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와 나눈 짤막한 대화 때문에 내 생각을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비약과 단절, 폭력, 극단 등으로부터 비롯하여, 이 영화에 대한 해석 역시 이 영화를 닮아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세간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만큼 그 영화가 현실에 대해 지니는 자세가 논쟁적이라는 뜻일 게다. 나 역시 한쪽 끝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듯하고 나는 양극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이제서야 어느 한쪽에 자리잡은 듯한 느낌이다. 한쪽 끝에 머문 만큼 독단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써 본다.

1. 영화는 왜 불쾌를 일으키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한 여성이 일종의 지옥 속으로 무참히 빠져드는 과정을 친절한 설명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 안의 세계에서는 선화에 대한 그 어떤 동정도 없으며 암묵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는 듯한 폭력이 그녀를 포획할 뿐이다. 우리는 거기서 기타 다른 장면들의 폭력성보다 더한 진정한 폭력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면서 주체할 수 없는 불쾌를 느낀다. 그것은 미학적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이기도 한 불쾌감이다.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는 단아한 여대생이 6만원짜리 인생으로 전락하여 사회의 일반에서 이반으로,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한기의 일상으로 강제적으로 편입당한다. 더구나 한기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남자의 폭력을 사랑이라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는 어처구니없는 내러티브를 목격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책임한 폭력에 나도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 여기서 불쾌는 지워지지 않는다.

2.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그 자체가 폭력이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선화에 대한 일방적인 가학이 서서히 마조히즘적인 수긍으로 전화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 설령 한기가 선화를 사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한다. 이 영화는 모종의 이상적 가치에 대해 철저히 반명제의 위치에 서있는 것이다.
그 모든 자극적인 이미지로 착색된 이 영화는 자신의 반명제로서의 위치를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이 영화가 우리의 감각에 기입하는 것만을 받아들인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그 자극성 역시 쾌가 아니라 불쾌를 가져다주는 요소인 바에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 그러나 우리는 내러티브만 찬찬히 따라가는 수동성만 담지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다른 김기덕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러티브 자체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의 불친절함이 영화가 주는 자극만 고스란히 받아내지 말라는 권고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쓰레기 같음, 즉 자극성과 폭력성을 그 자체로만 우리 몸에 기입하는 것은 이 영화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스스로가 현실의 모방이 되어 현실의 은폐된 실재, 부정하고 싶지만 결코 부정되지 않는 엄연한 실재를 관객이 단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 이 영화의 언어를 그대로 몸에 기입하면 단지 확인에만 머물 것이다 – 인식함으로써 폭력적 현실을 은폐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폭력 그 자체를 묵도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 다시말해 이 영화는 자신이 구축한 분열되고 기만적인 세계 속에서 오히려 현실 세계를 바라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생각들, 내 기대를 철저히 거스르는 화면을 보면서 왜 그 비난을 현실로 재환원시키지 않고 영화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긍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으로 해석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현실에서는 그 어떤 진정한 사랑의 관념에도 부합되지 않는 추악한 폭력이 사랑으로 가장하고 있으며 설령 내 사랑의 정수를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여도 일그러진 이데올로기에 장악된 현실은 그 사랑을 일그러뜨려 보내진다. 사랑하여 결혼하면 여성은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에서 이중차별을 받는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과잉 교육열과 치마바람으로 일그러진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진짜 좋아해서 하는 행동이 상대에게는 스토킹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극단적으로 말해 ‘사랑해’라는 말을 전하면 상대에게는 ‘십새끼야’가 되어 가닿는 것이다.

3. 양날을 가진 면도칼
지금까지 이 영화에 대한 변호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거치면서 일어날 진정한 생성의 가능성을 말했다. 그러나 기실 이 영화가 온갖 불친절하고 부정적이며 위선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영화 그 자체의 부정할 수 없는 정체이기 때문이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유독 여성에게 가혹한 점과 가학-피학-자학의 트라이앵글이 공고한 점은 그 자체로 쟁점이 될만한 추악한 점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어쩌면 김기덕의 무의식이 그러한 설정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만든 영화는 그의 내적 구조에서 떨어져 나가 나름의 구조를 획득하여(나는 이것이 한 작품의 성립에 필요한 단절의 첫 단계라고 본다), 특유의 불친절함과 자극성을 가지고 우리에 대해 타자성을 획득하여 자신을 생소하게 일그러진 실체로 보도록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타자성을 느낄 수 없다면 내 관점에서는 그의 영화와 맺는 불운이다.
나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부정적인 면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난을 영화 자체에도, 다시 현실에도 돌릴 수 있는 것이 관객의 권위이다. 이 권위를 어디에 사용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일까. – 이를 통해 관객의 심성구조와 미적 취향의 경중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와 현실, 영화와 관객 사이에서 획득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갈 방향타가 있다면 어디로 잡아가는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해 모색하는 의미로 받아주기 바란다 – 영화를 잠시 머물다갈, 그래서 현실에서는 잊어버릴 가상으로만 사용하는 것과 이 수없이 창궐하는 가상들을 현실과 관련지어 나의 생성 안에 참여시키는 데 사용하는 것. 나는 이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공방도 양자 사이의 줄다리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감독 : 김기덕
출연 : 조재현, 서원

이제서야 알았다. 그의 영화들은 유사한 테마들의 변주곡이었다는 것을. 새장 여인숙을 한기(조재현)과 선화(서원) 사랑이 영그는 곳으로 잡은 것, 창녀와 그의 포주 내지 깡패가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폭력으로만 표출되는 운명적 상황이 담긴 이미지들.
한기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성대를 잃었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물. 그는 항상 그러하듯 사회의 서출. 어느 한 여대생에게 품은 욕망 또는 사랑의 감정을 창녀로 만들어 자기 주변에 두는 것으로 표현하는 쓰레기 인간.
한 인간의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과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인 욕망의 응집체인가 하는 것을 항상 그러하듯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김기덕.
대학생이라는 것이 지니는 사회적 고상함의 표상을 무참히 짖이기고 안정의 테두리를 무너뜨려 혼돈의 삶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상하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김기덕의 파괴적 힘.

그러나 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한기의 진심을 알고 그를 따라 몸을 팔며 떠도는 선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기덕의 진심은 알겠으나 그의 극단적 비유는 폭력적 상황을 정당화하기 쉬운 위험도 안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일까.
나와 이 영화 사이에 벌어지는 이 충돌은 한기와 선화의 관계와 닮아 있지 않은가.
욕망과 폭력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이 조우하면 정말 한 배가 가라앉아야만 하는 것일까.

追記 : 김기덕의 극단성은 미학적 영역에서 현실을 드러내 주는 데 기능한다. 투박하고 급진적이어서 이중 부정의 강한 긍정으로 오독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강한 부정에 기반하여 영화라는 가상의 현실적 존재성을 확보하는 방편이다. 다시말해 김기덕의 영화는 극단성을 외피로 우리 앞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기는 타고난 부정성의 아들이다. 그에게는 사회의 부정성이 각인되어 있고 부정을 긍정으로 기입한 선화에게 그의 것이 전화됨으로써 그의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심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가 품는 단순한 질문은 왜 극단적인 폭력적 촉각이 스크린에 새겨져 있는가보다는 왜 한기가 자신의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가이어야 한다. 유운성씨의 표현대로 이 영화의 가상은 폭력적인 현실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둘러쳐진 절규의 향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화상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저주같은 운명에 대해 체념하기보다는 슬픔을 안고 저항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 때만이 내가 안은 부정성과 영화의 부정성 사이에서 비로소 온전히 소통했다 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