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입체성을 억누르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다. 영화는 나치 가족을 이미지로 전면화하면서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이 가족의 구체적인 세부가 보이지 않는(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 담장 건너의 무수한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풍경만 피상적으로 스케치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요 없는 중립지대, 객관적 목격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중심을 맞춘 이유로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는 가해자의 서사와 분리된 곳에서 피를 묻히지도, 벌벌 떨지도 않는 기계적인 눈으로 그 세계를 그저 쳐다본다. 이 영화는 비인간성을 현시한다는 미명으로, 자신이 빚은 인간의 개별성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2주 전 숭례문학당 영화 토론과 비평 읽기 수업에서 남다은의 글을 읽다가 나는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칠 뻔 했다. 남다은의 통렬한 비판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국한시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할 때 우리는 악을 평면적으로만 다루는 어리석은 비겁을 흔히들 반복한다.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이나 폭력 같은 것에 대해 보이는 평면적 적대감은 아주 간단하게 자신을 그 적대자들에게 연루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게 만든다. 관념적으로는 그것을 주체의 대립자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는 악이나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 안에 연루된, 그런 조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주체다.

링클레이터는 영화 속 인물들, 특히 메이슨의 불안과 상처가 가시화되기 직전 이듬해로 건너뛰고, 그때가 오기까지 인물들이 살아내야 했을 시간을 짐작 속에 묻어두거나 삭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시간 조각을 잇는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이들에게 다음 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지금 이들을 감싸는 불안과 상처가 또 어떤 식으로 견뎌지고 망각되며 지나갈까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꾸만 과거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며 저 시간은 정말 지나간 것일까 묻게 만드는 것이다.

링클레이터는 그가 사춘기의 반항을 내지르는 단 한 장면에도 영화를 할애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을 보여주는 대신, 그는 성장했으나 변질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주는 순간들을 선택한다.

링클레이터가 “카메라 앞에서 커가는” 그의 변화를 감지하며 그 시간의 운동을 즐기는 동안, 메이슨은 그 운동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직 아무것도 잊지 못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그 감정들을 속으로 누르고 해소하지 못한 채 시간의 전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영화적 운명에 그는 그렇게 고요하게 저항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간은 정말 안온하게 흘렀을까 – 남다은, 씨네21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산드라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정상’의 궤도로 도약할 수 있는 건강함과 투명함이다. 반면 미셸은 레오나드처럼 우울의 세계에 침잠한 자이며 결여 그 자체이고, 레오나드의 거울이다. 레오나드가 산드라의 끈을 놓지 못하면서도 미셸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산드라가 레오나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상대라면, 미셸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게 하는 존재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의 과거와 상처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를 정작 두려운 매혹에 빠뜨리고 뿌리칠 수 없게 하는 사랑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고 실패를 예견하는 자기파괴적인 것이다. 그에게 미셸이 병든 자신 자체라면, 산드라는 그런 병든 자신을 보게 하는 눈이다.

씨네21 940호 신전영객잔, <투 러버스>, 남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