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상자료원 개관영화제에서 상영하게 된 ‘나의 사랑, 나의 영화’를 봤다.
(명박이 쇠고기 수입, 공기업 민영화 등등에 대한 걱정은 어떡하고…? ㅡ.ㅡ;)
예매율이 저조해 일종의 관객 동원을 당한 셈인데 사실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에 대한 한국 영화감독들의 오마주를 기획한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국’ 영화라는 것에 대해 나는 무심한 편이다. 위대한 영화는 있어도 위대한 한국영화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지역적 특수성과 그것의 연속성은 고려해야 하겠지.)
이 영화는 열다섯 명의 감독들이 각자 특정 감독, 작품들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첫번째 시도가 의미 있고 각별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전반적으로 성글고 더 많은 회고와 말들이 필요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게스트로 초대된 (아마도) 이두용 감독의 말처럼 언급되어야 할 더 많은 감독들이 있었을 게다.
다른 얘기는 차치하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라기보다는 그 후에)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내 느낌이 과장되지 않았다면) 우리 세대에게 90년대 이전의 영화는 지루하고 촌스러운 암흑으로 느껴지는가.
그리고 왜 이 노감독들이 지금은 더이상 영화를 찍지 않는가(또는 못하는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관객과의 대화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자니 초대된 노감독들의 말들에서 ‘검열’과 ‘리얼리즘’이라는 단어가 잔상처럼 머리 속에 남았다.
우리 또래에게 한국영화가 90년대부터 기억되는 것도, 90년대 이전 감독들이 최근 거의 영화를 찍지 못하는 것도 공히 검열이라는 상상력의 거세에 원인이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
그런데 이것이 당대, 그리고 후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거대한 단절을 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다.
한 관객의 당시 검열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대한 질문이 이유일 수도 있었겠지만, 초대된 이두용, 이장호, 배창호 감독의 입에서 나온 검열이라는 말은 어떤 무게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장호 감독은 리얼리즘을 얘기하기도 했다.
우리 일상에서 쓰는 만큼만의 욕이 표현되는 영화가 그 이상(또는 반대로 전혀 쓰이지 않는 경우도 해당되겠지만)이 표현되는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라는 농 섞인 말은 리얼리즘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검열의 시대에 투쟁하는 무기로, 이데올로기로 당대의 감독들은 리얼리즘을 택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리얼리즘은 거세된 상태로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당대의 영화는 검열의 추격을 따돌리거나 붙잡히는 일종의 검열과의 게임을 통해 성립 가능한 것이었고, 관객 또한 이 내부에 기입돼 있는 검열의 룰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지 않을까?
그리고 이 게임의 룰을 90년대 이후의 관객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표피의 남루함만 보이고, 이 게임의 룰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당대의 감독들은 지금 영화를 만들기가 어려운 것은 아닐까?
(정치권력의 사회 통제를 위한) 검열의 시대와 이후 시대로 단절해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다고 봐야 할까?)
그렇다면 역시 과거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온전히 미학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혹시 검열과 같은 사회적 통제가 영화에 미치는 영향, 영화의 검열에 대한 수용과 위반을 미학적 수준에서 다룰 수는 없을까?
물론 단상에 불과하고 내게 답은 없지만 말이다.

어제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 개관기념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개막작, ‘청춘의 십자로’를 봤다.
이 영화는 1934년 작품이다.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보유 중인 최고의 필름, 그래서 공식적인 한국 최고의 영화 필름이다.
발성영화로 이행하기 조금 전, 그러니까 한국 무성영화 시대의 끄트머리 쯤에 만들어진 이 작품이 이번에 변사, 악단, 가수와 함께 함으로써 온전히 부활한 느낌이다.
영화의 처음은 변사 조희봉이 무대 위 놓여 있던 카메라를 들고 객석과 자신을 번갈아 비추는 것으로 시작했다.
무대 위 변사와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로 연결된 실시간 영상의 스크린이 교차하더니 변사가 스크린 가장자리 막 속으로 들어가, 이제는 스크린 안에서 다소곳한 무성영화 풍 여배우와 짤막한 상황을 연출하더니 다시 무대로 튀어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이걸 공연 이틀 전에 떠올려 밤새 찍고 준비했다는데 김태용 감독은 아마 이 생각을 떠올린 순간 이미 만족감으로 흥분했을 것이다.
(물론 보는 나 또한 흥분되었다. 이제 들어가는구나 하는.)
과거로 진입하는 스타 게이트로 카메라와 스크린을 직접 이용했을 뿐 아니라, 실제 당시 무성영화 상영 때에는 가수나 만담꾼 등이 영화 시작 전, 상영 중 필름 릴 교체 시간, 영화 마지막 등에 나와 공연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당시 영화 상영의 관습 또한 재현해 냈기 때문이다.
영화가 카메라와 스크린에서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 김태용은 프루스트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영화 자체도 흥미로웠다.
물론 서울역 주변을 오가는 수많은 자동차, 바가 있는 술집, 다방, 엘리베이터, 심지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모던 보이, 모던 걸, 가스 걸(가스 스테이션, 그러니까 주유소 종업원), 악덕 사채 자본가까지 당시 조선의 근대화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진전돼 있었고 심지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도 들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도 언급해야겠지만, 이보다 영화 자체가 보여주는 형식미가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을 길러 가는 영복을 트래킹으로 따라가는 장면 – 덜컹거리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화면은 잘 계산된 구도를 유지하며 움직인다. 이런 트래킹 숏이 이 영화에는 많이 쓰였다.
개철과 계순의 거울 대화 장면 – 단순히 둘의 대화를 숏-반응숏으로 쪼개지 않고 거울을 활용했다는 뻔한 참신함 말고도 이 장면은 흥미롭다. 거울이 형성하는 프레임은 개철의 음흉한 계략이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계순이 포위된 듯 놓여 있고, 개철이 이 앞에서 스크린을 등지고 얘기하다 이 공간으로 들어간다.
농락당한 영옥과 계순을 보고 분노의 화신이 된 영복의 정면 트래킹 숏 – 영복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뻔하지만) 셔츠 앞 가슴을 약간 드러내낸 채 바로 앞을 응시하며 낫을 들고 달려온다. 화면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영복의 분노에 찬 얼굴을 적절한 거리를 두고 물러나는 미디엄 숏은 표현주의적이다.
그리고 영옥(김연실)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가 담배 피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눈빛과 담배 연기는 화면을 직시하는 듯 당당하고 시각을 뿌옇게 만들 정도로 퇴폐적이기까지 했다.
김연실이 당시 스타 배우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 장면이 고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희봉의 변사 역할은 처음이라 그런지 화면과 몇 번의 공백을 보였지만 그의 톤은 과거스러웠고 몇 번의 현대적 멘트(예를 들어 “이거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거에요” 같은)는 관객을 여러 번 소리 내 웃게 만들었다. 호응이 좋아 몇 번 더 이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면 화면과의 어긋남은 줄어들 것이고 즉흥 멘트는 더 기발해질 것이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연극적인 몸짓과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이제 그만 쓰고 싶지만) 음악과 노래도 괜찮다. 뮤지컬스럽지만 당대 음악스럽게 잘 어울린다. 따로 들어도 나쁘지 않아 일회성으로 쓰기에는 조금 아깝다.

아무튼 여러 모로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을 것 같다.
한국영화는 영화사적 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데(영상자료원에서 낸 몇 개의 한국영화사 책을 대충 읽은 느낌으로는 영화사적 과거라기보다 영화 사회학적 과거에 가까웠다) 이런 영화에 영화사적 이름을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