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촛불집회 사진.
5월 31일 나는 대학로 – 광화문 – 서대문 – 사직터널 – 삼청각의 경로로 일행을 따라 다녔고 다음날 새벽 처음으로 물대포를 봤다.

낮 12시쯤 대학로 주변 골목길을 산책하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대학생들의 집회에 참석한 후 일행을 따라 시청 광장으로 행진.
시청 광장부터 광화문까지 그 일대를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청운동에 일부 촛불집회 참여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에 흥분한 시민들이 청운동과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 시작.
나는 이 때 가장 후미에 있었고 그 위치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행진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 중앙일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
중앙일보 사옥 근방에서 나는 얼떨결에 가장 선두에 있게 됐는데, 이 때 깃발을 든 일행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리기 시작.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 달리기가 서대문 – 사직터널 – 경희궁의 아침을 지나 다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았다.
독립문 근처에서부터 전경들과 몇 미터 사이에 두고 추격전이 벌어졌고 순간적으로 여러 갈래로 흩어진 시위대는 당황한 경찰을 따돌리고 다시 광화문으로 집결.
상황은 이미 청운동, 삼청각, 효자동 세 지점까지 시위대가 진출하는 데 이르렀고 각 지점에서 청와대까지 진출하려는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하게 됐다.
나는 삼청각 지점에 있었는데 또 얼떨결에 떠밀려 대치점 바로 앞에 섰다.
(전방에서 물러 나오는 여성들이 바로 내 앞에서 흥분하며 남자들이 뭐 하냐고, 앞에 나가 저 전경들 좀 밀어 보라고 질책하기에 나는 전방 투입을 거부할 수 없었다 ㅠ.ㅠ)
나름대로 전경들을 있는 힘껏 밀어 보려 했던 나는 오히려 시민과 전경 사이에 끼어 압사 당할 위기까지 몰려서야 잠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바로 그 때 물대포가 발사되기 시작, 바로 앞에 있던 나는 오히려 다행히 물대포를 맞지는 않았고 경복궁 입구 쪽에서 만화책을 태워 손발을 말리는 일행들의 농담 따먹기를 관전하며 즐거워 했다.
잠시 후 소식을 듣고 찾아 온 사진동호회 친구와 형을 맞으러 뒤로 물러났을 때 나는 놀랐다.
대치 국면의 전방은 그토록 치열했지만 후방은 토론하고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연인들이 평화로운 해방구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필름이 떨어져 그 장면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이 후회된다.)
새벽 다섯 시 경까지 동호회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체력이 소진한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그 때쯤 결찰이 강제 진압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많은 가능성이 있었고 흥분하고 감동적이었지만 그만큼 한계도 많았던 시간.
(마지막 사진 세 개는 2008년 6월 10일)


(순서대로) α-7, Ilford Delta 100, APX 400, Proimage 100 / T2, Porta 160VC

이번 촛불집회가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데는 수많은 중고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5월 2일 처음 촛불집회에 가 봤을 때 나는 놀랐다.
주위에 다 중고등학생, 특히 여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은 그 어떤 정치적 조직도 없이 자발적으로 청계천에 모여들어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 가능성에 대해 규탄했다.
그것도 아주 발랄하게.
이들만큼 자발적이고 단순명쾌한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먼저 보여 준 이들은 없다.
그런 면에서 이 학생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주체적이다.
엄격한 통제하에 비인간적 경쟁과 수동성을 강요받는 최악의 환경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학생들은 여전히 시민 주체와 다른 존재로 취급받는다.
오마이뉴스나 프레시안 같은 인터넷 언론에서조차 이들은 ‘시민과 학생’이라는 표현으로 구별된다.
그들은 아직도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된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결합하면서 사회 최소 단위인 가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식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이들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이들은 성숙한 시민 이전 단계에 있는 존재, 판단이 어떤 순간에도 승인받지 못하는 존재, 즉 주체가 아닌 존재로도 규정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시민사회의 규범을 익혀 나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증명하고 실천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근대적인 관념이 그들을 억압하는 이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촛불집회의 어떤 상승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학생들의 주체적인 판단과 실천마저 구분지어 보게 해서는 안된다.
투표권이 문제인가?
이 상황에서 투표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이 떳떳할 것은 눈꼽만큼도 없다.
시민들의 투표권이 보인 과오로 이 학생들이 시민들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학생들의 촛불집회를 시민들의 그것과 구분짓는 것은 부당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구성원을 시민과 학생으로 구분짓는 것은 부당하다.
시민들 속에 노동자, 학생, 자영업자, 농민, 공무원 등등이 있는 것이다.
괜히 말꼬투리 잡는 것 같지만 이들 학생들이 제 몫의 인정을 과연 제대로 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끄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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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학생은 얼굴을 밝혀서는 안되는 슬픈 주체다(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