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이 당신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 그리고…….]남자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걸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그가 내민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으나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었다.
단희는 손을 내밀어 유리병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밀봉된 필름을 벗겨냈다. 뚜껑을 열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유리병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남자는 단희에게서 유리병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넘겨주는 순간 단희가 심하게 손을 떨었고 병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엎질러지고 말았다.
단희는 그 즉시 방을 채우는 어떤 입자들을 느꼈다. 입자들은 일렁였고 공기 중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단희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양말이 사막 구석에서 모자를 쓰고 발견되었다…….’]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숨그림자>, 김초엽
[태그:] 기억
기억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최은영, 밝은 밤
주검이 담긴 상자
<작은 빛>
예술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청중과 관객 앞에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일회적 순간을 딛고 예술은 오직 현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서 관객과 만나는 현재적 순간이 아니라면 영화를 이루는 다른 것은 그저 셀룰로이드 필름과 그 밖의 것처럼 사물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 영화가 사물 이상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환상도 기억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작은 빛>에서 진무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를 뇌수술을 앞두고 훗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든다. 카메라에 담길 영상은 진무가 잃어버릴 기억의 보충물이다. 진무는 자신이 일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 과정을 제외하고는 흩어진 가족을 만나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카메라 중 영화의 카메라는 진무와 그의 가족에게 벌어지는 변화를, 진무의 카메라는 흩어진 가족에게 한 데 모여 산 과거를, 그리고 말미에 등장하는 진무 아버지의 카메라는 이 가족에게 공통으로 새겨진 기억의 환상적 층위를 현재화한다.
진무는 기억의 누수를 막을 제방인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는 진무의 가족을 다시 모으기 위해 움직인다. 진무가 자신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결핍의 장소가 가족에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운동이다. 어머니 숙녀는 정선에, 누나 현은 시흥에, 그리고 형 정도는 부천에, 뿔뿔이 흩어져 한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 온 것 같은 이들을 진무가 방문하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오랜 폭력이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일견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외상적 기억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충격적으로 제시되는 무덤 속 아버지의 부패한 주검은 이 가족의 상처를 체현하는 끔찍한 물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이 장면을 향해 달려 왔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유일하게 스펙터클한 이 장면은 아버지에 대한 진무 가족의 원망과 증오라는 오랫동안 억압된 감정을 응축하고 있다. 영화는 가족들로 하여금 서로 함께 지낼 수 없도록 만드는 실체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것은 아버지의 주검 뿐만 아니라 가족 각자를 고립시키는 상처에 대한 침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주검을 직접 손에 쥐는 행위를 통해 진무의 가족은 과거 아버지가 자행한 폭력이 입힌 상처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진무의 가족이 직시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가족의 삶을 상처로 지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유령에 대해 아버지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줘야만 한다. 이것이 진무 가족의 현재적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제의이다. 영화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아버지의 관에 나무 뿌리를 박아 둔다. 이장을 포기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주검을 가족이 직접 손에 쥐게 하기 위해. 이는 진무의 뇌수술을 앞두고 흩어진 가족이 재회하는 것이 너무 뻔한 서사이기 때문에, 또는 그것으로는 너무나도 미진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죽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가족을 회복한다는 목적지에 완벽하게 도착하기 위해 이뤄지는 신적 개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암시하는 가족 회복 여정의 이면은 매우 미묘하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복원을 위해 아버지를 벌하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아버지를 희구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검 장면을 이어서, 주검을 담은 상자를 든 진무와 그 뒤를 따르는 가족이 어둠에 갇힌 선산으로부터 빛이 내린 들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빛과 구도가 의미하는 태도를 따른다면 이 영화는 죽은 아버지를 제 손으로 모셔 오면서 비로소 가족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주검의 모습이라 해도 아버지의 자리가 채워짐으로써 다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 상태는 진무의 엄마 숙녀의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무야, 어제 엄마가 얘기 잘못 한 것 같다. 네가 아빠 양복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니까, 네 아빠한테 좀 고맙더라.”
누나 현은 어머니의 피를, 형 정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의붓 남매다. 정도가 숙녀, 현과 왕래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 가족이 흩어진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혼한 현과 함께 사는 조카 호선을 포함해, 아버지의 자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정도를 어머니, 누나와 잇는 가교가 되고, 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증오를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전치시키기 위해 진무가 존재한다. 진무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유일하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모두 물려 받은 진무만이 이 가족을 복구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진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다른 태도를 제공한다. 서로가 혈육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완성시켜 주는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아버지를 진무 자신을 통해 다시금 유추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진무의 뇌수술 예후가 어떠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바로 선산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맞이하는 마지막 시퀀스로 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퀀스가 기억을 잃어버린 진무의 환상인지 실제 벌어진 일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환상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칭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가족을 복원하고 싶다는 것. 어떤 위험이란 이를테면 아버지를 달리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선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에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은 이 같은 분열적 환상을 드러낸다. 진무가 어머니 집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카메라와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참 살펴 보는 이 장면은 그 시점도 알 수 없이 시퀀스 안에서 부유하는데, 이는 가족을 지배하는 외상적 기억의 실체처럼 등장한 나무 뿌리가 파고 든 아버지의 끔찍한 해골의 충격을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여느 가족처럼 평온해 보이는 사진 속 허위적 환상으로라도 덮을 수만 있다면 남은 우리 가족의 결속을 지킬 수 있을 텐데.
과묵한 적자이자 내내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적 없는 진무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어쩌면 소위 정상 가족을 욕망하는 자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빛을 향해 걸어가는 가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진무의 손에 들린 상자 속 부패한 주검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부패한 주검은 진무 가족의 무궁한 결속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