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앞서 묘사한 궁지를 자기 착취와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집단적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듯 우리가 매일 벌이는 강박적인 멀티태스킹을, 먹는 동안에도 먹이에 몰입하지 못하고 주변의 사태를 살펴야 하는 야생동물의 습성에 비한다.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에 대한 관심에,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진 깊은 분노는 쓸데없이 휘발하는 가벼운 짜증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지적한다.
‘피로사회’로부터의 도피, 삶을 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의 영화관을 생각하다,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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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형 인간의 추억
김혜리 : 예전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반은 회고”라고 표현했던 게 기억나네요.
김병욱 : 사람을 만나 즐거운 일이 있으면 이것도 추억이 되어 가슴이 아릴 거라는 생각에 슬퍼요. 심할 때는 기쁜 순간이 오기 전부터 추억이 될 걸 염려해요. (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순간도 온전히 즐겁지 않아요. 한 프로그램을 마칠 때도 비슷해요. 이것도 작은 우주이고 제 현실과 나란히 갔던 평행우주인데, 제 현실은 계속 달려가는 반면에 그쪽은 종영되는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잖아요. 연기자가 없으니 그 이후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는 마음속에만 있어요. 추억과 비슷한 거죠. 예를 들어 과거에 갔던 장소에서도 저 없이 꾸준히 어떤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몰라요. 옛날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가 교회 가서 놀자고 했는데, 그게 설레고 좋았으면서도 결국 전 집에 그냥 누워 있었어요. 막연히 한곳에 속해 버리면 다른 걸 못 볼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웃기죠. 집에 누워 있어도 다른 걸 못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웃음) 종교도 신앙은 좋지만 그로 인해 내가 다른 걸 못 볼까 두렵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추억도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다가 종말을 맞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김혜리 : 어쩌면 드라마를 연출하는 행위는 아름답거나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만드는 동시에 모니터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이니까, 현실에서 추억을 회고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김병욱 : 어떤 사건도 일어났을 때 즐기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즐겨요. 고향에 가면 옛날에 거닐었던 곳을 다시 걷는 게 좋아요. 현실을 잘 못 살고 관념 속에서 사는 것이죠.씨네21 741호 (2010.02.09~02.23)
심히 공감 가는 이 인터뷰를 읽다가 든 생각.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는 기우형 인간과 그들의 걱정 덕분에 맘 편하게 사는 배짱이형 인간.
나는 실제로는 전자에 속하는 편인데 그 걱정의 고통을 피하고자 대체로 모든 일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모든 인류가 겪어 온 것인데 내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라고 그 걱정들을 의식적으로 떨쳐내려는 것이다.
가끔 발현되는 내 쿨한 측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 내려는 허위의식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러고도 시간이 지나면 사소하게 치부했던 것들은 다시 회한과 함께 돌아온다.
그 순간을 충분히 감내하거나 즐기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과거를 다시 정의하고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게 나라는 인간이 과거를 추억하는 한 방식이다.
현재는 미래에 발목 잡혀 있고 과거는 패배하는 현재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다.
기우형 인간에게 회고는 충실하지 못한 현재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