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히만 아일랜드>

크리스에게 창작은 고문과도 같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야기를 만드는 일부터 크리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아 보인다.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이 출현하고 실현되며 때로는 충돌하는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나는 그 구조의 동력을 발견하고 추동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 과정의 무게를 견뎌 내야 하는 작가란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 일에 몰두하는 건가 생각해 보고는 한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강박적으로 탐색해야 하고, 그렇게 잉태된 이야기가 자기 자신의 욕망과 대결하는 시간을 마주하면서 끊임없이 분열하는 주체다.

어쩌면 영화에서 크리스와 토니의 상태를 가르는 것은 작가로서 자기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토니에게 작가는 작품이 세계에 현현하기 위해 거쳐 가는 매개자라면, 크리스에게 작가는 작품을 세계에 끄집어 내는 존재가 아닐까. 세상으로 끄집어 내는 자, 또는 출산하는 자로서 크리스는 작품에 책임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는 것처럼 보이며, 이것이 크리스가 토니와 변별되는 지점이리라. 사랑해 마지않는 잉마르 베리만이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녀를 두고도 가족을 소홀히 한 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베리만의 안식처였던 포뢰 섬의 주민들이 베리만을 여전히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보며 크리스는 상념에 빠진다. 그에게 책임과 불안이라는 태도는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 세계로 확장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크리스가 포뢰 섬에서 착상하게 된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 않다. 에이미가 조지프를 두고 겪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공감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조지프가 떠난 후 절망한 에이미를 이 이야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크리스는 선뜻 인도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그 다음이 관건인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해 보이는 에이미에 관한 이야기(가제가 <하얀 드레스>인 것으로 보인다)가 <베르히만 아일랜드>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그것이 크리스의 내적 갈등이 야기하는 정합적인 한계라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보다 이 영화가 영화 속 크리스의 영화를 자신과 연결하는 방식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나아 보인다. 크리스의 설명에 따라 박자를 맞추어 재현을 수정하면서 시작한 크리스의 영화가 앞서 말한 이야기의 말미, 중요한 분기점에서 크리스의 잠재적 현실과 구획 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가 만난 영화학도 함푸스가 크리스의 영화에서 같은 인물로 등장하는 것도 더해서,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크리스의 현실과 가상을 상호 반영적인 세계로 표현하려 한다. 현실과 가상의 뒤섞임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가상의 유효성이 증명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토니, 함푸스, 나아가 잉마르 베리만과 작가에 대한 크리스의 감정과 욕망이 가상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유효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의 현실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할 만큼 유효하기도 하다. 크리스가 그의 영화 <하얀 드레스>의 결말을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자기 감정과 욕망이 야기할 파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크리스가 끝까지 밀어붙여서는 안 될, 막다른 금기를 깨닫고 이야기에서조차 실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상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현실의 층위에서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면. 크리스의 가상과 영화의 현실 모두에서 감지되는 파국의 가능성은 이 두 층위의 경계를 모호하게 중첩시킴으로써 봉합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치 가상과 현실 양자를 순환하는 구심력이 크리스를 파국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끌어 당기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라는 작가의 파국에 대한 근심과 불안이 가상과 현실의 순환 고리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해안가로의 여행>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나로 하여금 영화의 허구적 세계에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기괴한 장애물이 영화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영화 <큐어>에서 경찰의 공개 심문 자리에 선 마미야가 “본부장, 당신 누구야?”라고 내뱉는 질문이 일으키는 효과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관통하는 관심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아가 텅 비어 버린 듯한 마미야는 끔찍한 최면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앉은 심문 자리에서도 태연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해 보라는 후지와라를 향해 오히려 몇 번을 반복해 본부장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되묻는다. “뭘 묻고 싶은 거야?” 후지와라는 마미야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비껴가려 한다. 마미야의 치명적인 몇 마디가 주체에 균열을 가하고 보는 이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기괴함이란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근원적인 질문을 마주하고 불안해진 주체의 신경증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영화가 그런 기괴함을 불러 일으키는 지점을 품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종종 생각하게 된다.

현실의 기술 복제 예술인 영화는 현실적 허구로서 자기 타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 들이기 힘든 환상이 출현할 때, 영화는 때로 관객이 품을 만한 의심과 검증을 스스로 대리 수행함으로써 이 허구적 세계의 현실성이 믿을 만한 것임을 납득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속임수에 가깝지만, 영화가 자기 세계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나면 관객은 그 태도를 따라하게 된다. 가상의 세계를 그럴 듯하게 완결된 것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영화는 시치미를 떼고 자기 검증을 해 본 척 하며 의심스러운 틈을 봉합하는 것이다.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이 같은 봉합이 수행된다. 사고 3년 만에 돌아온 남편 유스케가 미즈키 앞에만 보이는 허상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지하철 역무원과 대화를 하는 장면부터 서서히 해소된다. 미즈키 이외의 타인과 대화하고 관계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 주면서 우리는 유스케의 육체성을 믿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상하게 견디기 어려운 어색함을 느껴야 했다. 유스케가 영화 속에서 정말 실존하는 인물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영화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유스케와 같은 존재라는 시마카게가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 시마카게의 집이 폐허로 돌변하는 것이나 후지에의 죽은 동생 마코와 미즈키의 죽은 아버지의 육신을 대면하는 이 영화의 세계를 제시해 주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나는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허구의 자기 검증 뒤에 남겨 놓은 이상한 잔여물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지하철 안에서 한 아이가, 그리고 시장에서 어떤 승려가 유스케를 향해 보내는 응시에 붙잡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유스케의 육체성을 확인시켜 줄 정도의 검증에 그치지 않고, 응시하는 눈빛을 보태어 놓았다. 그들의 응시는 영화가 구축한 허구적 세계에 일부러 내 놓은 갈라진 틈 같았다. 텅 빈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영화 자신도 사실 유스케를 이상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처럼 보였다. 그 순간을 지난 이후에도 영화가 자기 세계가 잘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한 실체를 알아 버린 사토코가 홀로 제국주의의 심장과 대면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그의 정신이 무너진 것처럼, <해안가로의 여행>은 유스케를 의심하는 영화 자신의 응시를 감지하고도 이 허구적 세계를 계속 믿으며 따라 가야 하는 일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는 광기를 경험하더라도, 혹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어떤 것과의 대면을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숭고와 시뮬라크르

-현대철학과 현대예술의 동형성에 관하여-

사물  

발터 벤야민은 복제의 등장으로 아우라가 파괴되는 것을 ‘현대'(Moderne)의 징후로 보았다. 그에게서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나타남”이라 규정된다. 이 표현 속에 들어있는 “나타남”이라는 낱말을 우리는 ‘현전의 체험’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일회성과 지속성”을 가진 원작과는 달리 기술복제의 산물들은 그저 “일시성과 반복성”만을 가질 뿐이다. 하지만 이 일시적으로 반복되는 복제물들은 단지 원작을 베끼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원작 자체에 존재론적 영향을 끼쳐, 현실성 혹은 현실감의 상실을 가져온다. 그것들은 “사물의 역사적 증언가치”를 위협하고, 그 결과 “위험에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

벤야민이 살던 당시에 복제기술은 단지 원작을 베끼는 수준에서 벗어나 창작과정 자체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이미 드가는 창작에 사진을 활용한 바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앤디 워홀이 모델 없이 오직 복제물인 사진만으로 작업을 하기 훨씬 이전에, 예술에서는 이미 사물성의 상실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령 모네의 <루앵 성당> 연작에서 돌로 된 스콜라 철학은 그 견고한 사물성을 잃고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여러 장의 시뮬라크르들 속으로 해체된다. 이 시뮬라크르들에 다시 견고한 사물성을 되돌려주려 한 세잔느는 사물의 마지막 구원자였는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구원의 시도가 좌초한 지점에서 재현을 포기한 현대예술이 시작된다.

“시뮬라크르는 단순히 하나의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복사물의 개념 그리고 모델의 개념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들뢰즈가 플라톤을 대신하여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 혹은 ‘사물의 권위’의 상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플라톤이 우려하고 벤야민이 환호한 대로, 복사물의 존재는 그것이 복제하고 있는 원작에까지도 존재론적 영향을 끼친다. “일회성과 지속성”을 갖는 사물의 세계가 서서히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로 변해가는 것, 그리하여 도처에서 “사물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전통과 뿌리를 상실하고 부유하는 ‘현대’의 시대적 징후다.

이 징후가 벤야민에게는 기술의 진보로 실현된 민주주의 문화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문화보수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몰락의 징후일 뿐이었다. 시뮬라크르는 그저 예술만의 현상도 아니고, 지각만의 문제도 아니다. 어느새 그것은 우리의 생활세계 전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회성과 지속성”을 갖는 장인적 공예를 “일시성과 반복성”을 갖는 기성품의 대량생산으로 바꾸어 놓는다. 뒤샹은 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를 예술에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하에서 유일하게 유일물을 생산하던 예술가의 장인적 창작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리하여 또 다시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은 사물의 권위다.”

기호

줄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기호학이 가진 두 가지 모순되는 측면에 대해 언급한다. 한편으로 그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결합으로 규정한다. 이때 한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물론 초월적 기의의 의식내적 ‘현전’일 것이다. 여기서 소쉬르는 근대의 형이상학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소쉬르는 ‘기호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다른 기호와의 대립 속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경우 그 기호에 의미를 주는 것은 ‘현전’이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차이’일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의 형이상학자 소쉬르는 돌연 탈근대적인 차이의 철학자로 나타난다.

낱말의 의미가 ‘차이’에 있다면, 설사 ‘현전’의 체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눈앞에 ‘현전’하는 그 ‘기의’는 더 이상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구조화된 언어 ‘내재적’ 현상일 것이다. ‘내재적 기의’란 결국 또 하나의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새로운 기표의 의미는 다시 또 다른 ‘내재적 기의’, 즉 또 하나의 기표에 의존한다. 기표의 밖으로의 초월의 도약은 불가능하다. 기표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의가 결국 또 다른 기표에 불과하다면, ‘기표+기의’라는 기호의 정의 자체가 위험해진다. 그리하여 데리다는 지붕에 올라간 후 사다리를 치워버려야 했던 어느 철학자처럼 어느 단계에선가 ‘기호’의 개념을 버릴 것을 제안한다.

현전의 형이상학의 붕괴는 이미 현대예술에서 재현의 붕괴로 예고되었다. 회화의 이념도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규정되는 것이라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근대회화는 ‘환영주의’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회화는 가시적 세계의 시각적 재현이며, 그것의 진리성은 원본과의 일치에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외부 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순수한 형태와 색채의 유희가 된다. 추상회화는 더 이상 사물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그 닮음을 통해 그림 밖의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이기를 포기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된다. 현대회화가 지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기호란 정의상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대리하는(‘stand for’) 것이다. 그러나 기호가 대리하는 것이 결국 또 다른 기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호가 아닐 것이다. 기호가 아닌 기호,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기호의 예를 우리는 재현을 포기하고 대상성을 상실한 현대회화의 자기지시성(referentiality)에서 찾을 수 있다. 읽을 수 없는 문자의 모양을 한 앙리 미쇼의 작품은, 현전을 포기하고 초월을 지시하지 않는 기호, 기호 아닌 기호의 예술적 엠블렘이다. 칼리그람이 아닌 칼리그람은 말로 지시를 하지도 않으며 현전을 보여주지도 않는, 순수한 기표의 유희다. 현대회화는 기호를 흉내낸 기호, 즉 시뮬라크르다. 그리하여 오늘날 위험한 상태에 놓인 것은 기호의 권위다.

흔적

‘재현’의 에피스테메 근거한 근대의 환영주의 예술을 포기한 후 현대의 예술가들의 창작은 중세의 장인의 그것을 닮아간다. ‘아직’ 사물과 기호가 두 개의 존재질서로 나뉘어 재현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던 중세에, 장인들은 가시적 대상의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창작을 무엇보다도 ‘재료의 처리’로 이해했고, 이는 ‘이미’ 근대의 환영주의를 포기한 현대예술가들의 창작원리로 부활한다. 중세의 필사본의 미니어처, 중세 성당 안의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가 현대예술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형태와 색채가 가시적 대상과의 닮음을 창조하는 데에 복무할 필요성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기표들 역시 초월을 지시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는 시뮬라크르다.

볼프강 벨쉬에 따르면 데리다는 자기의 사상을 구축하는 시기에 현대의 추상예술, 특히 당시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앵포르멜’이란 굳이 분류하자면 추상표현주의 계열에 속하나, 미국에서 발생한 ‘액션페인팅’과 달리 그리기의 행위성이 아니라 그 행위가 남긴 자취에 주목을 한다. 가령 물감을 칠한 인체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는 이브 클라인의 퍼포먼스를 생각해 보라. 미술은 이렇게 더 이상 가시적 대상을 ‘현전’시키지 않는다. 다만 우리 눈앞에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데리다의 사상과의 친연성은 명백하다. 데리다에게 의미란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초월을 포기한 시뮬라크르들 무한연쇄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흔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앵포르멜에서는 초기 추상과는 달리 ‘형태'(form)마저 해체된다. 중세의 장인들의 창작은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주는 것이었다. 그 바탕에는 물론 기독교적으로 재해석된 플라톤주의가 깔려있었다. 마찬가지로 재료에 기하학적 형태를 준 초기 추상화가들, 가령 몬드리안의 작품은 비록 가시적 대상의 재현을 포기했으나 재현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감각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의 비가시적 본질을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플라톤적이다. 하지만 앵포르멜은 다르다. 그것은 ‘형태’마저 해체시킨다. 그리고 ‘마티에르’의 질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기서 재료는 형태로 관념화하지 않고 물질로 남는다. 데리다의 시니피앙 역시 소쉬르의 그것처럼 의식내적 현상으로 관념화하여 초월적 기의로 승화하지 않고 물질로 남는다.

상사

칼리그람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위한 엠블렘이다. 칼리그람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통해 이중으로 의미를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된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칼리그람은 다르다. 그것은 외려 현전을 파괴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토대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연작의 두 번 째 버전은, 그 어떤 것도 작품의 최종적 해석임을 주장하지 않는 여러 개의 시뮬라크르(“일곱개의 봉인”)로 해체된다. 여기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의 일의적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마그리트는 유사(ressemblance)와 상사(similitude)를 분리해 내고, 후자로 하여금 전자에 반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유사’에게는 주인이 있다. 근원이 되는 요소가 그것으로서, 그로부터 출발하여 연속적으로 복제가 가능하게 되는데, 그 사본들은 근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약화됨으로써, 그 근원요소를 중심으로 질서가 세워지고 위계화된다. 유사하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비슷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퍼져나가는 계열선을 따라 전개된다 (S.72)

마그리트의 작품에는 3차원 공간의 환영이 있다. 그리고 그 안의 대상들은 일러스트레이션을 연상시킬 정도로 정확한 자연주의적 묘사로 재현되어 있어, 현실의 사물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닮음을 통해 지시를 하려고 했던 근대의 환영주의 회화에서와는 달리 마그리트에게서 유사성은 더 이상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의 칼리그람에서 ‘닮음’은 현실의 대상을 지시하는 데에 늘 실패한다. 가방은 ‘하늘’이 되고, 주머니칼은 ‘새’가 되고, 나뭇잎은 탁자가 된다. 스폰지는 ‘스폰지’가 되기도 하나, 이 현전은 한갓 우연으로 나타난다.

유사는 재현에 쓰이며, 재현은 유사를 지배한다. 상사는 반복에 쓰이며, 반복은 상사의 길을 따라 달린다. 유사는 전범에 따라 정돈되면서, 또한 그 전범을 다시 이끌고 가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을 떠맡는다. 상사는 비슷한 것으로의 한없고 가역적인 관계로서의 시물라크르를 순환시킨다 (S.73)

그의 작품에 ‘닮음’이 있다면, 그것은 원본과의 유사성이 아니다. 원본이 없는 복제, 굳이 원본과의 일치를 전제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들 사이의 서로 닮음, 즉 상사일 뿐이다. 그의 그림은 원본과의 동일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림의 의미는 탈동일화한다. 조형 요소의 의미는 소쉬르가 말하듯이 기표와 기의의 통일, 즉 현전이 아니라, 시물라크르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의 놀이 속에서 다양하게 무한히 전개된다.

이 전사술 덕분에 우리는 유사에 대한 상사의 우위를 알게 되었다. 유사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을 재인식하게 하지만, 상사는 알아볼 수 있는 대상, 친숙한 실루엣이 감추어 못 보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보게 한다. 유사는 유일한, 언제나 똑같은 단언을 내포한다. ‘이것, 그것, 또 저것. 그것은 저것이다.’ 상사는 함께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겹치는 상이한 단언들을 (여러 겹으로) 배가시킨다. (S.76)

이 차이의 놀이를 통해 의미는 열려진다. 그리고 한번 열려진 의미는 이제 생산적, 창조적 역할을 발휘한다. 그것은 서로 춤추고 서로 의지하며 서로 포개짐으로써 단언의 의미를 다변화한다. 나뭇잎에는 나무가 들어 있고, 새의 형상이 들어 있다. 하늘은 비둘기 모양의 바다를 담고 있고, 맥주병은 자라나 당근이 된다. 유사성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우리의 지각을 고정시켜 ‘나뭇잎은 나뭇잎’이라는 동어반복의 진부한 진리를 말한다. 반면 상사의 놀이는 친숙한 사물의 질서가 가리는 세계의 측면을 우리에게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 유사성의 재현은 우리에게 가시적인 대상을 보여주지만, 상사성의 유희는 우리로 하여금 보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여기에는 모종의 해방의 즐거움이 있다.

언젠가 이미지 그 자체와 그것이 달고 있는 이름이 함께 길다란 계열선을 따라 무한히 이동하는 상사에 의해 탈동일화되는 날이 올 것이다. 캠벨, 캠벨, 캠벨. (S.89)

숭고

“텍스트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명제는 기호의 밖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세계, 기호의 체계로 구조화되지 않은 세계, 그 어떤 형이상학으로도 해석되지 않은 세계의 체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결국 실재론과 관념론의 안티노미라는 의식철학의 낡은 패러다임이 오늘날 언어학적 전회를 거쳐 기호학적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인식을 현상세계로 제한했듯이, 탈근대의 기호학은 유의미한 언표가 이루어지는 세계의 한계를 시뮬라크르의 현상계로 제한한다. 칸트에게 현상계 밖에 비록 언표될 수는 없으나 물 자체가 존재해야 했듯이, 시뮬라크르의 저편(dehors)에는 언표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곳은 숭고의 영역이다.

료타르는 재현을 포기한 현대회화를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 부른다. 숭고의 묘사에는 간접적 방식과 직접적 방식이 있다. 숭고의 간접적 묘사의 예를 우리는 낭만주의 화가들의 자연숭고의 묘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숭고의 부정적 묘사의 예는 헤브라이의 신의 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야훼는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듯이, 현대의 예술은 가시적 대상의 모방을 스스로 포기했다. 20세기에 들어와 회화는 재현을 포기하고, 음악은 조성을 파괴하고, 시는 의미를 포기하고, 연극은 부조리해졌다. 료타르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실은 숭고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 그림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언어적 묘사와 회화적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19세기까지 회화의 이상은 ‘아름다운 가상’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세기의 회화는 ‘아름다움’도 포기하고, ‘가상’으로서의 성격도 포기했다. 그 결과 현대예술은 ‘숭고’의 미학을 따르게 되었다. 료타르는 그 대표적인 예로 버넷 뉴먼의 작품을 든다. 시뮬라크르는 모든 숭고한 것의 아우라를 파괴한다면, 커다라 색면의 병렬로 이루어진 뉴먼의 작품은 그와는 정반대의 체험을 매개하려 한다. “Sublime now”라는 그의 논문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작품이 매개하는 것은 ‘숭고’라는 아우라의 체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앤디 워홀과 버넷 뉴먼의 작품세계는 하나의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인지도 모른다. 워홀의 시뮬라크르의 뉴먼의 숭고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낡은 관념론과 실재론의 대립인지도 모른다.

현시

홉스와 데카르트는 낱말의 혼용을 막는 것을 철학의 임무로 생각했다.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근대 형이상학의 강박관념은 한 낱말에 단 하나의 의미만을 대응시키려고 한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이상언어의 기획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오늘날의 철학을 지배하는 것은 이와는 전혀 다른 충동인 것 같다. 데리다는 고호의 <구두>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마이어 샤피로와 하이덱거를 함께 비판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사람이 모두 작품의 최종적 의미를 고정하려고 한다는 데에서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초월의 희망을 포기한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기호작용을 원본과 닮을 의무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결과 세계는 시뮬라크르의 유희가 된다.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닮음을 전제하지 않기에, 담론은 참, 거짓의 인식론적 기준 대신에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는 창조성이라는 미적 기준을 따라 전개된다.

오늘날 진리는 인식론적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예술적 현시(presentation)로 존재한다. 현전의 포기라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의 멜랑콜리가 창조의 기쁨이라는 미적 낙관주의로 전화했다. 탈근대 철학자들의 글이 문학을 닮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푸코의 계보학적 연구는 원본적 재현(representation originaire)이라는 아르토의 잔혹극을 연상시킨다. <쾌락의 활용>에서는 윤리까지 미학화하려 한다. 데리다의 글쓰기가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토대로 감각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로티는 “구원적 진리” 대한 신학적 열망 대신에 “문학적 문화”를 갖자고 주장한다. 볼프강 벨쉬는 아예 탈근대의 철학이 “현대예술의 정신에서 탄생”했다고 말한다. 탈근대 문화의 유미주의적 경향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담론의 생산에서 창조적 포텐셜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적 창조의 기쁨에 들뜨기 앞서 먼저 이 모든 미적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두 가지 현상에 대해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날로 가속화하는 시뮬라크르화에 대한 가치평가, 다른 한편으로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파괴한 해체주의의 언어철학적 정당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언어는 세계를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세계 속에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게임과 맞물려 돌아가는 실천의 차원을 배제한 언어철학은 기호학적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이 실천의 차원이 프랑스의 기호학에서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데리다는 과연 언제 비트겐슈타인의 해체에 착수할 것인가?

참고문헌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in: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자끄 데리다,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 in: ‘입장들’ (박성창 편역) 솔 출판사 1992  
           V rit  en peinture, Paris 1978
장 프랑수아 료타르, <숭엄과 아방가르드> in :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외) 민음사 1999        
미셸 푸코, ‘이것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역) 민음사 1998
        ‘성의 역사 II-쾌락의 활용’ (문경자 외) 나남 1999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역) 민음사 1995
       , <플라톤과 시뮬라크르> in : ‘의미의 논리'(이정우 역) 한길사 1999
Wolfgang Welsch, in: ‘ sthetisches Denken’ Stuttgart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