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어떤 여자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지나는 캠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알버트의 집을 찾는다. 지나는 새로 지을 집에 알버트네 앞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암 벽돌을 쓰고 싶어 한다. 그 사암 벽돌을 갖고 가도 괜찮을지 알버트에게 부탁하려는 지나는 알버트의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한다. 이 때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는 도무지 주제를 파악할 수 없도록 겉돈다. 홀로 사는 노인 알버트는 지난 주에 전화를 받다가 넘어졌고 친구들이 찾아왔는데 넘어진 날에 혼자였는지 사람들과 함께였는지 횡설수설이다. 사암을 주겠다고 직전에 말한 것을 잊었는지 몇 번을 반복하는 알버트와의 이 대화가 영화 <어떤 여자들>의 한 시퀀스를 길게 채운다.

<어떤 여자들>에 담긴 인물들의 말은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처럼 일말의 명확한 정보와 대다수의 파악 불가능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로라가 읽는 의뢰인의 사건 관련 서신 역시 마찬가지다. 몇 분에 걸쳐 서신 내용을 전해 들어도 우리는 로라를 집요하게 찾는 의뢰인이 처한 피해 사건의 내용과 법리적 곤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목축업자 여인은 과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과묵함이 파악 불가능한 말이 일으키는 혼란을 줄여주는 덕분에, 역설적이게도 서사의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목축업자 여인은 엘리자베스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 후 헤어진다.

이 영화를 서사와 메시지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사를 온전히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과장하자면 영화 곳곳에 삽입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처럼, 귀기울일 것 없이 지나치듯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음성과도 같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시퀀스는 앞서 말한 지나와 알버트의 대화 장면이다. 여기서 횡설수설하던 알버트는 집 앞 거친 초원에서 들리는 메추리 소리를 흉내 내며 마치 “How are you?”와 같이 들린다고 말한다. 지나는 알버트가 흉내 내는 다른 메추리 소리에 이내 “I’m just fine”이라고 응답한다.어쩌면 이 때가 지나와 알버트가 온전하게 대화하고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가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의례적으로 건넨 첫 인사에서는 실패한 알버트의 안부가 메추리의 소리를 통해 응답한다. “How are you?”와 “I’m just fine”은 이 영화의 다른 언어와 달리 감정과 서사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희박한 주체의 감정과 서사의 여백을 자연과 사물에 대한 감각이 채운다. 누군가는 이것이야말로 서부 영화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대지의 물성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미국 북서부 몬태나주 소도시와 외곽 자연의 겨울에 대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빛과 공기와 소리가 이 영화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물질적 감각이 이끄는 느낌은 여러 층위가 혼재되어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메추리의 소리처럼 느슨하게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대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자와 주체의 구분을 뒤섞고 혼동시키기도 한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고 있는 로라 옆에서 들리는 그렁그렁 코 고는 소리가 뒤늦게 로라의 반려견이 내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지표가 된다. 또는 로라가 들른 쇼핑몰에서 인디언 복장을 한 사람들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지켜 볼 때에는 미국의 역사적 타자가 상기되기도 한다. 그리고 물론 목축업자 여인이 말을 끌고 목장을 나설 때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눈 덮인 거대한 산맥이 물자체적 물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물적 감각은 의미를 무화하기도 하고 대리하기도 하며, 대체하기도 한다. 감각적 정보가 지닌 이런 복잡한 면모를 특정한 의미망으로 수렴시킬 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보탤 수 있는 말은 리빙스턴 시내의 로라, 도시 외곽 캠핑 지역의 지나, 그리고 벨프리라는 시골 마을 목축업자 여인이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양태의 타자성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낮은 밀도의 정서 안에서, 그 경험을 스치듯 감각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본다면 영화 안에서 세 여성 인물이 남성, 여성 타인과 관계 맺는 양상에 대한 페미니즘적 가능성도 포괄해 생각해 볼 여지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왜 세 인물을 각자의 지평에 따로 존재하게 두지 않고 굳이 연결점을 만들려 하는 걸까. 로라의 내연남이 지나의 남편 라이언이라는 것, 목축업자 여인이 리빙스턴 시내 법률 사무소에서 기어코 로라를 지나치듯 만난다는 것이 이 황량한 여백의 세계를 사는 세 여인에 대한 감각을 운명적으로 묶고 싶게 만든다. 내가 감각한 것은 그들의 운명일까 그것을 덮고 있는 무심한 물리적 세계일까.

몇 년 동안 깊은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상실감과 자책이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나를 갉아 먹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하기가 짐짓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진되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그리고 불안만 남은 것 같았다.

이제 조금씩 폐허를 수습하고 있는 듯 하다. 내 얘기를 마음 열고 들어 줄 상담자를 찾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감정을 진정시킨 후 한 일은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내가 할만한 활동을 찾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온라인 필사 수업을 들었다. 옮겨 적는 글에 이내 염증을 느끼고 나는 다시 영화를 찾았다. 영화 비평 읽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다시 기억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리뷰 쓰기 모임도 찾았다. 글쓰기는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게 끝없는 고통의 과정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일이라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상담자의 조언이 옳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 덕분에 오랜만에 본 영화를 생각하고 정리하게 되었다. 글과 생각은 언제나 모자라지만 오랜만에 블로그에 영화 보고 쓴 글을 남길 수 있어 좋다. 더욱 좋은 건 리뷰 쓰기 모임에서 한 해 동안 쓴 글을 책으로 엮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즐기지는 못하지만 나를 구해 주는 일이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영화 리뷰 쓰기 모임에 뒤늦게 합류해 쓴 영화 두 편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도 기록으로 남겨 둔다.



사랑에서조차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

–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가 우화적 세계를 제시하는 방법은 인물들로부터 감정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간으로서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 상대를 찾는 순간에도 인물들은 좀처럼 상대에게 웃음 짓지 않는다. 냉혹한 여인이 데이빗의 형을 죽였을 때에도 데이빗은 복수라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눈에 칼을 들이미는 동안에도 데이빗의 눈빛에는 두려움 하나 없다.

인물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인물에 동일시하지 않고 신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사건을 관찰할 수 있도록 채택한 연출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 억압 받고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적 상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정작 감정적 상호작용과 자유의지는 마비된 사회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다.

감정적 동일시를 원천차단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안된 내레이션을 통해 근시 여자는 데이빗이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데이빗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억지로 만드는 데 실패하는 전반부와 사랑하는 감정을 감추는 데 실패하는 후반부로 나뉘는데, 수용소처럼 싱글들을 모아 놓고 짝짓기를 강제하는 호텔이나 이 커플 이데올로기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며 사랑을 금지하는 게릴라 조직 모두 공히 억압하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감정의 자유의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다.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 세계에서 사랑을 다루는 태도는 기괴하고 어리석다. 사랑할 상대를 찾거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면적 동일성을 찾고 만드는 일이다. 근시 여인이 데이빗도 나처럼 근시인 것을 보고 사랑에 빠지거나 절름발이 남자가 코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벽에 얼굴을 처박아서라도 코피 흘리는 사람이 되려는 모습들. 감정 교환이 불구가 된 이 세계에서는 각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각자의 춤을 추는 적막에 찬 장면처럼 모든 행위의 본질적 효과가 사라지고 우스운 몸짓만 남는다.

근시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데이빗이 근시 여인처럼 똑같이 눈 멀기 위해 자신의 눈을 칼로 찌르려는 마지막 시퀀스는 안타까운 촌극이다. 이 시퀀스는 눈 먼 채로 돌아올 데이빗을 기다리는 근시 여인이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이는 감정의 자유의지와 자기 존엄을 위한 투쟁에 각성하고 고군분투한 데이빗과 근시 여인조차 사랑에 대한 체제 이데올로기의 맹목적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호텔과 게릴라 조직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이 세계에서 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증명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로 같아지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감정을 표정과 목소리에 담는 법을 모르는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방법이 없고 사랑에서조차 그저 주어진 세계의 선택지에서 배회할 뿐, 자유로운 세계는 없다고 이 영화는 부조리하게 말한다.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

– <쓰리 타임즈>

영화 <쓰리 타임즈>의 원제는 최호적시광(最好的時光), 가장 좋았던 때의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1966년, 1911년, 그리고 2005년 각 시대를 배경으로 연인으로 묶인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각 시대에서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품고 보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내 놓지 않는다. 1966년을 다룬 첫 번째 챕터 <연애몽>만이 명료하게 떠올라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에 반해 1911년을 다룬 두 번째 챕터 <자유몽>에서 기생(서기)과 개화파 시인(장첸)의 관계는 억압되어 침잠하고 있으며 2005년을 다룬 세 번째 챕터 <청춘몽>에서 진정(陳靖, 서기)과 아진(阿震, 장첸)은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다. 각 챕터의 부제목은 그것이 충만하여 빛나는 때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결핍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빛나는 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같고 카메라는 이따금 그들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다.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유몽>에서 예외적으로 할애된 유성영화의 순간이 영화적으로 빛나는 것을 제외한다면 나는 1911년과 2005년의 이야기는 빛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던 때인 1966년의 빛나는 순간을 상기하며 1911년과 2005년을 반추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치가 순차적이지 않고 1966년 – 1911년 – 2005년인 것은 1966년이 참조점이 되어 그보다 과거와 그보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닐까. 1911년과 2005년에 대한 1966년의 대답 또는 그 반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 대한 내 원경험이 오직 <연애몽>에서 서기, 슈메이의 놀란 웃음과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노래 Rain and Tears를 둘러싼 간절하고 애틋한 감정의 응축으로 남은 것도 이 때문일까.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은 1966년 입대를 앞둔 한 청년(장첸)과 당구장에서 일하는 여인 슈메이(秀美, 서기)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만 가오슝(高雄)의 한 당구장을 즐겨 찾는 청년은 본래 슈메이가 오기 직전 직원 하루코(春子)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슈메이의 손에 넘어가서야 비로소 연애편지가 되었고, 군인이 된 청년은 휴가 중 다른 곳으로 떠난 슈메이를 애타게 찾고 결국 만나고 끝내 연인이 되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슈메이와 청년이 연인이 되기 직전 끝난다는 점에서 <자유몽>, <청춘몽>과 마찬가지로 <연애몽> 역시 연애가 부재하고 그것을 갈구하는 인물이 거기에 가 닿으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챕터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 청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동안 우리는 감정을 알아채기 힘든 인물들의 행위를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이 하루코에게 건네는 편지에서 감정의 단초를 알 수 있을텐데, 영화는 이 편지를 받은 하루코의 옅은 웃음 외에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편지의 내용은 하루코가 떠나고 새로 온 직원 슈메이가 읽는 동안 청년의 목소리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영화는 하루코가 아니라 슈메이를 통해 청년의 마음을 들려 주고 싶은 것이다. 편지에는 청년의 상실과 실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담겨 있다. 청년은 얼마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두 번 대학 시험에 떨어졌으며 곧 군대에 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은 당신이 있는 당구장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위로 받을 누군가가, 아무라도 필요하다고 구애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하루코와 슈메이는 청년이 품는 욕망의 대상이고, 영화는 청년의 욕망을 제 것으로 하여 따라간다.

그러나 <연애몽>은 (그 누구와도)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년의 욕망과 감정을 청년을 통해 드러내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욕망의 실현 가능성을 알려 준다. 뒤늦게 알게 되는, 슈메이가 청년의 편지에 답장을 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하루코의 편지를 전해 읽는 처음부터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슈메이의 표정과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편지를 읽으며 웃음 지을 때, 자이(嘉義)로 떠나는 배 위에서 쓸쓸한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후웨이(虎尾)의 당구장에서 청년을 보고 놀라움의 웃음을 지을 때. 슈메이의 응답이 있을 때 영화는 감정을 고양시키고 이를 통해 청년의, 또는 이야기의 욕망은 정당성을 얻고 배가된다. 청년이 편지에 적은 노래 제목이 카메라가 슈메이의 표정을 가까이 지켜보는 순간 노래가 되어 흐르듯이 욕망은 슈메이의 응답을 통해 환상이라는 실체를 얻게 된다. 슈메이의 응답이 만드는 환상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응답 없는 하루코가 필요했을 것이리라. 청년이 가오슝에서 자이로, 그리고 후웨이로 슈메이를 찾아 헤매게 되는 동력 역시 숨겨진 슈메이의 응답이다.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조심스레 꼭 붙잡는 청년과 슈메이의 손을 클로즈업하기까지 이 둘만의 공간을 섣불리 할애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는 당구대나 문,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침범해 들어온다. 후웨이의 당구장에서 재회한 청년과 슈메이가 벅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당구 치는 손님이 이들을 가리고 관객의 시선을 방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야기가 품은 욕망과 달리 카메라는 청년과 슈메이를 타인 다루듯 한다. 마치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힘겹게 찾아 내야 할 것처럼. 마치 사심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느 공간에서 우연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카메라는 이야기의 욕망과 힘겨루기를 벌이는 것이다. 이야기가 인물과 함께 욕망을 품고 나아가는 동안 카메라는 인내심을 가지고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움직임만 지켜보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이야기가 지닌 욕망의 에너지를 응축, 강화한다. 두 남녀가 손을 꼭 움켜쥐는 마지막 클로즈업 쇼트는 카메라의 거리 두기가 더 이상 이야기의 욕망의 인력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이다. 카메라가 이야기의 욕망을 끝내 승인하고 그곳에 달라 붙어 버리는 영화적 희열의 순간이다.

<연애몽>은 희열에 도달하기 위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영화적 대답 같다. 달리 말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적 태도 같다. 욕망 – 사랑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돌이켜 보지만 끝내 긍정하고, 그것을 소비하기보다 정당한 방식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진다. 슈메이의 응답만이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욕망이 대상을 착취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연애몽>이 다루는 태도를 대척점에 놓고 <자유몽>과 <청춘몽>을 생각한다. <자유몽>에서 지주의 아들인 개화파 시인은 기생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착취한다. 시인과 기생 모두 신분 제도와 가부장제에 압도되어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독히 비겁한 인물은 소위 개화파 시인이지만 말이다. 반면 <청춘몽>에서 진정과 아진의 눈빛은 서로를 갈망하는 순간에도 공허하다. <자유몽>과 달리 어떤 것도 허용되기 때문에 어떤 것에서도 희열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 <자유몽>과 어떤 것도 허용되는 <청춘몽>,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연애몽>. <연애몽>은 <자유몽>과 <청춘몽>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공간적으로도 그렇다. <자유몽>의 유곽과 <연애몽>의 당구장, 그리고 <청춘몽>의 도로로 공간 범위는 점진적으로 확장된다.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시간 역시 <자유몽>은 몇 달, <연애몽>은 몇 일, 그리고 <청춘몽>은 몇 시간의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애몽>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구성된 시공간의 범위에서도 <자유몽>과 <청춘몽> 사이의 중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빛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나는 첫 번째 챕터 <연애몽>이 다른 두 챕터를 안타까워 하며 반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차라리 <연애몽>은 반추할 대립자가 불필요하다면 어떨까. 허우샤오시엔은 시대의 관계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역사의식을 반영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허우샤오시엔 개인의 역사와 노스탤지어가 스며들어 있을 터다. 그는 그것을 읽어 주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역사의식으로 치환하면 이야기도 역사의식도 얄팍해져 버리지 않을까. 1911년의 우창봉기나 1966년 대만의 징병제, 2005년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 각자가 지닌 순간의 역사적 다층성을 억압하거나 소진시키지 않고 이 영화를 선해하기 위해 <연애몽>의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