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몇 년 동안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상실감과 자책이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하기가 짐짓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진되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폐허를 수습하고 있는 듯 하다. 내 얘기를 마음 열고 들어 줄 상담자를 찾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감정을 진정시킨 후 한 일은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내가 할만한 활동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필사 수업을 들었다. 옮겨 적는 글에 이내 염증을 느끼고 나는 다시 영화를 찾았다. 영화 비평 읽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리뷰 쓰기 모임도 찾았다. 글쓰기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게 끝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일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상담자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 덕분에 오랜만에 본 영화를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글과 생각은 언제나 모자라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영화 보고 쓴 글을 남길 수 있어 좋다. 더욱 좋은 건 리뷰 쓰기 모임에서 한 해 동안 쓴 글을 책으로 엮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즐기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 주는 일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 쓴 영화 두 편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도 기록으로 남겨 둔다.



사랑에서조차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가 우화적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은 인물들로부터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으로서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 상대를 찾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상대에게 웃음 짓지 않는다. 냉혹한 여인이 데이빗의 형을 죽였을 때에도 데이빗은 복수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미는 동안에도 데이빗의 눈빛에는 두려움 하나 없다.

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인물에 동일시하지 않고 신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채택한 연출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억압 받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적 상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정작 감정적 상호작용과 자유의지는 마비된 사회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다.

감정적 동일시를 원천차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안된 내레이션을 통해 근시 여자는 데이빗이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데이빗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전반부와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는 데 실패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수용소처럼 싱글들을 모아 놓고 짝짓기를 강제하는 호텔이나 이 커플 이데올로기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금지하는 게릴라 조직 모두 공히 억압하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감정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기괴하고 어리석다. 사랑할 상대를 찾거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면적 동일성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근시 여인이 데이빗도 나처럼 근시인 것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절름발이 남자가 코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벽에 얼굴을 처박아서라도 코피 흘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들. 감정 교환이 불구가 된 이 세계에서는 각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각자의 춤을 추는 적막에 찬 장면처럼 모든 행위의 본질적 효과가 사라지고 우스운 몸짓만 남는다.

근시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데이빗이 근시 여인처럼 똑같이 눈 멀기 위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르려는 마지막 시퀀스는 안타까운 촌극이다. 이 시퀀스는 눈 먼 채로 돌아올 데이빗을 기다리는 근시 여인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감정의 자유의지와 자기 존엄을 위한 투쟁에 각성하고 고군분투한 데이빗과 근시 여인조차 사랑에 대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호텔과 게릴라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이 세계에서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같아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표정과 목소리에 담는 법을 모르는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방법이 없고 사랑에서조차 그저 주어진 세계의 선택지에서 배회할 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고 이 영화는 부조리하게 말한다.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 <쓰리 타임즈>

영화 <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가장 좋았던 때의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 시대를 배경으로 연인으로 묶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각 시대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품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내 놓지 않는다. 1966년을 다룬 첫 번째 챕터 <연애몽>만이 명료하게 떠올라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에 반해 1911년을 다룬 두 번째 챕터 <자유몽>에서 기생(서기)과 개화파 시인(장첸)의 관계는 억압되어 침잠하고 있으며 2005년을 다룬 세 번째 챕터 <청춘몽>에서 진정(陳靖, 서기)과 아진(阿震, 장첸)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부제목은 그것이 충만하여 빛나는 때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결핍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는 이따금 그들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유몽>에서 예외적으로 할애된 유성영화의 순간이 영화적으로 빛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1911년과 2005년의 이야기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때인 1966년의 빛나는 순간을 상기하며 1911년과 2005년을 반추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치가 순차적이지 않고 1966년 – 1911년 – 2005년인 것은 1966년이 참조점이 되어 그보다 과거와 그보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1911년과 2005년에 대한 1966년의 대답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내 원경험이 오직 <연애몽>에서 서기, 슈메이의 놀란 웃음과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노래 Rain and Tears를 둘러싼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의 응축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까.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은 1966년 입대를 앞둔 한 청년(장첸)과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인 슈메이(秀美, 서기)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가오슝(高雄)의 한 당구장을 즐겨 찾는 청년은 본래 슈메이가 오기 직전 직원 하루코(春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슈메이의 손에 넘어가서야 비로소 연애편지가 되었고, 군인이 된 청년은 휴가 중 다른 곳으로 떠난 슈메이를 애타게 찾고 결국 만나고 끝내 연인이 되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슈메이와 청년이 연인이 되기 직전 끝난다는 점에서 <자유몽>, <청춘몽>과 마찬가지로 <연애몽> 역시 연애가 부재하고 그것을 갈구하는 인물이 거기에 가 닿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챕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청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동안 우리는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이 하루코에게 건네는 편지에서 감정의 단초를 알 수 있을텐데, 영화는 이 편지를 받은 하루코의 옅은 웃음 외에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편지의 내용은 하루코가 떠나고 새로 온 직원 슈메이가 읽는 동안 청년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하루코가 아니라 슈메이를 통해 청년의 마음을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편지에는 청년의 상실과 실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두 번 대학 시험에 떨어졌으며 곧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은 당신이 있는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로 받을 누군가가, 아무라도 필요하다고 구애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하루코와 슈메이는 청년이 품는 욕망의 대상이고, 영화는 청년의 욕망을 제 것으로 하여 따라간다.

그러나 <연애몽>은 (그 누구와도)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의 욕망과 감정을 청년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 준다. 뒤늦게 알게 되는, 슈메이가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루코의 편지를 전해 읽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메이의 표정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편지를 읽으며 웃음 지을 때, 자이(嘉義)로 떠나는 배 위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후웨이(虎尾)의 당구장에서 청년을 보고 놀라움의 웃음을 지을 때. 슈메이의 응답이 있을 때 영화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를 통해 청년의, 또는 이야기의 욕망은 정당성을 얻고 배가된다. 청년이 편지에 적은 노래 제목이 카메라가 슈메이의 표정을 가까이 지켜보는 순간 노래가 되어 흐르듯이 욕망은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환상이라는 실체를 얻게 된다. 슈메이의 응답이 만드는 환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응답 없는 하루코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청년이 가오슝에서 자이로, 그리고 후웨이로 슈메이를 찾아 헤매게 되는 동력 역시 숨겨진 슈메이의 응답이다.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꼭 붙잡는 청년과 슈메이의 손을 클로즈업하기까지 이 둘만의 공간을 섣불리 할애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는 당구대나 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해 들어온다. 후웨이의 당구장에서 재회한 청년과 슈메이가 벅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구 치는 손님이 이들을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방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야기가 품은 욕망과 달리 카메라는 청년과 슈메이를 타인 다루듯 한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힘겹게 찾아 내야 할 것처럼. 마치 사심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카메라는 이야기의 욕망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인물과 함께 욕망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움직임만 지켜보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지닌 욕망의 에너지를 응축, 강화한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움켜쥐는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는 카메라의 거리 두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욕망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이야기의 욕망을 끝내 승인하고 그곳에 달라 붙어 버리는 영화적 희열의 순간이다.

<연애몽>은 희열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 같다. 달리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 같다. 욕망 – 사랑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지만 끝내 긍정하고, 그것을 소비하기보다 정당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슈메이의 응답만이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욕망이 대상을 착취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애몽>이 다루는 태도를 대척점에 놓고 <자유몽>과 <청춘몽>을 생각한다. <자유몽>에서 지주의 아들인 개화파 시인은 기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취한다. 시인과 기생 모두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히 비겁한 인물은 소위 개화파 시인이지만 말이다. 반면 <청춘몽>에서 진정과 아진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는 순간에도 공허하다. <자유몽>과 달리 어떤 것도 허용되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몽>과 어떤 것도 허용되는 <청춘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연애몽>. <연애몽>은 <자유몽>과 <청춘몽>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자유몽>의 유곽과 <연애몽>의 당구장, 그리고 <청춘몽>의 도로로 공간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역시 <자유몽>은 몇 달, <연애몽>은 몇 일, 그리고 <청춘몽>은 몇 시간의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애몽>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구성된 시공간의 범위에서도 <자유몽>과 <청춘몽> 사이의 중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이 다른 두 챕터를 안타까워 하며 반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연애몽>은 반추할 대립자가 불필요하다면 어떨까. 허우샤오시엔은 시대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허우샤오시엔 개인의 역사와 노스탤지어가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는 그것을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역사의식으로 치환하면 이야기도 역사의식도 얄팍해져 버리지 않을까. 1911년의 우창봉기나 1966년 대만의 징병제, 2005년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 각자가 지닌 순간의 역사적 다층성을 억압하거나 소진시키지 않고 이 영화를 선해하기 위해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준익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간 제대로 본 영화도 없다. 가끔 TV를 돌리다 우연히 ‘황산벌’이나 ‘라디오 스타’ 따위가 나올 때면 잠시 보다가는 바로 한숨이 나온다. 그의 영화가 표현하는 감정들은 항상 과잉이고 키치적이며 마초적이다(이 조합은 정말 좋지 않다).

님은 먼 곳에’ 역시 그랬다. 약간 옹호의 여지는 있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세트 제작 스탭으로 참여한 순근이를 생각해 극장에서 봤지만 사실 극장에서 돈 내고 보지는 않을 참이었다.

3대 독자에게 시집을 간 시골 처자 순이가 시어머니의 요란에 남편 찾아 베트남까지 간다. 그런데 영화 내내 그녀는 왜 베트남까지 가는지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극은 정만, 정진영이 다 끌고 간다. (엄태웅은 제발 연기 좀 해라. 눈만 까 뒤집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한 움큼도 들려주지 않고 묵묵히 베트남까지 와서 위문공연 가수가 된 순이는 백치의 주체다. 온통 남성들뿐인 세상에서.

쟁점은 이 백치의 주체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을 옹호할 것인가 하는 것인 것 같다. 옹호할 여지는 순이가 가부장제적 질서를 누구보다 지독하게 고집하려는 것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다. 순이는 영화 중반부터 이미 써니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부(從夫)를 고집한다. 나는 써니와 순이에서 근본적으로 변화, 단절된 주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써니는 당연히 가부장제적 가치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영화는 표면적으로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순이는 써니가 되고 나서 비로소 가부장제를 악에 받쳐 지켜 내려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단 하나의 역설은 이것이다. 그녀는 춤추고 노래하면서 피폐해진 남성들을 위무하는, 그리고 급기야 미군 장교에게 몸을 바치는 지경에까지 가면서도 남편을 찾아내겠다는 가부장제적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가부장제적 임무를 위임한 순이는 이 임무를 ‘실제로’ 수행함으로써 가부장제적 질서가 스스로를 위배하는 실패의 순간을 드러낸다. 안티고네 신화를 떠올릴 법도 하다.

어서 아들을 낳아 주기를 바라는 시어머니 때문에 남편 찾아 부대까지 오는 순이

한 건 잡으려는 밴드들에게나 총질하는 군인들에게나 써니는 남성의 주관적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다. 카메라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게 옹호론을 펴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논지는 다른 디테일을 모두 눈감아 준 결과다.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골든 하트 3부작이 아니다. 희생과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성 주체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순이는 이 영화에서 시어머니에게 ‘제가 갈게요, 베트남’, 정만에게 ‘호이안으로 가요’, 미군 장교를 찾아가 몸 러시를 할 때, 그리고 남편 상길을 만나 뺨을 치는 등등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주체인 적이 없다. 그녀는 이 영화의 화자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객관화된 대상이지도 않다. 화자는 여전히 이준익스러운 좌충우돌 루저 정만과 정만의 또하나의 정서적 대변인인 순이 남편 상길이다(‘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를 위로해 줘’).

순이는 어디서나 남성의 순수한 주관적 대상일 뿐이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참으면서 영화를 봐야 했지만 밴드 일당이 공연으로 번 돈을 불 태우는 장면에서는 인내심이 무너져버렸다. 써니가 정절을 바쳤음이 암시된 후 돈을 목적으로 베트남까지 온 밴드 일당들이 비장하게 돈을 태우다니. 이건 이 영화가 순이와 써니를 대하는 뉘앙스의 상징적인 클라이막스다.

순이는 어디서나 남성의 순수한 주관적 대상일 뿐이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참으면서 영화를 봐야 했지만 밴드 일당이 공연으로 번 돈을 불 태우는 장면에서는 인내심이 무너져버렸다. 써니가 정절을 바쳤음이 암시된 후 돈을 목적으로 베트남까지 온 밴드 일당들이 비장하게 돈을 태우다니. 이건 이 영화가 순이와 써니를 대하는 뉘앙스의 상징적인 클라이막스다.
영화는 생고생하는 써니를 정당하게 다루고 있을까?

남편 찾아 베트남까지 간 순박한 선이가 써니가 되어서도 가부장제적 질서를 지킨다. 이건 사실 80년대까지 한국영화가 많이 다뤄 온 역설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역설이다. 질서를 냉소하되 고집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체들이 종종 질서에 대한 냉소와 고집 사이에서 이중적인 한계와 충돌 같은 것에 부닥치는 것과 닮은 느낌이다. (촛불집회의 비폭력에 대한 고집도 생각해 볼 만 하겠다.) 문제는 영화가 이 역설을 다루면서 질서가 보여주는 실패의 순간을 드러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화 내내 생고생한 순이, 써니가 억울하지 않다. (또한 극중 남성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이기도 할테고.)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이준익의, 한국 대중 문화의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