돌파했고 1,000명선을 향해서 가파르게 돌진하면서 그 합격증의 위세에 대한 우려가 생김에 따라 벌써부터 학벌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마담뚜들도 이제는 서울대 출신의 사법고시 합격자만 찾는다고 한다.
이 고시제도와 학벌과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제 각 대학이 고시지원사업의 최일선에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전부터 몇몇 비명문대학에서 고시지원에 거교적인 투자를 하여 상당한 실적을 쌓아온 것은 잘 알려져있다. 그래서 명문대의 학벌을 얻을 만한 성적의 학생들이 명문의 학벌을 포기하고 바로 고시합격이라는 지름길을 택하여 성취를 이루고 학교의 명예와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에 기여한 사례도 적지 않다. 사실 원색적으로 이야기하여 서울대의 비인기학과의 졸업장과 비명문대생의 사법시험합격증 중 어느 것이 간판의 시장에서 더 값이 나가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명문대학들도 이 고시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거대한 고시기숙사를 짓고 대규모의 특별회계를 운용하고 그 외 각종 고시지원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동문회에서 상당한 재원을 마련하여 이 고시사업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 고시지원사업으로 인하여 많은 대학들이 대학의 존재이유에 모순을 빚는 파행성에 직면하고 있다. 예컨대 1차시험에만 붙으면 학점을 그냥 줄터이니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가라고 한다든가, 1차시험 합격자에게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든가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특히 대학예산의 상당부분이 이 고시지원사업에 투자됨에 따라 일반학생들이 실질적인 희생자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최근 어느 명문대에서 기숙사를 새로 완공했는데 그 중의 3분의 1 가량을 고시준비생들을 위해 배정했다고 한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에는 상당학생이 입학시 전공을 불문하고 고시공부에 투신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서울대출신 사법시험 합격자의 3분의 1 이상이 비법대생이다. 서울대생=고시생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온 캠퍼스가 고시열풍에 휩싸여 있고 중앙도서관에는 수험서와 법전이 판을 치고 있고 특히 인근의 신림동 고시촌과 상응하여 고시의 메카가 되어 있다. 서울법대도 그간 사법시험의 합격자 수에 초연한 듯 해왔으나 갈수록 서울법대 졸업생의 합격자비율이 낮아지자 지난 학기부터 학부에 아예 ‘사법시험공부방법론’이라는 강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차피 고시합격이나 대학졸업장이나 단지 간판장사인 바에야 양자가 이처럼 찰떡같이 결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사법시험의 합격자수가 늘어날수록 이 고시열풍은 더욱 광범위하게 번져갈 것이고 고시준비에 있어서 학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학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래서 대학은 그저 졸업장이나 따가는 형식적 기관으로 남게되고 고시준비에 몰두하는 학생들은 신림동으로 몰려간다. 이래저래 고시와 학벌의 결합은 가속화되고 있고 대학은 졸업장이나 팔아먹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V. 고시제도를 무덤속으로 – 전망과 대안
고시제도의 개혁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환과 맞물려 있다. 이는 우리사회가 기득권자를 위한 체제유지 중심으로 가는가 아니면 개개인의 폭발적인 자기실현에 기반한 사회변혁의 길을 택하는가의 문제이다. 시험제도란 기본적으로 체제순응적인 인물을 길러내어 체제의 유지에 봉사케 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일정한 스테레오타이프 형의 인간을 만들어내고 사회를 동질화시킨다. 그것은 사회체제의 형식적·절차적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이나 한 사회의 역동성을 갉아먹고 퇴화시키는 메커니즘이다. 동아시아 유교국가에서의 과거제도가 많은 능력있는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바늘구멍같은 과거시험준비에 소진케 함으로써 역으로 사회체제의 안정에 기여했다는 역설적인 견해도 있다. 그것이 모순에 찬 당대의 사회체제의 현상유지에는 기여했는지 모르나 결국은 시대변화의 흐름을 읽는 능력을 박탈하여 중국이 근대화의 물결에서 낙오되어 숱한 수모를 겪게된 원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오히려 실력위주의 역동적인 체제를 유지했던 일본이 근대화의 물결에 빨리 적응하여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일본도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동경대학, 고등문관시험 등의 체제유지의 메커니즘을 도입함으로써 경직된 군국주의사회를 거쳐 경제적인 능력에 걸맞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고시제도는 어떻게 변하여야 할까? 고시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사법시험제도는 한마디로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교육부는 당초 방침을 바꿔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을 1년 늦추어 2003년부터 도입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이른바 사법시험법의 제정안이 국회상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것은 사법시험의 정원제 선발시험으로서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을 골간으로 하고 약간의 말단의 것들을 조정하는 내용을 담음으로써 사실상으로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무력화시키게 될 공산이 크다. 개혁에 따른 이익집단의 반발에 대하여 한 법대 교수의 비판을 들어보자.
그러나 혜택이나 이익이 국민 다수에게 돌아가지만 전략적인 위치의 소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개혁은 전략적인 위치를 활용한 소수의 반대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많다. ….법학교육 개혁이 어려운 것은 바로 소수 법조계 인사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저항 때문이다…..
소수 법조인들이 여러가지 구실을 내세워 반대하는 진정한 이유는 법학전문대학원 체제와 함께 변호사의 수가 늘어나 종래 그들이 누려오던 엄청난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더이상 누릴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법학대학원 체제가 변호사 수의 증가를 가져온다면 그만큼 소송수임료가 싸질 것이다. 그동안 변호사의 조력을 얻기 어려웠던 영역에서도 그들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는 혜택을 일반 국민은 누리게 될 것이다.
(최대권, <법학전문대학원제 효과 크다>, 《동아일보》, 1999.9.28)
이처럼 개혁은 어렵다. 사법시험 외에 행정·외무·지방고등고시 등도 지금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는 지금 2003년 내지 2004년 도입예정으로 국가고시제도개편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핵심적인 것은 1차시험과목에 이른바 공직적격성테스트(PSAT:Public Service Aptitude Test)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기본소양분야, 직무관련분야, 지식분야로 구분되어 실시되는 이 시험은 그나마 진부한 오지선다형의 객관식시험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역시 선발에 너무 비중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큰 변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고시제도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하급공무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업무능력을 보이는 자를 과감하게 발탁하여 승진시키는 제도가 바람직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능력이 있는 자는 말직에 있을지라도 몇 달만에 요직으로 중용되기도 했다. 즉 우리 사회에 평생에 걸쳐 경쟁하고 평가받고 보상받는, 평가와 보상의 시스템과 문화가 정착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우리도 퇴행적이고 소모적인 고시의 문화에 조종을 울릴 때가 되었다. 이 사회에 더 이상 ‘출세’란 없다. 오직 성실한 직업인, 능력있는 전문인, 사회에 봉사하는 품위있는 시민만이 있을 뿐이다. 최근에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뀌는데 맞추어 필자가 쓴 칼럼의 일부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고시응시율이 살인적인 것은 여전히 고시합격이 가져다주는 반대급부가 턱없이 높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용어로 합격을 통한 지대추구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격자수를 다소 늘리는 정도가 아니라 시험의 성격을 기본자격시험으로 바꾸어야 한다. 해당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자라면 상당수가 통과할 수 있는 시험으로서 기나긴 전문가적 수련의 출발선의 의미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선발보다 교육에 중점이 주어지는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한다. 선발에 과도한 부담이 주어지는, 즉 합격여부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시스템은 아무리 선발방법을 개선하여도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시험을 위한 피상적인 정보다발의 암기와 답안작성기술의 습득이라는 소모적인 활동이 그 주종을 이룰 것이며 그에 따른 사교육의 번성 등 선발의 본래취지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치닫게 된다. 이제 전문대학원의 도입이든 무엇이든, 국가의 인력관리의 차원에서 집단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획기적인 해결책의 모색이 요청된다. 인적 자원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에서 이러한 소모적이고 퇴행적인 인적 자원의 낭비를 방치하고서는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인적자원 낭비하는 고시제도>, 《중앙일보》, 200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