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가 항상 따라 다닌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러닝타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론 하워드 감독은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미스테리적 서사라는 폭주기관차를 선택하고 기호학적 상상과 추리를 포기했다.
또한 폭주기관차의 긴박한 움직임 속은 각 인물들의 진면목을 지워 버렸다.
소니에르와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랭던과 소피를 곤경에 빠뜨렸던 우직한 신사 베르네는 단순하고 무지한 조연이 되었고, 자신을 유령에서 천사로 거듭나게 해 준 아링가로사 주교와 그의 주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비운의 알비노 사일래스는 광기 어린 악한의 충복에 가깝게 그려진다 – 사일래스의 과거에 대한 설명 신은 이 중요한 인물을 진정성 있게 묘사하기에는 부족했다.
티빙은 성배에 대한 순수한 학문적 열정을 가진 익살 넘치는 영국 노신사의 디테일을 잃어버렸다.
성배를 중심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는 이들과 은폐된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이 공히 절박한 자신의 신념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이로써 평면적인 선악 구도로 바뀌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우리는 자크 소니에르와 소피 느뵈의 애틋한 관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니에르의 풍부한 상징적 수수께끼의 세계를 잃었다.
이는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이다.
소설은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빌어 성배라는 정체 불명의 환상에 기댄 중세 유럽의 여신에 대한 다양한 은유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나는 여신의 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며 부정확한 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악덕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랭던과 소피가 2천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시간을 1분도 채 안되는 물리적 시간으로 대체해 버렸다 – 론 하워드는 서사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여느 종교적 음모론의 흥미 외에는 다른 매력을 잃어버렸다.

영화에서 소피 느뵈는 많은 시온 수도회 멤버들의 호위 속에서 소설보다 더 화려한 여신이 되었지만, 풍부한 상징의 언어들이 생략되어 속 빈 강정이 되어 버렸다 – 또한 소피는 소니에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데 기여한 바가 없는 나약한 여성으로만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소니에르로부터 여신의 상징과 그 비밀을 풀어가는 훈련을 받았던 소피의 ‘성배를 찾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소피는 폐쇄된 공간에서 초조해 하고 있는 랭던의 얼굴을 감싸면서 심리적 안정을 줬을 뿐이다.

나는 내심 소설의 서사를 포기하고 중세 유럽의 어둠 속에 있던 다양한 여신의 흔적들과 성경에 실리지 못한 다른 복음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구원해 내는 영화를 기대했다.
물론 론 하워드에게서는 아니었다.
헐리웃은 정말 대중들이 이 소설에 대해 음모론에만 탐닉하고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택한 칸 영화제가 적잖이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고 있다.

p.s. 소설의 저자 댄 브라운은 여기 등장하는 비밀결사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다큐멘터리를 참고할 때 성배 자체도 중세 어느 작가에 의해 처음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시온 수도회라는 단체도 허구이다. 시온 수도회의 역대 그랜드 마스터 명단을 포함한 이 내용은 1950년경 프랑스의 플랑타르라는 자에 의해 날조된 것임이 드러났다(관련 다큐멘터리는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했으며 ebs에서 방영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나는 가끔 종교들에 관한 기이한 얘기나 음모론 따위를 즐기는 편이다.
어쩌면 한번 솔깃하면 탐닉하는 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전 공작왕이라는, 세계 종교를 교묘하게 묶어 놓은 희한한 만화를 미치도록 몰아봤던 것도 내 괴팍한 취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한 나는 좋은 관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이교도적인 불교를 믿는 외가의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공교롭게도 미션스쿨인 중고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봤다고 느낀 것이 오히려 더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다(현실 기독교, 제도화된 한국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러나 최근에 나는 기독교에 대해 더 중립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물론 거기에는 발터 벤야민과 같은 훌륭한 종교적 사상가나 종교적인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주위의 몇몇이 도움을 줬을 게다.

최근에 나는 다빈치 코드를 읽었다.
이번에도 역시 탐닉해 버렸다.
독서속도에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는 내가 이틀을 꼬박 새며 다 읽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최근에 쏟아져 나온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훑어볼 계획이다. 이게 바로 백수의 여유다)
그 소설에 나오는 상당 부분은 나도 어디에선가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확치는 않지만 미학과 철학, 사회학 관련 강의들에서였던것 같다.
특히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자행된 공식/비공식적인 수정과 은폐 노력은 그 때나 이 소설을 읽은 지금이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지나치게 대중적인 서사 구조가 꼭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기독교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반쪽을 열심히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흥미로왔다.
상대적으로 폄하되거나 생략되었던 대지, 여성, 또는 음과 같은 개념 말이다.
(나는 많은 종교, 신화, 사상 등에 하늘/땅, 남/녀, 음/양 등의 대립물이 어우러져 있다고 알고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은유와 세계관은 반쪽의 지평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 의하면 그 반쪽의 지평은 기독교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둠의 편에서 항상-이미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억압받으면서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성스러운 양지의 이름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아무튼 다빈치코드는 종교를 좀더 은유의 세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즐거운 베스트셀러였다.
(당연히 반대의 관점에서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이외의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를 이미 충분히 봐 왔고, 그들은 대체로 세계를 명령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종교가 인간을 좀더 겸손하고 예술적이게 하는 좋은 측면을 이들과 다르게 상상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를 개인적으로 다빈치코드 주간으로 할까 생각 중이다.
마침 며칠 후 영화가 개봉한다.
감독이 론 하워드라는 게 썩 내키지 않지만 소피로 오드리 토투가 나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럼 이만희 전작전은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