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적 대의 명분이 실패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의 형식적 순수함 속에서 그의 교육극들에 의해 함축된 주체 위치로서, 거절의 몸짓, 포기의 몸짓을 윤곽 그리기 위해서 브레히트로 돌아가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첫번째 예스는 윤리적 사명의 수준에 남아 있고 윤리적 위임을 떠맡는 행위를 나타내는 반면, 두 번째 예스는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 윤리적인 것의 보편적 차원의 종교적 중지의 방향을 가리킨다. 윤리적인 것에 대한 ‘예스’는 그 극단으로 운반될 때 조만간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보다 급진적인 예스, 우리의 발 밑에서 근거를 잘라내 버리는 예스, 윤리적인 것의 종교적 중지에 대한 예스를 취하도록 강제한다. 즉, 진실에 대한 ‘예스’는 진실을 위해 거짓말하도록 우리를 강제하고, 싸움에 대한 예스는 도망치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간단히 말해서, 규칙에 대한 예스는 우리를 규칙의 정초적인 예외로 데려간다. 브레히트 자신이 다음과 같이 말하듯이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싸울 수 있으면서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약속을 지키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인정받을 수 있으면서 인정받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를 위해 싸우는 자는 모든 미덕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다. 즉,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것.

 주체는 윤리적 의무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인 완수로서 출현하는 이 보편적인 것의 ‘주름ply’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브레히트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해 관계를 따르도록, 진실이 아프게 하지 않을 때 진실을 말하도록, 거짓말이 우리에게 이득을 줄 때 거짓말을 하도록 강제하는 표준적인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윤리학의 내재적인 자기-부정, 즉 윤리적 보편성을 중지시키는 윤리적 명령이다. 거절이 현저하게 현대적인 현상인 것은 바로 이 ‘윤리적인 것의 중지,’ 명예와 윤리 간의 이 분열(불명예스럽게 행동하라는 윤리적 명령)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브레히트가 우리는 혁명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당신이 더 이상 당신 자신이 아닌’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고 단언할 때, 여기서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대의를 위한 자기-말소 self-obliteration 라는 통상적인 윤리학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말하자면 또 다른 나사를 돌려 말소 자체를 말소해야만 한다. 즉 자기-희생의 감상적인 몸짓으로서의 말소를 폐기해야만 한다. 이 보충적인 포기가 라캉이 ‘주체적 궁핍 destitution subjectiv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종결의 우유 부단함에 의하여 <스트롬볼리>는 행위의 고유한 차원을 나타낸다. 그것은 어떤 행동 action도 아직 수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위 act가 이미 완수된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난다. 카린에 의해 행해진(또는 더 적절하게 말해서 견디어진) 행위는 상징적 자살의 행위, 즉 우리로 하여금 ‘영점 zero point’으로부터, 헤겔에 의해 ‘추상적 부정성 abstract negativity’이라 불려진 절대적 자유의 지점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것을 잃는’ 행위, 상징적 현실로부터의 물러남의 행위이다. … 압제적인 사회적 현실로부터 달아난 그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무서운 어떤 것, 실재계와 맞닥뜨린다. … 조용한, 햇빛 쾌청한 아침의 숏으로 페이드인되고, 분화구 가장자리에 잠들어 있던 카린이 깨어나 다시 두 번 “오, 신이여!”라고 말하지만, 그 똑같은 말이 이제는 “그녀 주위에 가득한 장엄한 정적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로 변형된다.” 헤겔적인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먼저의 상실의 경험이 상실 자체의 상실로 변환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한 순간 전에 잃어버릴까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 전적으로 무라는 것, 즉 이미 그 자체로서 일종의 상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 카린은 신의 동어 반복의 의미를 경험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경험은 “신은……신이다”로 쓰여질 수 있을 것이며, 이 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분노로서의 신과 희열에 찬 평정으로서의 신의 궁극적인 일치를 나타낸다. 우리가 상징적 자살의 영점을 통과한 후, 한 순간 전에는 모든 한정된 존재들을 휩쓸어 가 버리는 격노의 소용돌이로 나타났던 것이 한 순간 기적같이 지고의 희열로 변한다. 우리가 모든 상징적 인연들을 끊자마자. 그리고 라캉적 의미에서의 행위란 상실 속에는 상실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가 포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 이 물러남일 뿐이다. 전날 밤 카린이 마무리지을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상징적 자살의 행위, ‘현실에서의‘ 자살에 엄격히 대립되어야 하는 상징적 현실로부터의 이 물러남이다. 현실에서의 자살은 상징적 소통의 그물망 속에 붙잡혀 있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주체는 큰 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다. 즉, 그것은 죄의식의 승인,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 감상적인 호소로서 기능하는 행위(최근의 리투아니아의 정치적 분신 자살 같은)인 반면, 상징적 자살은 주체를 주체들 간의 회로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지만 라캉이 강조하는 바는, 그러한 상징적 자살이라는 ‘영점’의 통과는 이런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 속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행위 act 란 무엇인가? 자살은 왜 특히 빼어난 행위인가? 행위는 그것의 담지자(대행자)를 근본적으로 변형한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개입(행동)과는 다르다. 행위는 단순히 내가 ‘이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행위 후 나는 문자 그대로 ‘이전과 똑같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체가 행위를 ‘이행한다’기보다 행위를 ‘겪는다'(그것을 ‘통과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주체는 절멸되고 뒤이어 다시 태어난다(또는 태어나지 않는다). 즉, 행위는 주체의 일종의 잠정적인 엄폐, 기억 상실 aphanisis 을 포함한다. 이것이 이 이름을 얻을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가 근본적 설명 불가능성이란 의미에서의 ‘미친’ 이유이다. 그것에 의해서 나는 나 자신, 나의 상징적 정체성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내기에 건다. 그러므로 행위는 항상 ‘범죄’, 말하자면 내가 속한 상징적 공동체의 한계에 대한 ‘위반’이다. 행위는 이 덜 수없는 위험에 의해 정의된다. 그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항상 부정적이다. 즉, 그것은 절멸의 행위, 닦아 냄의 행위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이 생겨 나올 것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의 최종 결과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기까지 하며, 순수 행위의 아니오! NO! 에 대한 관계에서는 엄격히 보아 부차적이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도처에서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출발시킨 행위, <독일 영년> 및 <스트롬볼리>와 동시대적인 행위를 상기해 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1948년 스탈린에 대한 티토의 아니오!, 즉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들과 모스크바에 의해 지배되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간의 분열이다. 여기서는 그 부정적인 차원이 그것의 긍정적인 결과 또는 동기화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다. 정말로 중요했던 것은 집권 공산당이 스탈린의 헤게모니에 아니오!라고 말했다는 사실 단지 그것이었다. … 그것은 순수한 위험의, 거부의,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의 행위였고, 이 거부가 자주 관리의 이데올로기적 기획 속에서 실정적인, 일정한 존재를 얻은 것은 오직 그 뒤에 와서였다. 스탈린에게 ‘아니오!’라고 함으로써, 티토와 그의 동료들은 맞은편 둑에서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제 왜 행위가 실재계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상징적 질서를 배경으로 해서만 가능한가 하는 이유 역시 명확해야 한다. 행위의 위대성은 그것이 달성되는 장소에 엄격히 달려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수많은 정치사가들에 의해 이미 지적되어 왔듯이 티토의 ‘아니오!’는 단지 그것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선언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스탈린에게 저항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러한 전복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것이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게 서구의 정치적 또는 군사적 동맹의 일부가 되라는 큰 압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티토가 ‘편을 바꾸었’더라면, 서방으로 넘어가서 ‘자본주의를 복구’했더라면, 정말로 전복적인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냉전 중 공산주의가 패배한 한 사례를 가졌을 것이며, 서방은 스탈린 제국의 일부를 전유했을 것이다. 티토가 공산주의적 일괴암을 파열시켰던 것은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그의 주장, 정확히 그것에 의해서였다. 라캉적 윤리학에 대한 통상적인 하버마스적 비난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폴리스의 정신, 공동체의 정신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추정되는 것과 관련된다. 라캉의 눈에는 궁극적인 윤리적 성취란 자살적인 황홀경, 명백하게 사회적 차원을 정지시키려는 우리의 ‘죽음으로 향해 있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모든 공적인 행동 그 자체는 주체의 ‘진정한 authentic’욕망, 즉 죽음 충동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제 이러한 비난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진정한’ 자살적 몸짓 gesture 과 공적인 행동은 외면적인 방식으로 대립될 수 없다. ‘자살적’ 몸짓, 행위는 새로운 사회적 연계의 바로 그 기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에 관해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의 결과, 즉 그것이 기존의 상징적 공간을 변형할 방식을 결코 완전히 예견할 수 없다. 행위는 그 뒤에 ‘아무것도 똑같이 남아 있지 않는’ 파열이다. 이것이 비록 역사는 항상 뒤에 설명될 수 있고 해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흐름에 붙잡혀 있는 그것의 작인들로서 우리가 결코 미리 역사의 경로를 예견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것이 ‘객관적 과정’이 아니라 행위들의 율독 scansion 에 의해 지속적으로 중단되는 과정인 한,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새로운 것(행위의 결과로서 출현하는 상징적 현실)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남성적인’ 수행문, 즉 새로운 질서의 위대한 정초 몸짓과는 대조적으로, 그 내재적인 논리에 따르자면 실재적인 것으로서의 행위는 ‘여성적’이라는 가설을 세우기를 감행해야 할 것이다. 라캉의경우, ‘프로이트 학교’ 해산은 ‘여성적’일 것이고, 그는 새로운 ‘대의의 학교 Ecole de la Cause’를 창설하는 그의 몸짓에 의해서만 ‘남성적인’ 편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 계보는 안티고네로부터 자살적인 굶주림에 의하여 런던에서 삶을 마쳤고 로셀리니에게 <유럽 ’51>에서 이레네를 위한 모델을 제공해 주었던 가톨릭 신비주의자이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전사였던 시몬느 베이유 Simone Weil 까지 그려져야 한다. 이러한 전망에서 보자면, 남성적/여성적이라는 차이는 더 이상 능동적/수동적, 정신적/감성적, 문화/자연 등의 차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성적인 활동 바로 그것이 이미 여성적인 행위의 심연적 차원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자연과의 단절’은 여자의 편에 있으며, 남자의 강박적인 활동은 궁극적으로 이 파열의 외상적인 절개를 치료하려는 절망적인 시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 분석’ p95~102 ‘<스트롬볼리> : 자유의 행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