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은 내가 벗어날 수 없는 속박과도 같은 굴레를 암시한다.
시간 속에서 내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의 미묘한 교차점, 회기점.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시원이자 종말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바퀴 돌아와서 마주하는 것은 운명과 우연이 동일해지는 환상, 그동안 지각해 왔던 사물의 차이가 무화되는 환상, 충만한 의미가 무화되는 환상, 이 공포스러운 암시는 아닐까.
헤매다 보니 돌아왔고, 이 무의미한 정박지에서 무심코 다시 출발해야 하는 속박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시간’을 보다 마지막 순간 스치는 생각…
(그러나 ‘시간’은 기시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완벽한 ‘반복’을 보여준다. 이 반복은 이 영화가 그리는 운명이 영화 내적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라 명백한 운명 자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은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원문 : http://www.cine21.com/News_Report/news_view.php?mm=001001002&mag_id=40733

[외신기자클럽] 내 사랑 베티의 스무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베티 블루>가 유럽을 넘어 아시아 영화에 끼친 영향

‘베티를 만난 지 일주일이 됐다. 우리는 매일 밤새도록 섹스를 했다. 오늘 저녁에는 폭풍우가 내릴 거라고 한다.’ <베티블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벌써 20년이 지났다. 장 자크 베넥스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걸작은 아니지만영화사의 한 이정표를 세웠다. 주홍색 원피스, 노란 메르세데스, 지중해의 푸른 하늘과 같은 단색의 색조는 고다르 감독에게서따왔고 MTV의 초기 분위기를 잘 새겨 놓았다. 독습자가 쓴 소설에 기초해, 두 이름없는 배우를 기용한 <베티블루>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며 완벽하게 당대를 잘 표현한 영화로 한획을 그었다.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렇지만 곧 꿈과 열정은 시들어버렸다. 사람들은 1980년대가 혁명의 시대가 되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오늘날까지도 그 때를 ‘돈이 재배한 시대’라 지칭한다. 미테랑 세대는 참여적인 영화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환멸의 시(詩)를 만들어냈다. 그 흐름의 선두는 레오스 카락스, 뤽 베송 그리고 장자크 베넥스 감독으로, 이 셋을 사람들은 ‘BBC’라고 지칭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작품은 결정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형상을 주변부 몽상가들의 득 속으로 녹여버리게 되는데, <베티 블루>의 연인인 조르그와 베티는 그 상징이기도 하다. 정치에 실망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포기한 주인공들은 도피와 사랑이라는 단 두 가지를 갈망할 뿐이다. 이런 영화들은 과도한 경쟁을 반복하게 된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드니 라방이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에 맞춰 춤추며 다양한 색깔의 울타리 앞을 뛰어다니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다. 또 다른 세계 속으로 도주하거나 몸을 숨기는 것- 주인공들은 <베티블루>의 사막 같은 메마른 시골 풍경, 판잣집이 즐비한 마을이나, 뤽 베송 감독의 <지하철>의 지하철 통로와 <그랑 블루>의 해저와 같은 곳에 나온다.

오늘날 ‘BBC’를, 그리고 <베티 블루>의 기념 DVD를 다시 보면, 그로부터 몇년 뒤떠오르게 된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에 끼친 영향이 엿보인다. 예를 들어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베티블루>를 가물가물하게 떠올리는 게이판 리메이크라 할 수 있다. 김기덕 감독에게선 한층 더 뚜렷한 연관관계가 보인다.<악어>는 전적으로 <퐁네프의 연인>의 계열에 속하고, <파란 대문>의 해변가는 넓은 의미에서<베티 블루>에서 차용한 것이다. <수취인불명>에서는 <퐁네프의 연인>과 <베티블루>에서 보았던 눈을 다친 형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베아트리스 달의 화산 같은 연기는 세계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브리지트 바르도 이래 볼 수 없었던 현상을 낳았다. 불타는 듯이 붉고 육감적인 입술, 오른쪽 어깨에 새긴 박쥐 문신, 깎지 않은 겨드랑이털 등… 그녀의 모든 것은 사람들이 흔히 ‘젊은 데뷔 여배우’에게서 기대하는 것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을 나타냈다. 그녀는 욕망의 낯선 대상이었고, 데오데란트도 안 쓰고, 껌을 씹어대는 여배우였다. 이 역할은 전세계의 여배우들을 꿈꾸게 만들었고, 배우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했다. 1998년, 심은하는 <씨네21>에서 <베티블루>의 베아트리스 달과 같은 역할을 기다린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베티와 견주어보면, 브리지트 존스나 엽기적인 그녀와 같은 우리 시대의 사이비 반항아들은 참한 아가씨들일 뿐이다! 베넥스 감독의 영화, 그 강렬한 푸른색의 점감하는 색조는 바랬지만, 베티는 영원히 청춘으로 남았고, 조르그가 해넘이의 금갈색 노을 속에서 그녀를 껴안고서 “생일 축하해, 내 사랑, 너의 스무살을 위하여!”라고 외친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눈부시다.

글: 아드리앙공보 포지티브 기자. 영화평론가

번역 진영민

내 친구와 나눈 짤막한 대화 때문에 내 생각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비약과 단절, 폭력, 극단 등으로부터 비롯하여, 이 영화에 대한 해석 역시 이 영화를 닮아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세간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만큼 그 영화가 현실에 대해 지니는 자세가 논쟁적이라는 뜻일 게다. 나 역시 한쪽 끝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듯하고 나는 양극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제서야 어느 한쪽에 자리잡은 듯한 느낌이다. 한쪽 끝에 머문 만큼 독단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써 본다.

1. 영화는 왜 불쾌를 일으키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한 여성이 일종의 지옥 속으로 무참히 빠져드는 과정을 친절한 설명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 안의 세계에서는 선화에 대한 그 어떤 동정도 없으며 암묵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는 듯한 폭력이 그녀를 포획할 뿐이다. 우리는 거기서 기타 다른 장면들의 폭력성보다 더한 진정한 폭력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주체할 수 없는 불쾌를 느낀다. 그것은 미학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이기도 한 불쾌감이다.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는 단아한 여대생이 6만원짜리 인생으로 전락하여 사회의 일반에서 이반으로,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한기의 일상으로 강제적으로 편입당한다. 더구나 한기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의 폭력을 사랑이라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내러티브를 목격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책임한 폭력에 나도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여기서 불쾌는 지워지지 않는다.

2.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선화에 대한 일방적인 가학이 서서히 마조히즘적인 수긍으로 전화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설령 한기가 선화를 사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이 영화는 모종의 이상적 가치에 대해 철저히 반명제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그 모든 자극적인 이미지로 착색된 이 영화는 자신의 반명제로서의 위치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이 영화가 우리의 감각에 기입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그 자극성 역시 쾌가 아니라 불쾌를 가져다주는 요소인 바에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 그러나 우리는 내러티브만 찬찬히 따라가는 수동성만 담지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 자체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의 불친절함이 영화가 주는 자극만 고스란히 받아내지 말라는 권고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쓰레기 같음, 즉 자극성과 폭력성을 그 자체로만 우리 몸에 기입하는 것은 이 영화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스스로가 현실의 모방이 되어 현실의 은폐된 실재, 부정하고 싶지만 결코 부정되지 않는 엄연한 실재를 관객이 단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 이 영화의 언어를 그대로 몸에 기입하면 단지 확인에만 머물 것이다 – 인식함으로써 폭력적 현실을 은폐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폭력 그 자체를 묵도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다시말해 이 영화는 자신이 구축한 분열되고 기만적인 세계 속에서 오히려 현실 세계를 바라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생각들, 내 기대를 철저히 거스르는 화면을 보면서 왜 그 비난을 현실로 재환원시키지 않고 영화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긍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현실에서는 그 어떤 진정한 사랑의 관념에도 부합되지 않는 추악한 폭력이 사랑으로 가장하고 있으며 설령 내 사랑의 정수를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여도 일그러진 이데올로기에 장악된 현실은 그 사랑을 일그러뜨려 보내진다. 사랑하여 결혼하면 여성은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에서 이중차별을 받는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잉 교육열과 치마바람으로 일그러진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진짜 좋아해서 하는 행동이 상대에게는 스토킹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극단적으로 말해 ‘사랑해’라는 말을 전하면 상대에게는 ‘십새끼야’가 되어 가닿는 것이다.

3. 양날을 가진 면도칼
지금까지 이 영화에 대한 변호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거치면서 일어날 진정한 생성의 가능성을 말했다. 그러나 기실 이 영화가 온갖 불친절하고 부정적이며 위선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영화 그 자체의 부정할 수 없는 정체이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유독 여성에게 가혹한 점과 가학-피학-자학의 트라이앵글이 공고한 점은 그 자체로 쟁점이 될만한 추악한 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어쩌면 김기덕의 무의식이 그러한 설정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만든 영화는 그의 내적 구조에서 떨어져 나가 나름의 구조를 획득하여(나는 이것이 한 작품의 성립에 필요한 단절의 첫 단계라고 본다), 특유의 불친절함과 자극성을 가지고 우리에 대해 타자성을 획득하여 자신을 생소하게 일그러진 실체로 보도록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타자성을 느낄 수 없다면 내 관점에서는 그의 영화와 맺는 불운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부정적인 면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난을 영화 자체에도, 다시 현실에도 돌릴 수 있는 것이 관객의 권위이다. 이 권위를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일까. – 이를 통해 관객의 심성구조와 미적 취향의 경중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와 현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획득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갈 방향타가 있다면 어디로 잡아가는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해 모색하는 의미로 받아주기 바란다 – 영화를 잠시 머물다갈, 그래서 현실에서는 잊어버릴 가상으로만 사용하는 것과 이 수없이 창궐하는 가상들을 현실과 관련지어 나의 생성 안에 참여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공방도 양자 사이의 줄다리기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