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배달부 키키>

1. 내가 키키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제목만 들어 온 <마녀 배달부 키키> 비디오 테입을 학교 어학실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침묵이 흐르는 어학실 안에서 흥분한 입을 애써 막아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드디어 보는구나.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그 테입은 한국어 더빙도 자막도 없는 일본판이었다. 그 때는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문 경험을 했을테지만 그림만으로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동안 키키는 내게 미지의 사연을 간직한 아이로 남았다. 개인사를 끄집어 낸 것은 키키와의 완벽한 첫만남이 무산된 것이 여전히 아쉽기 때문이다. 그 때 키키의 이야기를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면 나는 키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서울에 홀로 던져진 스무 살의 내가 달리 구하지 못했던 위로와 용기를 여기서 얻지는 않았을까.

2. 열 세 살에 독립해 낯선 바닷마을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키키를 나는 이제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도 여전히 키키처럼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만들고 세상에서 내가 해 낼 몫을 찾는 데 노심초사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 받거나 낙담하고 두려움에 휩싸여도 삶은 이 과정을 매번 되풀이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키키가 바닷마을에 도착하고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노라면 그 감정이 또렷하게 와 닿아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예감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내가 익숙해지지 못한 문제라는 생각에 빠진다.

3. 내가 키키의 낙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으로부터 발현되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노부인의 의뢰로 그의 손녀에게 청어 파이를 배달하면서 직감적으로 갖게 되는 손녀에 대한 적대감은 손녀의 불친절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키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적대하며 존재할 수 없다. 키키의 마법 능력은 선의를 잃는 순간 상실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자기 존재의 본질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마녀로 규정하는 한 그는 적대를 마주하고서도 삶을 의지로 낙관하고야 말 것이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의 쾌감은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원초적이고 불가능한 환상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는 징표가 비행 장면에 새겨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에서 나는 것의 쾌감과 실감은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찰랑이는 머릿결과 옷깃이 창공을 날면서 부딪치는 공기 저항의 촉각을 시각화한다. 모든 프레임을 손으로 하나 하나 그려 내야 하는 고된 셀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종일관 생략하지 않고 공 들여 묘사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인물을 감싸고 도는 공기, 바람이다. 필모그래피에 ‘바람’이 들어가는 제목이 두 작품 있을 정도로 하야오는 바람을 사랑한다. 바닷마을의 계단 꼭대기 또는 수풀 우거진 언덕 위에서 하늘거리는 키키의 단발 머리로부터 바람을 생경하게 감각하다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계를 낙관하는 근거는 우리가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나면 세상에서 선의는 드물고 항구적이지 않다고 여기게 된 내가 사실은 세계를 감각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레이닝 스톤>

밥은 어린 딸 콜린의 첫 성찬식 드레스 만큼은 빌려 입히고 싶지 않았다. 밥은 다가오는 성찬식이 콜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생각한다. 콜린이 어떻게 여기든 밥의 마음은 그렇다. 그 날 콜린은 밥의 마음에 흡족한 새 드레스를 입고 제단에 올라야 한다. 실은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살 100파운드 남짓이 밥에게는 없다. 요금을 내지 못해 전화도 끊길 만큼 형편이 어려운 밥은 지금 실직자다. 그런 밥에게 콜린에게 입힐 새 드레스는 사치스러워서 허영에 가깝다. 그래도 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새 드레스를 살 돈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레이닝 스톤>을 움직이는 감정적 힘은 밥의 고집이다. 나는 신념이 아니라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밥은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종교 의식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성찬식의 새 드레스는 딸 콜린이나 아내 앤이 아니라 밥의 의지다. 밥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그 고집이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빈곤의 고난을 가중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 타당하게 설명할 이론이 밥에게는 없다. 차라리 밥은 가부장의 권위와 종교적 의지라는 텅 빈 고집을 밀어붙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종교적 신념과 가족의 생계를 모두 책임 지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고군분투로 정리하고 싶은 유혹에 대해 스스로 이렇게 반문한다. 밥은 왜 콜린의 성찬식 새 드레스를 고집하는가. 그는 무엇에 대항하여 그것을 고집하는가. 콜린의 새 드레스가 고집해야 할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이었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드레스 한 벌을 두고 밥은 자신의 가난과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가부장제와 종교라는 밥의 이데올로기적 고집이 빈곤 앞에서 세상과 불화하는 방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이 영화에서는 빈곤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도덕률과 불화하는 다양한 양태를 지켜볼 수 있다. 밥과 이웃집 친구 토미는 방목하는 양과 보수당 당사 앞 잔디를 훔치며, 토미의 딸 트레이시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그들은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할 것이다. 건너 집 가난한 30대 여성은 절도 행위로 검거된 후 세 아이를 두고 목숨을 끊는다. 밥은 사채업자의 협박에 저항하다 살인 사건에 휘말리며, 밥을 도우려는 신부는 그가 사채업자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논쟁적인 상황은 시종일관 빈곤을 향하고 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빈곤은 도덕에 선행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빈곤은 이데올로기의 텅 빈 실체를 드러낼 뿐이며, 노동은 신성하다는 좌파적 이데올로기도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 트레이시가 쥐어 준 용돈을 손에 구겨 넣고 혼자 서럽게 흐느끼는 토미에게 나는 가부장제적 맥락에서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찬식에서 밥의 비밀을 숨긴 신부가 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빵 조각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가련한 밥을 종교적 맥락 안에서 안타까워 하는 감정을 키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적 현실과 일으키는 긴장은 빈곤에 처한 삶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경유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모순은 중층 결정된다는 오래된 정식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것처럼.

사채업자가 예고 없이 밥과 앤의 집에 들이닥쳐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콜린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사채업자가 테이블을 쓸어 버리며 앤을 윽박지르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딸 콜린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그것은 상상할 법한 것이라기보다 현실에서 있을 법한 얼굴이다. 이 자본주의적 트라우마를 담을 감정이 아직 콜린에게는 없다. 두려움에 떨거나 폭력에 분노하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몫이다. 그 순간 콜린은 빈곤이 야기하는 사회적 효과가 어떤 것인지를 텅 빈 감정으로 관찰한다. 황급히 돌아온 아빠 밥에게 사채업자가 엄마의 결혼 반지를 빼앗아 갔다고 전하는 콜린의 목소리는 침착하다. 이처럼 담담한 콜린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텅 빈 목격자에게 세계의 진실이 폭로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제 콜린에게 세계의 진면목은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아니라 앤이 살피는 신문 모퉁이의 구인 광고나 밥이 사채업자에게 진 빚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레이닝 스톤>은 밥과 토미,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구원할 수 없다. 성찬식이 끝난 후로도 그들 앞에는 새로운 고난이 기다릴 것이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실직 노동자가 처한 빈곤의 비참은 밥의 장인이 전하는 구호 이상의 문제이며, 밥의 비참이 긴급한 데 비해 세계는 강고하게 모순적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세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해 내는 성취일 것이다. 차를 잃고 난망해 하는 밥과 토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거리를 서성이는 펍의 이웃 같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세계에 표방하는 유일한 낙관일 것이다.

영화와 예술이 인간 세계를 향해 말을 거는 매혹적인 타자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매혹성에 집중하게 된다. 분명 어떤 작품은 발굴해야 할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것처럼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레이닝 스톤>을 비롯한 켄 로치의 영화들은 그런 태도와 거리가 멀다. 숏과 숏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작업으로는 언제나 부족한 시도로 보인다. 그의 영화는 오히려 미적 존재감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작품이 애쓰는 것은 지금 이 세계에 필요한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구체적 삶을 이해하고 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을 꺼내고 있는가에 관심을 쏟는다는 점에서 켄 로치의 영화는 존재의 고유성을 다루는 예술의 세계에서 별나게 고유한 존재다. 켄 로치에게 영화적 순간은 미학적 고유성을 증명하는 순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인다면 절제된 미학이 사회적 진실과 만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레이닝 스톤>에서 콜린의 눈빛이 실업과 빈곤이 야기하는 메마른 상처의 실체를 드러내듯이 말이다. 그것이 놀랍고 존경스럽다고 지금껏 생각해 왔다. <레이닝 스톤>을 만난 이후부터 나는 줄곧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특집] 계급과 투표의 고차방정식
 
 
[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18:30:21
엄기호  info@ilemonde.com
 
 
속물주의, 탈정치화 아닌 정치적 계몽의 산물

좌파 언어 탁월해져야 세대의 계급화 가능
 
 세대는 계급을 대체했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 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이 주도했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됐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의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초고속열차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비타협적 시위를 주도한 것도 ‘80년후’ 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세대는 저절로 투표하지 않아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 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 청년 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대에 대한 고전적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 간의 적대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가치’라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속물인가, 속물이 돼야만 하는가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 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했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 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다. 1972년 11월 5일 영국 버밍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유색인종 청소년 3명이  백인 노동자 1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언론에서 ‘강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졌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였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즐기는 청소년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장악한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 20대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과 뒤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다. 희망은 이 20대가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가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대와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 대한 이진우의 발문 19~2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