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는 1989년 2월 22일 28차 5·18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계엄군의 송암동 학살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수십 명의 공수부대원이 시민군이 숨어든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치는 순간을 말할 때 그는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인 듯 입이 막혔고 입술이 떨렸다.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에서 계엄군은 무작위로 시민군을 즉결처분했다. 최진수씨보다 한 발짝 먼저 툇마루를 넘었던 이름 모를 동료는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최진수씨는 그 순간 쓰러지는 동료의 눈을 아직도 떠올린다. 영화 <김군>은 30년이 지난 지금 그 증언을 최진수씨의 얼굴로 겹쳐 다시 잇는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 “그 친구 대신에 제가 산 거죠. 툇마루에서 먼저 발을 내딛었으면 제가 먼저 죽었을 텐데. 그 생각만 수십 년 동안 하고 있습니다.” 

영화 <김군>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상징하는 사진 이미지를 두고 벌이는 이야기의 투쟁을 그린다. 기관총을 탑재한 군용 트럭 위에서 방탄모를 눌러 쓰고 매서운 눈빛으로 뒤돌아 보는 어느 시민군의 사진에 일베와 지만원 뿐만 아니라 이 영화 역시 매혹되었다. 그 자체로 포토제닉하기도 한 이 사진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사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1980년 광주의 현장을 담은 사진은 모두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초석적 사건, 광주의 아픔과 독재에 대한 민중의 저항 등을 표상하는 상징적 힘을 지닌 매혹적 이미지다. 금남로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 군중의 얼굴 하나하나는 수업을 파하고 온 학생 김 아무개, 세탁소 문을 닫고 나눠줄 주먹밥을 챙겨 온 이 아무개의 구체적 삶이 아니라 저항하는 민중의 현현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이미지의 매혹적 면모는 종종 그것을 구성하는 구체적 이야기를 압도하거나 넘어선다. 그렇게 사진이 매혹적 이미지가 되어 가는 동안 점차 우리가 잊게 된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깨닫게 해 준다. 구체적 삶 또는 이야기의 공백, 위에 서술한 최진수씨의 증언으로도 채울 수 없는 김군의 이름 같은 것 말이다. 그 공백이 이 영화가 일베와 지만원의 대체 역사와 싸우는 전장이다. 

영화 <김군>은 사진 이미지의 매혹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구체적 개인의 삶을 구하려는 영화다. 그렇지 않다면 필름 아카이브에서 꺼낸 필름을 루페로 들여다보고 확대 사진의 은염 입자 속에서 매혹적 울림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쳐도 충분했을 것이다. 대신 일베 및 지만원이 일으킨 소동을 영화로 다루기로 마음 먹었을 때, 소동이 일어난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 나설 때부터 목표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지만원의 주장이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은 영화가 시작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시민군 본인의 증언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이미지가 지운 시민군의 얼굴과 이름을 복원한다는 목표를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세 명의 광주 시민군(이강갑, 최영철, 최진수) 극장 재회 장면은 이미지로부터 현실의 구체적 개인을 규명하고 개인이 자신의 상징화된 이미지를 성찰하게 하며 개인이 자신의 기억과 서로의 관계를 직시하도록 만드는 인위적 시공간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30여 년 간 서로를 찾지 않고 각자의 외상적 경험을 삭이며 살아 온 시민군, 특히 최진수씨의 삶을 영화가 침범하는 것은 아닐까 긴장하게 된다. 영화가 이들의 삶을 극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가 시민군의 구체적 삶 속으로 섣불리 침입한 것이 아니라 시민군이었던 이들이 이미지 뒤에서 훼손당한 이야기로부터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해 영화의 세계를 필요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영화가 시민군의 기억을 추적하며 만난 수많은 광주의 주역들이 회고하고 증언하는 과정 속에서 사진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에 맞서기 위해 자신들만의 이야기 세계가 필요함을 자각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덧붙여 시민군 사진에 대한 조롱이 지닌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베로부터 촉발되어 지만원이 공적 소동으로 만든 5·18 북한군 개입설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부정한다. 일베와 지만원은 광주의 상징적 사진 이미지를 조롱하고 그 이야기를 전복하여 대체 역사를 구성하려 한다. 물론 이는 망상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악의에 찬 조롱이 진짜로 원하는 바는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광주의 역사를 피해자의 기억으로, 민중의 주체적 저항을 타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두고 싶어 한다. 그들이 왜곡하고 조롱하는 사진이 광주에서 벌어진 피해의 기록이 아니라 무장하고 저항한 시민군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광주가 저항했다는 것을 지우고 싶은 것이다. 광주의 저 무장한 청년이 실은 남파한 북한군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확신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광주 시민이 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적 주체였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욕망에 대해서만은 확신에 차 있을 것이다. 시민군이 북한군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시민군 역시 피해자였음을 상기해야 하리라. 시민군이 피해자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주체로 동일시하지 못하고 돕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리라. 이처럼 파시즘이 죄의식을 전가하며 주체를 억압하는 전략이 여전히 이곳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영화 <김군>이 도착하는 진실 앞에서 되새겨 본다. 


<화양연화>의 마지막에 차우는 캄보디아까지 가서 앙코르와트의 벽에 난 작은 구멍에 한참을 속삭여 넣은 뒤 흙으로 구멍을 막아 버리고 굳은 얼굴로 걸어 나온다. 앙코르와트, 기나긴 시간을 머금은 채 멈추어 선 과거의 시간, 그 기억의 공간 속에 자신의 기억을 비밀히 묻어 둔다. 그러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아니고 산에, 앙코르와트에 구멍을 파고 묻는 것은 그 기억을 자신의 손마저 닿지 않는 어떤 곳에 감추어 두려는 것일 게다. 그것은 상기의 고통을 잊기 위한 인위적 망각의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을 묻어 둔다고 기억이 사라질까? 그 기억에 달라붙은 고통이 사라질까? 왕가위의 생각은 이것일 게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생각난다.” 왜냐하면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우고 감추어 두는 것은 역으로 누구도 지울 수 없게 감추어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지울 수 없도록 영원의 시간 속에 은닉해 두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각하기 위해서 잊는 것이고 잊지 않기 위해서 감추어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마시고 미련 없이 잊어 버리겠다던 황약사의 취생몽사와 다르다.
구양봉은 황약사와 헤어진 다음해 술을 찾아 취생몽사를 마시지만 예전에 살던 삶을 그대로 산다. 아무것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런 기억과 망각의 역설적 관계에 대해 명확한 개념적 통찰력을 보여 준 이는 프로이트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지워지지 않는 기억,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상처의 기억에 주목한다. 그 기억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그 상처의 시간 속으로 반복하여 불려 들어간다. ‘증상’이라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의 행동을 통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증상의 시간은 그 상처의 순간에 멈추어 있고 증상을 통해 우리는 그 멈춘 시간 속으로 불려 들어간다.
마치 “오, 이 순간이 영원하길!” 하고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상처의 무게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나아가도 다시 되돌아 온다. 증상이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반동적 힘이 드러나는 임상적 증거인 셈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그 상처의 순간, 결코 잊기 힘든 그 사건이 하나 같이 망각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결코 잊을 수 없기에 오랜 시간이 흘러도 되돌아 오는 것인데, 그것은 필경 ‘의도적 망각’이다.
그 상처가 기억나는 것이 불편하거나 힘들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잊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망각은 그 상처의 기억을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생각나지 않도록 의식이 닿지 않는 어떤 곳에 깊숙이 감추어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한다. 그렇게 감추어 두는 것은 지울 수 없고 지우고 싶지 않은 욕망 때문이다.

<삶을 위한 철학 수업>, 이진경

망각은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는, 증상으로 남겨 두려는 욕망 아닐까.

내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엠비씨 라디오에서 새벽 두 시 영화음악을 듣고 그 여운에 세 시를 넘기면 어김없이 김성호의 ‘회상’이 흘러 나왔다.

그 노래가 슬펐고 새벽의 감성에 취했었다.
어떤 청취자의 사연 있는 노래였는지 디제이가 특별히 아끼는 곡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같은 시간(아마 새벽 세 시 삼십분 경이었던 것 같다)에 꼭 틀어주는 그 곡은 새벽에 애틋함을 반복 경험케 했다.
김성호의 ‘회상’은 그래서 지금 나에게 십 년 전 감정의 기억을 소환하는 마법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지금 새벽 세 시 엠비씨 에프엠 ‘뮤직스트리트 전종환입니다’의 첫 곡은 윤건의 ‘갈색머리’다.
들을 때마다 이 노래 구매해야겠다 하면서 놓쳤던 노래.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노래를 새벽 세 시 라디오의 첫 곡으로 반복해서 들으면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 트위팅을 찾아보니 지금 내 기시감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확신하게 됐다.
그 때도 오늘처럼 이 프로그램의 첫 곡으로 갈색머리가 나왔고 나는 노래를 찾아 다운받고 정리한 후 트위터에 포스팅을 한 거다.
이제 나는 훗날 윤건의 ‘갈색머리’를 들을 때면 내 삼십대 초반의 불안과 외로움과 어떤 감정적 상태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 지금 내리고 있는 눈과 겨울의 추위도…
그러고 보면 디제이라는 직업은 이런 식으로 사람의 감정적 기억에 노래를 머물게 하는 마법사 같은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