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영화는 소설의 화자 ‘나’를 구현할 수 있을까. 영화 <레베카>는 지난 밤 꿈 이야기를 들려 주는 여성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영화가 진행되면 우리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다. 그러나 영화는 끝까지 그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다. 영화 시작의 꿈 독백은 원작 소설의 설정을 따라서 여자 주인공을 소설의 화자 ‘나’의 위치에 두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 화자의 시점에 닿을 수 없다. 화자 ‘나’로 씌어진 소설은 이를테면 독자가 ‘나의 뇌’로 뛰어 드는 것인 반면에, 영화의 관객은 ‘나의 눈’보다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의 관객은, 또는 관객을 인도하는 카메라는 ‘나의 눈’, ‘나의 귀’와 연결된 뇌까지만 접속할 수 있다. 시청각적 환영을 포함하여, 화자 시점에서 감각된 것까지만 영화는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감각적 정보 처리보다 더 깊은 차원의 뇌, 어쩌면 영혼이라 부를 수도 있을 그것에 연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화 <레베카>의 화자 ‘나’ 전략은 곧바로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 대부분에서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감각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의 첫 장면, 꿈의 독백만이 여자 주인공이 화자로서 현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의 화자는 인물이 될 수 없다. 인물의 독백을 담은 장면에서도 영화는 그것을 카메라가 대리하여 재현한다. 우리는 그 장면의 카메라 서술이 화자의 것이라고 오인하기로 약속했을 따름이다.

나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내내 궁금했다. 영화가 맥심 드 윈터의 죽은 아내 레베카의 이름으로 짙게 덧칠되어 있는 반면에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 자체가 이 영화를 모호하고 신비롭게 만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이름 없는 여자 주인공은 레베카와 등치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생기기도 한다. 두려워 하면서 동시에 적대해야 할 대상, 그리고 대체해야 할 존재인 레베카와 여자 주인공은 치명적인 비밀을 공유한다. 절대 맨들리 저택 바깥으로 새 나가서는 안 되는 그 비밀이 맥심 드 윈터의 아내가 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라는 점에서, 여자 주인공에게는 맨들리의 화재와 함께 도려 낸 레베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맥심의 살인, 레베카의 부도덕을 듣고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사건 은폐의 공범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여자 주인공은 의아한 면이 있다.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이 납득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내 반응이 의아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댄버스 부인의 레베카에 대한 집착 또는 광기와 달리 여자 주인공의 사건 은폐 동참 행위가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의 맥심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분명 표면적으로 여자 주인공이 맥심을 사랑한다는 믿음을 훼손하지 않는다. 레베카가 암 진단 후 죽음을 예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맥심과 여자 주인공은 사건의 죄의식에서 벗어날 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의 감춰진 욕망이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트랙-인, 트랙-아웃 쇼트를 많이 볼 수 있는데, 나는 여자 주인공을 다루는 트랙 쇼트가 전반부에는 트랙-아웃을, 후반부에는 트랙-인을 위주로 구사되고 있다고 느낀다. 이름을 박탈당한 수동적 주체처럼 느껴지는 전반부의 여자 주인공은 트랙-아웃되며 그를 둘러싼 귀족과 하인, 그리고 저택의 공간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의 화자 ‘나’는 차라리 이름을 박탈당한 주체를 표상하기 위해 이 영화에 승계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반면에 맨들리 저택의 주인이자 맥심의 소위 정실 부인이 되고자 하는 후반부에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 카메라가 우리를 여자 주인공의 감정과 욕망에 끌어 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여자 주인공이 맥심의 정실 부인, 맨들리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때는 레베카의 흔적을 없애고 가장 무도회를 개최하려던 때가 아니라, 레베카의 죽음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맹목적으로 맥심의 편에 서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 변화의 순간, 우리가 여자 주인공의 맹목성에 가담하도록 만든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메라의 트랙 쇼트와 같은 영화적 감각을 따라, 우리가 이를테면 영화의 욕망 중추에 연결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그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기점이라 할 만한 순간에 영화가 보여 주는 시점 쇼트가 의미심장하다. 레베카가 죽던 날 진실을 맥심이 털어 놓고, 그 말을 듣는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체현한 듯한 카메라가 소파 위의 허공을 움직인다. “레베카가 소파에 누워 있더군. 아파 보이고 이상해 보였소. 그런데 갑자기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더군…….” 이렇게 맥심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마치 실제 레베카가 소파에서 일어나 움직이며 말하는 장면을 찍고 있는 것 같다. 이 쇼트에는 맥심의 목소리와 여자 주인공의 시선뿐만 아니라 레베카의 보이지 않는 환영까지 동시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이 쇼트 이후에 나는 이 영화가 지탱하는 욕망을 의심해 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 것 같다. 카메라가 여자 주인공의 시선을 빌어 비가시적 환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나는 영화의 욕망 중추와의 연결이 잠시 끊어진 것처럼 느꼈다.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는 것만큼 존재하는 것을 재현하지 않을 가능성, 영화가 가난한 여성과 귀족 남자의 사랑으로 묘사할 만큼 여자 주인공의 계급 상승 욕망을 묘사하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이 쇼트에 담긴 비존재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쇼트는 화자로서의 카메라가 관객을 현혹하고 있다는 자기 폭로, 자기 분열의 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화자는 영화 안에 이름 없이 존재한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이 영화는 어쩐지 슬프다. 이니드와 레베카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중에도 흘러 나오는 처연한 첼로와 피아노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이니드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궁극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과 그 다음에 따라오는 상징적 자살이라는 선택에서 일말의 절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신비한 버스를 타고 떠난 이니드의 다음 삶이 못마땅한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었을지 염려하는 마음이 남아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극도로 까다로운 사람 이니드를 둘러싼 엉뚱한 사건들보다 이니드의 마지막 판단과 선택이 던지는 잔향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이니드가 품고 있던 환상,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 세상에서 자신을 삭제하고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소설 <세계들의 상점>과 <말타의 매>의 일화가 떠오른다. <세계들의 상점>에서 주인공 웨인은 특수한 약을 이용하여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노인을 만난다. 웨인은 한 번 경험해 볼지 말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가정사를 챙기고 일상을 영위하며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그 생각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웨인은 잠에서 깨어 나고 노인은 만족스러운지 묻는다. 웨인은 당황하며 그렇다 답한다. 감자 배급을 받으러 서둘러 떠나는 웨인을 맞는 것은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세계다. 한편 <말타의 매>에서 주인공 샘 스페이드는 건설 현장에서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후 갑자기 직장과 가족을 버리고 사라진 한 남자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았던 일을 말한다. 그 때 샘 스페이드는 그 남자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발견한 그 남자는 다른 도시에서 다른 이름으로, 그러나 놀랍게도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새로운 삶도 그토록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돌아와 있다. 일반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단절은 이처럼 불필요한 일이지만, 지젝은 단절이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과문한 내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아마도 지젝은 나라는 주체와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욕망이 산산조각 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면, 욕망을 위기에서 구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삶의 단절은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설령 나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드는 그것이 공허한 표면에 불과할지라도, 그 공허한 대상에 대한 믿음을 다시 구축하기 위해 단절을 결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서 <말타의 매>의 그 남자가 새롭지만 다르지 않은 삶을 시작한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이니드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책임을 뒤로 하고, 나는 그래도 이니드의 새로운 삶이 이들과 같기를 바란다. 그가 결행한 단절이 위기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여기기를 바란다. 이니드를 태운 신비한 버스가 당도한 곳이 그저 또다른 유령의 세계일지라도, 머저리 같은 타인과 세계의 질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품었을 불만이 다시금 이니드를 무너뜨리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을, 현실의 공허한 표지에 욕망을 매달아 놓고 견딜 뿐이라는 것을 절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니드가 단절 후 마주해야 할 다음 단계일 것이다. 나는 이니드의 그 후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