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가의 좋은 점은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p31~33

버트런드 러셀은 현대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오래 된 공허한 신화로 인해 최소한의 노동과 최대한의 여가라는 선물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노동하고 생산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유희하고 소비하는 존재다. 노동이 자연에 대한 투쟁이라면 유희는 그것과의 공존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신경쇠약 직전까지 스스로를 내몰면서 가혹하게 노동하고 있는 것일까. 왜 모두들 근면 성실이라는 강박에 시달릴까. 노동으로 삶을 소진시키지 않고 그것을 게으른 유희에 할애함으로써 산다는 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싶다. 게으름을 죄악시하고 사회에서 도태시키려는 이상한 사회적 음모는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언제나 삶에 대한 피로에 시달리는 내게 이건 참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다.

출처는 http://user.chollian.net/~marishin/politics/h24hour.html 입니다

밤을 식민지화하기
(Colonising the night)
레드페퍼(Red Pepper) 2000년 5월호
제이 그리피스(Jay Griffiths)

제이 그리피스가 24시간 사회라는 자본주의적 열반의 뿌리를 따져보고, 이것의 반대 개념을 나타내는 날 곧 노동자들과 무정부주의자와 이교도의 기념일 메이데이에 이에 반항할 것을 촉구한다.

입맞춤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밀레니엄돔의 놀이지역에 있는 ‘입맞춤’ 놀이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입장객들이 신나거나 – 입맞춤에 열광하거나 – 하면 안되니까, 놀이지역 입구에 우습게도 무표정한 지시사항 팻말이 놓여있다. ‘놀이지역에서 뛰지 마시오. 이용객 앞을 가리지 마시오. 신발끈이 확실히 매여있는지 확인하시오. 전기 의자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시오.’ 그래드그라인드씨가 여기 왔다가 갔다.(Gradgrind woz ere; Gradgrind는 챨스디킨스의 소설 Hard Times의 주인공 이름이고, 주로 냉혹안 자본가의 상징으로 쓰여짐. ‘was here’ 를 발음나는 대로 적은 듯함. 양정언 님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옮긴이) 놀이지역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조적으로 노동지역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새로운 노동교를 밀어붙이는 지경까지 가고 있다. 먼저 노동의 판에 박은 문구들이 등장한다. 가짜 햄스터 100마리가 100개의 플라스틱 쳇바퀴에서 움직이고 있고, 9시에서 5시까지를 기록하는 출퇴근 자동기록 장치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끝장났고 노동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밀레니엄체험 회사의 열성 안내원은 말하면서 ‘선택’과 관련된 ‘새로운’ 노동세계를 어슴푸레하게(‘눈을 번뜩이며’ 라고도 해석될 수 있을듯: 옮긴이) 언급한다. 자신의 작품집을 들고 다니는 전문직, 자유, 유연성. 이 모두가 24시간 사회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다.

24시간 사회를 보급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두 가지 서로 다른 근대적 삶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는 달래질 수 없게 되어있는 소비적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과도하게 바쁜 사회 깊은 곳에 있는 시간 향수병 곧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없다’ 증상이다.

’24시간 사회’의 저자 리온 크레이츠먼(Leon Kreitzman)과 ‘미래주의자 잡지'(퓨처리스트 매거진)에 글을 쓰는 마이클 헤이거(L Michael Hager) 같은 옹호론자들은 24시간 사회가 물건 구매와 서비스 이용의 오후 5시 마감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의 일상을 부드럽게 해주고, 노동의 자유직화 경향에 도움을 주고 ‘영원한 임시직’의 전문직 노동자를 고무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산업연합회(CBI)는 24시간 사회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벌들은 24시간 사회라는 개념을 밀어붙이고 있다. 공간적 영역이 소모되자 그들은 시간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해 밤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시도한다.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Tesco)는 말 그대로 하룻밤만에 몇몇 체인점을 24시간 운영체제로 바꾸면서 경쟁자들을 살그머니 앞질렀다.) 주당 노동시간 제한을 깨면서 ‘선데이 비즈니스’ 신문은 홍보에 열을 올렸다. ‘일요일, 근무의 첫번째 날’이라고. 전문직 노동자 그래드그라인드는 밀레니엄체험 회사에서 일하지 않을 때 교육부에서 부업을 하면서, 5살 어린이에게 숙제를 꼭 부과해야하고 학교를 저녁 늦게까지 운영해야 한다고 자문한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건 말이 안된다.)

크레이츠먼 말대로 라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이’는 영국의 일하는 어머니들이다. 부부가 밖에서 똑같은 시간을 일한다면, 부인은 남편보다 집에서 일주일 평균 9시간을 더 일한다. 잔업이 문제라면, 24시간 사회가 그 답이다.

그렇게 빠르지 않다. 해결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을 악화하는 것이다. 일하는 어머니를 한번 보자. 하루 종일 직장 일을 한 뒤에 새로 집안일 전체를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아마 하게될 것)이 정말 더 나은가? 남녀의 잔업 형태를 바꿔서 집안 일을 무시무시하게 싫어하는 남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건강한가? (시키지도 않는데 설거지를 하는 남성의 모습보다 더 사랑스런 광경은 거의 없다.) 언제 일할지, 일하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최절정기의 전문직 노동자와 자유직 노동자들만 이익을 볼 것이다. 그러나 덜 자리가 잡힌 전문직, 자유직 노동자들은 훨씬 더 끔찍한 경험 곧 언제나 대기해야 하는 운명인 자영업자가 겪는 자신을 갉아먹는 불안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학교를 늦게까지 열라는 압력은 이중적인 교육체계 곧 부유한 아이는 낮에 학교에 가고 가난한 집 아이는 밤에 가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

시간은 언제나 권력의 활동 중심이며, ‘무정치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24시간 사회야말로 정치적이다. 이 사회는 계급간, 인종간, 성별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24시간 사회는 ‘속박을 제거한다’고 크레이츠먼은 말한다. 무슨 말씀. 이 사회는 한 부류에 속박을 가함으로써 다른 부류의 속박을 없애는 것이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절대 다수가 부유한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3교대의 철야근무’ 덕분에 – 직접 또는 간접으로 – 가장 이득을 볼 사람들이지, 자신들이 철야근무를 할 가능성은 가장 적은 이들이다. 시장조사는, ‘시간이 넘치는’ 사람들은 24시간 사회를 반대하는 반면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고? 시간이 많은 이들은 돈이 없고 이런 변화로 가장 피해를 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시간 사회를 반대할 환경 차원의 확고한 이유도 있다. 이 사회는 의도적으로 소비와 낭비를 부추길 것이다. 또 도시인들에게 밤하늘의 별을 볼 권리를 빼앗는 도시의 불빛 공해를 증가시키는 주 요인이다. 24시간 사회는 같은 시간에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공동체의 사회적 결합력을 깨뜨린다.

건강 문제도 있다. 미국과 핀란드의 의사들은 최근에 유방암과 24시간 사회의 인공 광선의 상관 관계를 조사했다. 사람의 몸에는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하도록 맞춰진 복잡한 내부 시계가 있다. 이를 심하게 흔들면, 소화불량 궤양 당뇨병 등에 걸린 가능성이 높고, 정신도 불행해질 여지가 크다. 야근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될 가능성이 높으며, 야근은 성욕을 감퇴시킨다는 보고서도 있다. 미국의 앞서가는 외환거래자인 마이클 마커스(Michael Marcus)는 1980년대 중반에 자신의 생활 형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매일밤 두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홍콩, 취리히, 런던의 외환시장이 열리는 데 맞춰 상황을 점검해야 했다. (효과? ‘결혼 생활을 파탄냈다.’ 입맞춤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일을 시작한 이들은 수도승들이었다. 죄처럼 어두운 6세기의 밤은 교회 시계의 노예가 됐다. 530년께 성 베네딕트는 새로운 시간 관리를 주장하고 시간과 인간 본성 통제 수단으로 밤에 종을 치라고 주장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새롭고 아주 강력한 태도를 주창했다. 수도승을 깨운 바로 그 자명종이 그 이후 계속 울리기 시작했고, 마이클 마커스를 밤에 두 시간마다 깨우고 있다. 효과 또한 같다. 20세기의 결혼생활을 망친 바로 그것이, (전복을 시도하고 더럽고 어두운) 섹스가 가장 왕성한 때인 밤의 즐거움을 6세기 사람들에게서 빼앗았다. 종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욕에 반하는 금욕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도구였다. 입맞춤은 ‘문란한 것’이라고 선언됐다.

EP 톰슨(Thompson) 등은 개신교의 시간에 대한 평가 – 시간 엄수, 시간관리, 생산적인 시간 사용 – 를 산업혁명을 이끈 돈벌이 욕심과 연결시켜왔다. 산업혁명의 이 시기야말로 다양한 이념의 특이한 융합 속에서 노동시간이 영원히 바뀐 때다.

이 때 무엇을 잃었나? 보통 사람들의 두르르 말려있고, 사랑스러우며 자연스럽고 탄력이 있으며 다채롭고 농촌적인 시간이 사라졌다. 대신 황량한 공장의 동시성이 자리잡았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하드 타임스(Hard Times)’에 나오는 ‘코크타운(Coketown)’에서는 ‘모든 날이 어제와 똑같고 내일도 차이가 없다. 코크타운에서 시간은 기계처럼 지나간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산업계가 매일 밤낮없이 문을 열면서 낮과 밤의 ‘시간 구분’을 오염시키고 여름과 겨울의 계절적 차이를 없애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항의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시간 착취를 정확하게 예견했다. ’24시간 내내 노동을 전유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고유한 경향이다.’ 1820년대와 1830년대 영국 섬유업계 노동자들은 자신의 시간에 대한 권한을 훔쳐간 공장 문 위의 시계를 부쉈다. 노조는 – 곧 바로 불법화했지만 – 가장 먼저 시간 착취를 문제삼아, 1847년 10시간법을 쟁취했다. 1848년 혁명은 (말하자면) 시간을 중심으로 삼았다. 8시간 노동, 8시간 취침, 8시간 놀이. 그리고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1886년 메이데이의 수많은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테스코는 ‘개명(또는 계몽, enlightenment)’과 무슨 관련이 있나? 잠도둑들은 누구인가? 또 24시간 사회는 암묵적인 인종차별과 무슨 관련이 있나?

수요일 새벽 3시. 나와 함께 24시간 운영하는 근처의 테스코 체인점에 가서 상징적인 모양의 네스카페 커피 한 병과 퍼실 세제 한 봉지, 마즈다 전구를 사보자. 빛이 어두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성경에서 테스코까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빛은 바로 우리 사회가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의 ‘어두운 면’을 뿌리깊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밤으로 접어든 (Benighted, ‘미개한’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것은 저주이다. 사탄은 어둠의 왕자이며 빛의 왕자(인 동시에 빛의 원칙)의 도전을 받는다.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밤을 혐오하고 낮의 특권을 확보하고, 어둠을 악마와 연결시켰다. 이는 빛의 신 마즈다를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개 전구의 절묘한 상징 마즈다에 놀랐을 것이다.) 근대의 가장 더러운 정치학은 성차별과 인종주의에 깔려있는 어둠에 대한 빛의 지배와 관련되어 있다. 계몽은 빛, 가시성, 합리성, 남성의 ‘과학’을 존경하며, 여성의 ‘신비’의 어둡고 직관적이며 여성적인 방식을 비방한다. (남성 성기는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로서 빛 속에 서있다. 여성의 질은 사랑스러운 촉촉함과 비밀스런 어둠 속에 겹쳐져 있다.)

서구사회는 인종차별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이런 어둠에 대한 급진적인 혐오를 이용해왔다. 악랄한 비난에 쓰이는 말인 (niger 곧 검정에서 온) 니거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또는 다키(darkies, 깜둥이라는 뜻 : 옮긴이) 라는 말을 보라. 또 끌어내리는 것은 ‘까맣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denigrate’ (검게하다, 모욕하다라는 뜻 : 옮긴이) 같은 말의 과잉을 보라. 게다가 어둡거나 성행위처럼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반면, 깨끗함은 경건함과 성적인 냉담함을 따라 다닌다. (또 퍼실 세제는 더 하얗게 해준다.) 잠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결근보다는 출근(presenteeism, presentee는 받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결근이라는 뜻의 absenteeism과 함께 씀으로써, 임금을 받는 것은 출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중적 의미로 이 표현을 쓴 듯함 : 옮긴이)이 오늘날 노동력의 병이다. 하루 종일 일하고 거의 자지 않는 것이 말이다. 또 오전 3시에 네스카페 커피를 사는 것이 말이다. ‘잠도둑들’의 저자 스탠리 코렌은, 우리는 잠을 빼앗기고 있으며 우리가 자는 평균 시간인 7시간30분보다 더 많은 9시간30분에서 10시간은 잠을 자야한다고 했다. 잠은 ‘유약한 이들’ 예를 들어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

시간의 성정치학에선 강한 남성이 되려면, 몇시간만 잠을 자라고 주장하며 하루종일 여는 슈퍼마켓식 시간을 밀어붙이는 책임을 떠맡은 윈스턴 처칠이나 마거릿 새처(대처)처럼 잠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잠을 제대로 못자면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가 줄줄이 이어진다. (새처는 미치지 않았다. 음미해보라.)

야근을 하면 잠자는 흐름이 깨진다. 24시간 사회 옹호자들은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적절하게도, 인라이튼드 기술(Enlightened Technologies)이라는 회사는 빛을 이용해 생리적 리듬을 다시 맞추는 장치를 써서 ‘잠을 판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새벽 3시에 일한다면 이것을 명심하시라. 이 사업은, 당신을 착취해 돈을 버는 다른 사업 때문에 당신이 겪는 잠부족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것이다. 곱빼기의 마법이라고? 에스프레소 커피 곱빼기로 마시기겠지.

24시간 사회는 한 개념의 대립된 개념 지배를 강화시키는 빛의 가장 심오한 문화정치학을 표현한다. 도시의 자연 지배, 빛의 어둠 지배, 남성의 여성 지배, 백인의 흑인 지배, 법인의 일반인 지배, 노동의 놀이 지배, 부자의 가난한 이 지배, 이익의 자연 지배, 기독교의 토속종교 지배, 깨끗함의 세속 지배를 강화시키는 문화정치학을 말이다.

24시간 시계의 반대는 무엇일까? 입맞춤이다. 24시간 사회의 반대 개념은 무엇인가? 메이데이다. 24시간 사회가 그래드그라인드같은 이들의 세계의 맞바꿀 수 있는 시간을 대표한다면, 메이데이는 달콤하게 특정한 순간 곧 ‘특별한’ 시간을 대표한다. 지구적 기업들은 24시간 사회를 후원하고, 지구적 시위자들은 메이데이를 지지한다.

‘런던 거리 되찾기(Reclaim The Streets in London)’가 낸 책자는 2000년 메이데이가 ‘자본주의에 맞서는 전지구 행동의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세계를 가로질러, 메이데이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다. 메이데이는 국제 노동절로서는 빨갛고, 1886년 처형된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까맣고, 고대 풍요의 메이데이 축제인 벨테인(Beltane) 축제날로서는 푸르다. 이 날은 평범한 사람들의 날이다. 공통의 시간에 한 장소에서 공통의 목적을 이루는 평민들의 날이다. 또 농민들의 반란날이다. 시간 : 오전 11시. 장소 : 런던 의사당 광장.

이 행사의 핵심은 ‘기습적인 씨뿌리기’다. 농민들처럼 ‘삽과 씨앗과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사방팔방에 씨를 뿌리자는 기획이다’. ‘런던 거리 되찾기’의 책자는 ‘저항은 생산적이다’고 주장한다. 모든 씨는 발아한다. 맞다. 벨테인 축제는 이교도 축제 가운데 가장 관능적이고 알몸의 생산력이 왕성한 축제다. 5월제 기둥의 ‘더러운 춤’이 이 관능적인 날의 핵심이다. 퍼실 세제는 금지된다. 선전 책자는 ‘더러워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말로 더러워지자. 진짜로 거리에서 성교를 하자. 사랑을 만들지 돈을 만들지 말자. 땅을 갈자. 그렇다. 세속적인 것을 되살리자. 입맞춤은 무질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이날의 질서다. 바로 ‘그렇다’라고 말하자.

뭐 거창하게 말할 만한 사고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도서관 책상에 앉아서 지식사회학 교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제목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발단은 맑스의 소외 개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결과물에 대해 외화(소외와 비슷한 개념?)되고 더 나아가 유적존재(인간 종으로서의 특수성? 여기서는 육체적 욕구를 극복한 의식적 활동을 통해 생산한다는 점)로서의 자기 인식은 생존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강제되는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 순간마저도 자기의식은 제한받는다. 철저한 분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은 내 식으로 말하면 개인의 전개성, 총체성의 형성 및 발현을 억압한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서의 자기발현이란 가능치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화하기 힘든 언어들을 훑어내려가다 지금 내 상황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학습활동으로부터 소외된 상황은 아닌지…중학교 때부터 객관식 문제를 증오하면서도 편한 데 안주했고 점수를 내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상황을 경멸하면서도 그 구조 안에서 놀던 나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더라. 나는 지적 관심에 따라 이론을 접하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학점을 잘 받기 위해, 시험을 위해 지금 벼락치기를 한다. 대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상황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학습하는 지식은 분명 내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며 머리를 굴리면서 내 안에서 놀지만 그것은 시험이 끝나면, 또는 외부에서 필요로 하지 않으면 깨끗하게 머리속에서 사라진다. 나와 그렇게 씨름하던 지식들은 분명 내 안에 있지만 또한 내 밖에 있다. 지식은 내가 관심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외부적 필요에 의해서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나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찾아다니고 획득해 가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그것은 철저히 나와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맑스의 소외 개념은 자본주의의 분업화된(심지어 생산물조차 그 주체와 분리되어 만드는 사람 따로 있고 소유하는 사람 따로 있는) 생산 양식 및 관계와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있지만 그것을 양화된 인간 생활 양태로 바꾸어 적용한다 해도 충분히 그것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우리라고 통칭하겠다)네 대학생들 역시 인문계 쪽으로 한정시킨다면 서술형 시험이 주를 이루지만 결국은 그것 역시 0점에서 100점으로 수치로 측정되고,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아예 5지선다형이나 단답형 주관식으로 수학 능력을 측정하지 않는가…한 개인의 지적 능력을 측정한다는 목적 자체의 가부에 대한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그 수단으로 이렇게 양화된 방식을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 수치가 과연 그 사람의 총체성을 밝혀주고 그 사람이 무슨 관심을 지니고 있으며 성격이 어떻고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밝혀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그것은 객관적 신빙성이 있는 평가 기준이 되고 있다.



수업 중에 듣는 흥미롭고 진지한 문제의식들은 충분히 모두들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얼마나 양화된 지식에 기대어 진실을 말하려 하는가…우리는 얼마나 실적 지상주의적인 생활 원칙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연과 관념과 행동과 자아로부터 소외되고 있는가…



분명 할 말 없어 짤막하게 긁적이려 했건만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또 토해내고 말았네…



아, 시험이라는 데드라인을 앞두고 해대는 이 경박하고 강박적인 공부란 것이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중간중간 멋진 언어들이 즐비한데 그것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인간이 물건에 생명을 불어 넣자 그것은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맞선다.’ …소외를 일으키는 것은 자본주의의 경제관계만이 아니며(인간이 맺는 관계 중 가장 심오한 관계, 즉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더욱 발전되면 될수록 자연의 전유(專有)는 더욱 증대된다. 자연이 점점더 생산의 한 요소로 될수록,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그것은 노동자의 생활수단이 될 수 없게 된다. ‘감각적인 외부세계’는 상품으로 전유되기 때문에 더 이상 노동에 속하는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은 또한 더이상 노동자를 위한 물질적인 생계수단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양식이 초래한 인간-자연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는 노동자를 자신의 생산물의 노에로 격하시킨다. 이러한 노예상태는 결국 노동자는 그가 노동자인 한에서만, 육체적 주체로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육체적 주체로서만 노동자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소외는 노동자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현상은 아니다. 소외는 또한 생산과정을 특징지우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적극적 외화'(active externalization), 즉 생계 수단을 박탈당한 노동자로부터 그의 생존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노동을 강제로 추출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인간은 개성을 잃게 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해 주는 ‘동물적 기능'(animal functions)을 할 때만, 자신을 개인적인 인간으로서 느낀다. 이것이 인간의 소외이며, 자신을 인간으로 의식하게 해주는 질적인 개성(qualitative individuality)의 객체화(objectification) 및 외화(externalization)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작용에서 비롯된 더 근본적인 소외 형태가 있다. 즉 ‘유적 존재'(類的存在 : species being : 본질적으로 포이에르바하류의 개념임)로부터의 소외가 그것이다. ‘유적존재’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편적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존재로서 의식할 때 발생한다. … 인간을 자연 및 자기 의식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가운데, 소외돈 노동은 종(species)을 인간으로부터 소원하게 하며 그것을 추상물(abstraction)로 만든다. ‘유적 생활’은 단지 생존 과정으로만 생각되게 된다. 인간본성은 현실에서 후퇴하여 전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 된다. 인간의 사회 관계가 비현실적이며 사회원자론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및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식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되고 원자화된다. …’



사회구조와 사회의식(P.해밀턴) p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