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xEngels 홈페이지에서 퍼옴

알기 쉬운 마르크스주의

Chris Harman                                   

1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왜 필요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사회 불안정과 경제 공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고용주들한테 착취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밖의 것은 먹물들한테나 맡겨 두라.” 우리는 사회주의자 투사들이나 심지어 노조 운동가들 중에서도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추상적”이라고 말한다. 또,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하지만 실제 생활 상식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다고도 말한다.   이런 말은 사실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강력히 선전하는 견해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의도는 마르크스주의란 모호하고 복잡하며 지루한 교조(敎條: ‘ism’)일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이런 주장의 대변자들이, 자기들은 깨닫지 못할지 모르지만, 보통은 자기들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한테 사회적 문제에 관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면 이런저런 식의 일반화를 해가며 대답할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야.” “열심히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기업인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자리 줄 사람도 없어.” “도덕적 타락으로 그 나라가 그 꼴이 되었지.” 도대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서건 들을 수 있을 지경이다. 공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술집, 다방, 식당, 그 어디서건 말이다. 어느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다. 위의 견해들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회 “이론”들이다. 누군가가 자기는 이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정리해 둔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태도(이론 경시 풍조–옮긴이)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젼 등 소위 대중 매체들이 한결같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한 의도적인 해석을 우리 머리에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들은 우리가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떠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 다양한 주장에서 거짓된 바를 인식해 내지 못한다면 사회 번혁을 위해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없다.  

이것은 150년 전 처음으로 입증되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영국 북서부 지방은 공업이 발달하여 수십만의 남녀 성인 노동자와 미성년 노동자들이 비참한 수준의 임금을 받는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생활 조건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열악한 생활 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은 최초의 노동자 대중 조직을 결성하여 싸웠다. 그것은 최초의 노동조합이었고, 영국 최초로 노동자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인민헌장 운동(차티즘: Chartism)이라 불렀다. 물론, 인민헌장 운동은 소집단으로 이루어진 다른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도 병행되었다.   노동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문제가 즉각 부과되었다. 어떤 이들은 사회 지도자들을 평화적으로 설득하여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들 말했다. 즉, 대중의 ‘도덕적 힘’, 다시 말해서 평화적 운동으로도 노동자들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에 근거하여 조직하고 시위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과는 패배와 사기저하였다. 어떤 이들은 ‘물리적 힘’을 사용할 필요는 인정했는데도, 이 힘이 사회로부터 유리된 매우 작은 음모 집단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의 투쟁도 패배와 사기저하로 끝나고 말았다. 또,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대적하지 않고 경제투쟁을 통해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중의 행동이 뒤따랐다. 1842년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 영국 북부의 공업 지대에서 일어나 4주일이나 계속되었지만, 배고픔과 궁핍으로 인해 작업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패배를 거듭하던 노동운동의 제1단계의 끝무렵인 1848년에 독일인 사회주의자인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란 소책자에서 자기 사상을 남김없이 명확하게 밝혔다. 그의 사상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당시 노동운동에서 제기된 현실 문제들을 취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사상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가 140년 전에 썻다고 썼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사실, 마르크스가 맞서서 논쟁을 벌였던 온갖 사회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인민헌장 운동가들이 ‘도덕적 힘’이냐 ‘물리적 힘’이냐 하는 것을 논했듯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도 ‘의회 사회주의’냐 ‘혁명적 사회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다. 혁명가들 중에서 테러리즘에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이 1848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관념론  마르크스가 사회 문제들을 해석하려고 저술 활동을 하고 있을 당시,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그 이전 세대가 꿈도 꿔보지 못한 규모의 부(富)가 축적되고 있었다. 역사상 최초로 인류가 전(前)시대 고통의 원인이었던 자연적 재앙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기술 혁신과 그에 따른 엄청난 부의 축적이 대다수 대중의 생활 향상을 가져오진 못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녀 성인 노동자들과 미성년 노동자들의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던 그들의 조상들보다 훨씬 열악한 것이었다. 그들의 임금은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대량 실업의 주기적 발생으로 아예 최저 생계비를 훨씬 밑돌 정도였다결국, 그들은 비참하고 열악한 빈민가로 내몰려 적절한 의료도 받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시달리곤 했다. 자본주의 공업화는 전반적인 행복과 복지를 가져오는 문명의 발전이 아니라 더욱 혹심한 빈곤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이를 주목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영국 시인 블레이크(Blake)와 셸리(Shelly), 프랑스 사회주의자 푸리에(Fourier)와 쁘루동(Proudhon), 독일 철학자 헤겔(Hegel)과 포이에르바흐(Feuerbach) 같은 이들도 자본주의 착취 현상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헤겔과 포이에르바흐는 인간이 처한 이 불행한 상태를 ‘소외'(alienation:Ent fremdung)라고 불렀다. 요즘도 흔히 듣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흐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가 과거에 했던 행동에 지배되고 억압받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神)이란 관념을 만들고 신 앞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는, 자기가 만든 것(즉 신)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낀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지적했다. 그리고, 사회가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고 ‘소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이 ‘소외’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사회의 부를 창조한 사람들, 즉 직접 생산자들의 삶에 적용하였다. “노동자는 부를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의 생산 능력과 생산 범위가 증대하면 증대할수록, 더 가난해진다…… 물건의 가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인간의 가치는 하락한다…… 노동의 산물은, 소외된 그 무엇으로서, 즉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어떤 힘으로서 노동과 대립하게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사회 문제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설명은 여전히 종교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사회의 불행은 신이 자기들에게 명령하는 바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를 버릴 수가 있다면야 모든 게 잘 될 텐데……” 이와 비슷한 견해는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보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르크스 시대의 설명과의 차이라면 차이랄까. 현대의 통속적인 견해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전에 개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기의 ‘이기심’이나 ‘물질주의'(혹은 ‘집착’)를 버릴 수만 있다면야 사회는 자동적으로 나아질 텐데……”   이와 관련있는 어떤 견해는 ‘모든’ 개인이 아니라 권력을 쥔 ‘소수’의 핵심적 인물들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이치를 깨달아 반성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라는 한 영국인 사회주의자는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좀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어용 노조 지도자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용자들의 범죄를 “실수”라고 부르는지 주시해 보라. 마치 약간의 분규만으로도 대기업을 설득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견해들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못박았다. 사람들이 ‘관념'(ideas)을 갖는 것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견해들이 관념을 인간의 생활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념은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의 종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기심”(혹은 “탐욕”)을 예로 들어 보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심을 조장하고 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이기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억누르기 어렵다. 아이들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하는 젊은 아버지 노동자나 쥐꼬리 만한 월급을 부모에게 송금하고자 하는 효녀 노동자는, 처자 부양과 부모 봉양을 위한 유일한 길이 끊임없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해서 더 나은 직장을 얻고 좋은 조건의 잔업을 얻으며 인사고과에서 좋은 점수를 얻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사회의 노동자들은, 개개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기심’이나 ‘탐욕’을 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훨씬 더 웃기는 얘기다. 만약 어떤 대기업 회장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당해 사회주의 관념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할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들한테조차 관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관념을 형성시킨 모태인 사회 구조가 중요한 것이다.   요점을 달리 설명해 보자. 관념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관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사회에 살고 있다. 제도 언론과 제도 교육이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導)하고 있는 관념이 옹호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어떻게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이념기구가 강요하는 관념과 완전히 다른 관념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의 일상 경험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념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요즈음 왜 “의식화”한 노동자들이 70년대보다 늘어났는가 하는 것을 단순히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째서 급진적 관념에 전보다 더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로서, “위인”들의 영향을 설명하려면 왜 대중이 그들을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이 설명되어야 한다. 예컨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에 따르기로 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말해 봤자 헛일이다. 결국, 위인들을 대중 최면술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사회 생활의 무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폴레옹이나 레닌이 제안한 바가 옳은 듯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관념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관념이 역사를 바꾼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관념의 이면에 숨어 관념을 형성시킨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할 때만 관념의 혁명적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2 역사에 대한 이해

  관념 그 자체가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그 이전의 사상가들처럼, 역사를 이해하려면 인간을 물질 세계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행동은 다른 자연물(自然物)의 행동처럼 물질적 힘들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자연계(自然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일부였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상가들을 유물론자(materialist)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여러 가지 종교적·관념론적 역사관에 비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에 관해 과학적으로 논하려면 더 이상 신에게 기도한다거나 사람들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하는 것은 ‘신비한 것’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행동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모두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물리학에도 그릇된 “이론”이 있듯이, 사회과학에도 잘못된 이론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첫째 예는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계적인 유물론의 시각으로서, 인간이 몇 가지 측면에서 “본성적”(natural)으로 행동하는 동물이라는 견해이다. 늑대가 ‘본성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고 양이 ‘본성적’으로 온순하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격적이고 지배욕이 강하며 경쟁적이고 탐욕스럽다는 것이다.(여기에는 여성이 ‘본성적’으로 부드럽고 남자에게 순종적이며, 부모와 남편을 공경하고 매사에 수동적이라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해를 근래에 정식화한 것이 바로 ‘인간·동물 동일 본성론'(the naked ape view)이다. 이 지극히 반동적인(reactionary) 주장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격적이라면 사회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으례 똑같을 테니 혁명을 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하여도 그 사회는 항상 실패작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human nature)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전의 많은 사회에선 존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수'(Sioux)족 인디안들한테 지능검사를 실시하려 했던 과학자들은 ‘수’족 인디안들이 왜 서로서로 협력해서 답을 구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인디안들이 사는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공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럽인과 처음 대면한 에스키모인들은 도대체 “전쟁”이란 말(그들에게는 ‘말’이 아니라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이 뭘 뜻하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쓸어버린다’는 생각은 그들한테는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에서는 젖먹이를 산속에다 버려 놓고 추위를 이기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당연한'(즉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걸로 여겼다.  

또한, ‘불변의 인간 본성’론은 역사 속의 대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 또는 잉카제국의 찬란한 영광, 근대 공업 도시 등에 살았던 인간들이, 중세의 진흙 오두막집에 살았던 무지한 농민과 같은 수준—동렬—에 놓이게 된다. 거기서 중요한 건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지, 그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이 세운 장대한 문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사회가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먹이는 데 성공한 반면, 어떤 형태의 사회는 수백만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굶겨 죽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인간 본성’론자들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일 뿐이다.

 

두 번째 예도 역시 많은 이들이 신봉하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서, 이 또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나온 것인데,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물이 써커스에서는 정글에서와 다른 행동을 하도록 길들여질 수 있듯이, 인간의 행동도 이와 유사하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인즉,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회를 통제하기만 한다면 ‘인간 본성’도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확실히 ‘불변의 인간 본성’론보다 진일보한 견해이지만, 사회 전반이 바뀔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역시 실패작이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현재의 사회 조건 때문에 제약을 받는다면, 사회 조건을 딛고 넘어서서 제어장치(制御裝置)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아는 이가 도대체 누가 있을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여러 압력을 마술적으로 물리칠 수 있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가 써커스에 나오는 동물이라면 누가 사자 조련사란 말인가?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인간 본성 불변’론자들처럼, 사회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게 되거나, 혹은 변화는 신이나 위인 또는 개개 관념의 힘과 같은 사회 밖에 있는 어떤 것이 만들어 낸다고 믿게 된다. 이쯤되면, 이들의 “유물론”은 신판(新版)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런 “이론”은 결국에는 반드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부분이 사회를 초월하고 있는 걸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류의 견해는 그러므로 흔히 반동적이다.   오늘날 이 견해의 지지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스키너(Skinner)라는 미국의 보수 심리학자이다. 그는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끔 그들을 ‘제약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므로 그가 주장하는 “제약한다”는 말은 사람들을 그 사회에 순응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세 번째 사이비 유물론적 견해는 세계의 모든 불행을 인구 증가 탓으로 돌린다. 이 견해는 주창자인 18세기 말의 영국 경제학자 맬서스(Malthus)의 이름을 따라서 맬서스 학파(Malthusian)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구 증가’론은, 예컨대 미국에서 150년 전에는 1천만 명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밖에 생산되지 못했는 데 반해, 지금은 2억 명을 먹이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견해는 식구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노동할 수 있고 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잊고 있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서술한 그릇된 설명들을 ‘기계적’ 혹은 ‘천박한’ 유물론의 여러 형태라고 불렀다. 이들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일부일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망각하고 있다.     역사 유물론   “우리는 인간을 의식, 종교 또는 그 밖의 무엇을 통해서든 동물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생활 수단, 즉 의식주의 수단을 생산(강조는 옮긴이의 것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한다.”—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사회 발전 과정을 독특하게 설명하였다.   인간은 유인원의 후손인 동물이므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관심거리는 배를 채우고 외부의 기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동물이 이러한 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타고난 생물학적 육체 조건에 달려 있다. 늑대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본능에 따라 결정된 방법대로 먹이를 사냥해 잡아 먹음으로써 살아 간다. 또, 추운 밤에도 털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새끼들은 타고난 행동 양식대로 기른다. 그러나, 인간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 10만 년 내지 3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인류는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활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땅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음식이나 물을 담을 그릇도 없었고, 식량은 낱알을 줍거나 돌로 맹수를 때려 잡아 해결했다. 글씨를 쓸 줄도 몰랐고 손가락 셈 이상의 계산을 할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웃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자기네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실제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10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 인류의 신체 조건과 유사하고, 3만 년 전 인류의 신체 조건은 현대인과 똑같았다. 만일 혈거인을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시켜 양복을 입혀 번화가를 걷게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이상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C. Gordon Child)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무렵의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지질학적 기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약 2만 5천 년 전에 인간의 문화적 진보가 막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이래로 인간 육체의 진화는 사실상 멈추어 버렸다.”  

또 다른 고고학자 리키(Leaky)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2만 5천년 전의 오리그네시아(Aurignacian) 문명과 막달레니아(Magdalenian) 문명에 살던 인류와 현대 인류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엄청나지만, 신체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다.” 여기서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란, 동물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서로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는 것(예컨대, 모피나 양털로 옷을 만드는 법, 점토로 토기를 만드는 법, 불을 만들고 집을 짓는 법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미 처음부터—육체상의 진화가 멈추기 시작하고 문화적 진보가 이제 막 시작되던 처음부터 이미—인류의 생활은 다른 동물의 생활과 크게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한테만 있는 육체적 특징, 즉 큰 뇌수와 사물을 다룰 수 있는 사지 등을 사용해 자기의 필요에 맞게 주의 환경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 조건의 변화 없이도 광범위하게 다양한 자연적·사회적 조건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단순히 자기를 둘러싼 조건에 반응만을 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환경을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맹수를 공격하기 위해 돌과 막대기를 사용했고, 열과 빛을 얻기 위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불을 가지고 횃불을 켰으며, 동물 가죽과 식물로 몸을 가렸다.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스스로 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른 돌멩이를 이용해 석기를 만드는 것과 결국은 자신이 심은 씨앗에서 식량이 자라게 하여 토기에 그것을 저장하는 것과 동물을 길들이는 것을 배웠다. 비교적 최근에—100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하면 불과 5천 년 전에—인간은 광석을 유용한 도구와 효율적인 무기의 재료인 금속으로 변형시키는 비법을 알아냈다. 이 모든 진보로 인간은 더욱 쉽게 먹고 입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 생활 그 자체의 조직에도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인간의 생활은 사회적이었다. 여러 사람의 공동 노력을 통해서만 맹수를 죽일 수 있었고, 식량을 모을 수 있었으며, 불을 계속 지필 수 있었다. 즉, 인간은 협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밀접한 협동을 통해서 인간은 또한 소리를 내서 언어를 발달시킴으로써 서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사회 집단은 단순했다. 건장한 수십 명의 인간 집단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만큼의, 자연적으로 자라는 농산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종류의 생활을 해야 했다. 또, 식량을 저장하는 수단이 없었으므로 사유 재산이나 계급 분화가 있을 수 없었고 전쟁 동기를 유발시킬 어떤 노획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러한 양상을 띤 사회가 지구상 곳곳에 수백 군데나 남아 있었다. 남·북미 대륙의 어떤 인디언 부족들이나, 아프리카의 적도 부근과 태평양 연안의 민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등이 그런 사회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영리하지 못하거나 더 “원시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호주의 원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수천종의 식물과 수십 가지의 상이한 동물들의 습성을 곧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인류학자 퍼스(Firth)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호주의 종족들은…… 사냥터에 있는 잡아 먹을 수 있는 동물, 물고기, 새 등의 습성과 특징, 서식처, 그리고 계절에 따른 이동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바위, 돌맹이, 밀랍, 고무, 식물, 풀뿌리, 나무 껍질 등의 외적 속성뿐 아니라 그보다 덜 분명한 속성까지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을 일으키는 법과, 고통을 덜고 출혈을 막는 법 및 신선한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키기 위해 열을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열을 이용해 어떤 나무는 딱딱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나무는 부드럽게 만들 줄도 안다…… 그들은 적어도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조수(潮水)의 운동과 혹성의 주기 및 계절의 순서와 지속 기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들은 풍향·풍속 체계와 연간 습도 및 기온 유형과 같은 기후의 변동이 자연계 생물체의 성장과 생활상의 끊임없는 변화와 서로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다…… 게다가, 잡아 먹기 위해 죽인 동물에서 나온 부산물을 현명하고도 경제적으로 이용할 줄 안다. 예컨대, 캥거루 고기는 먹고 다리뼈는 석기를 만드는 데 도구로 사용하거나 쐐기로 이용하고, 근육은 창을 묶는 데에, 발톱은 밀랍과 섬유를 갖고 목걸이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기름은 붉은 황토와 섞어 화장품을 만들고 피는 목탄과 혼합해 페인트로 쓴다….

.. 그들은 간단한 역학적(力學的) 원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부머랭(일종의 무기로서 던지면 곡선을 그리며 다시 돌아옴–옮긴이)이 정확히 곡선을 그리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사막에서 생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영리’했던 것이다. 그들이 터득하지 못했던 것은 씨를 뿌려 자기들의 식량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조상도, 지구상에 존재해 온 기간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불과 5천 년 전에야 비로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부(富), 즉 인간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신기술의 발전은 항상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적 분업 형태, 즉 새로운 사회 관계를 생가나게 했다. 예컨대, 인간이 처음으로 씨를 뿌리고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식량을 기르고 토기에 그 식량을 저장하는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고고학자들이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인간은 동물을 사냥하는 데뿐 아니라 이제는 땅을 개간하고 추수를 하는 데도 협력해야 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할 수 있었고, 식량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과 재화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최초의 도시들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저 식량을 마련하는 데에만 종사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이 최초로 생겨날 수 있었다.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도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한 부싯돌 채광과 금속 채광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전체 공동체 성원응ㄹ 위해 초보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욱 불길한 것은 저장된 잉여 식량이 전쟁 동기를 유발·제공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주위의 세계를 다루거나 자연을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자신들의 생활을 변형시킨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과정을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 노동력과 생산수단 및 양자간의 기술적 관계–옮긴이)의 발전이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관계–옮긴이)를 변화시키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사회까지 변화시킨 과정이라고 요약했다.   더 최근의 예들이 많이 있다. 3백 년 전에 서구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땅을 일구고 살면서,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기술을 가지고 식량을 생산했다. 그들의 사고(생각)의 범위는 그 지역 촌락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관념은 그 지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다수는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2백 년 전쯤에야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공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생활은 철저한 탈바꿈을 했다. 이제 그들은 조그만 촌락이 아니라 대도시에 살게 되었고, 결국 읽거나 글씨 쓸 줄 아는 것을 포함해 그들의 선조들은 꿈꾸지도 못했던 기술들을 배울 필요가 있게 되었다. 또,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지구의 반을 횡단해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성직자들이 머리에 주입한 고리타분한 관념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생산에서 물질적 혁명은 또한 생활 양식과 관념에서도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변화가 지금도 막대한 수의 사람들한테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방글라데시나 터키 촌락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이나 독일의 공장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지녀 온 오랜 관습과 종교적 태도들의 더 이상 적합하지 못하다고 깨닫는 것을 보라. 아니면, 지난 50년간 다수의 여성들이 가정 밖의 직장일에 익숙해지면서, 여성이 실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이전의 태도에 어떻게 도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라.  

사람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사회가 조직되는 방식과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이것이 마르크스 이전의(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사상가들, 즉 관념론자들과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사회 변동, 즉 역사의 비밀이다.   관념론자들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변화는 관념이 바뀌면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물질 세계의 규정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객관적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주위 세계의 제약을 받지만, 역으로 그들은 세계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하여 세계를 더욱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자기들 자신까지 변화시킨다.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식주를 만들어 내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과학(technology)의 발전이 자동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낳는다거나 새로운 발명이 자동적으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때로 기술과학 결정론 technology determinism이라 부른다)를 배격했다.   역사를 보면, 의식주의 생산을 촉진하는 관념들이 기존의 사회 형태나 사람들의 태도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듭해서 이러한 관념들을 배척한 적이 있다. 예컨대, 로마제국에서는 일정한 크기의 땅에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방법에 대해 여러 견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방안들을 채택하게 되면 채찍의 공포에 시달리며 노동하는 노예로부터 수확을 얻어낼 때보다 귀족이 일에 더욱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방안들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18세기에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했을 때,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의 공업 발전이 런던 기업가들의 이익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 만약 누군가가 성우(聖牛)를 죽여 인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쥐고기를 가공처리해 영국인들에게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공급하는 방법을 내놓는다면, 그러한 방안들은 기존의 편견 때문에 묵살당할 것이다.  

생산 발전은 낡은 편견(선입관념)과 낡은 사회 조직 방식(구체제)에 도전은 하지만, 자동적으로 이러한 구식 편견과 구식 사회 구성 형태를 뒤집어 엎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막기 위해’ 싸운다. 그래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 만약 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승리하면, 그때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실시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은 정체하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조차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풀어 보자.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 발전하면, 발전된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 및 그것이 형성한 낡은 사회관계의 기초 위에서 성장한 관념들과 상충하게 된다. 이 충돌에서 새로운 생산력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아니면 낡은 체제 편에 서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진보하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가 틀에 박힌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물거나 심지어는 퇴보하기까지 한다.

3 계급투쟁

  우리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사유 재산을 소유한 반면, 우리들 대부분은 거의 아무 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항상 그러했던 것으로 당연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계급과 사유 재산, 군대 혹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5천 년 내지 1만 년 전까지에 이르는 50만 년 동안 인류가 발전해 온 길이었다.   계속해서 노동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계급의 분화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노예가 생산하는 것 모두가 그 노예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하다면 노예를 부려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생산의 진보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계급이 분화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화해야 했다.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면 직접 생산자들이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소비를 하고도 잉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 잉여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운반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 존재했다.  

이 모든 식량(총생산물)을 노동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초과분의 잉여 식량을 그저 먹어 치워 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우 부실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충동이 강했다. 그러나 잉여 식량을 다 먹어 버린 결과, 다음 해의 홍수나 기근 같은 자연의 파괴력과 외부의 굶주린 종족의 공격에 대해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책임지고 장래 재앙에 대비해 이러한 여분의 부를 저장하거나, 수공업자들(식량 이외의 생활용품을 생산하는)을 부양하거나, 방어 수단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거나, 그 일부를 먼 곳의 부족들이 생산한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든가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정관과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살던 최초의 도시들에서 실행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생산물을 기록하기 위해 평판(平版) 위에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문자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위의 사실들이 바로 우리가 소위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초의 싹이 트는 단계였다. 그러나 중요한 단서(但書)로서, 증가된 부를 인구 중 소수가 관리하는 데 이 모든 것은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들 소수의 사람들은 전체 사회의 이익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 부를 사용했다. 그런데, 생산이 더욱 발달될수록 부는 더욱 이 소수의 사람들 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집중된 부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는 더욱 괴리되는 것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작되었던 여러 규칙들은, 부와 그것(부)을 생산하는 토지가 소수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주장하는 “법률”이 되었다. 지배계급이 생기게 되었고, 법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옹호해 주었던 것이다.  

‘토지에서 노동한 사람들이 자기네 생산물을 직접 관리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른 방식으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답은 ‘그럴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인구의 대다수는 땅을 파먹으면서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데 너무 바빠서, 읽기나 쓰기 체계를 발달시키고, 예술 작품을 창조하고, 교역을 위해 배를 건조하고, 별들의 행로를 연구해 보고, 수학의 기초 원리를 발견하고, 언제 강이 범람할지 혹은 어떻게 관개 수로를 건설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등의 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생활 필수품이 다수 대중한테서 탈취되어 이것이 하루 온종일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특권 집단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때만, 이러한 일들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계급 분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꿈꾸지도 못했던 생산의 발전을 이룩해 왔다. 자연적인 빈곤은 극복되었고, 지금 존재하는 빈곤은 자본가들이 저임금을 줌으로써 새로이 빚어진 인위적 빈곤이다. 오늘날의 계급 사회는 인류를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필연적인 계급 분화를 일으킨 것은 최초의 순수한 농경 사회에서 읍과 도시 사회로 변화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부의 생산 방식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예컨대, 천 년 전 영구의 지배계급은 토지를 소유하면서, 뼈빠지게 일하는 농노에 기생해 생활하는 봉건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교역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봉건 귀족과 함께 도시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했다. 그리고, 공업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상인들의 힘이 산업체 소유자(산업 자본가 계급)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사회 발전의 각 단계마다, 육체 노동을 해 부를 생산하는 피억압 계급과 그 부를 소유·통제하는 지배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가 변화를 겪었다.   고대 로마의 노예 사회에서 노예는 지배계급의 사유 재산이었다. 노예 소유주는, 마치 그가 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닭이 생산해 내는 달걀을 소유하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생산해 내는 재화를 소유했다.   중세 봉건 사회에서 농노는 자기 토지를 보유(소유한 것은 아님–옮긴이)하고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소유했다. 그러나, 이 토지를 보유하게 된 대가로 봉건 영주가 소유한 토지(領地: demesne–옮긴이)에서 보통 매주 사흘을 일해 주어야 했다. 즉, 그들의 시간은 구분이 되어, 반 정도는 영주를 위해 일하고 나머지 반 정도는 자신들을 위해 일하곤 했던 것이다. 만약 농노가 영주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영주는 농노를 채찍질, 투옥, 혹은 더 가혹한 방법으로 벌할 수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소유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위해 지불되지 않는 노동(不拂勞動)을 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를 육체적으로 처벌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고용주는 노동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얻어야만 하는 일자리인 공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는 아주 쉽게 노동자로 하여금 자기가 소유한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상품의 가치보다 훨씬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모든 경우에서 억압자 계급은, 일단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 필수품이 충족되면, 남은 모든 부를 소유·통제한다. 노예 소유주는 자기 재산(노예)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하므로, 자가 운전자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기 노예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육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 잉여로 남는 모든 것은 주인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 봉건 농노는 자신의 땅뙈기에서 일함으로써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농노가 영지(領地: demesne)에서 하는 모든 가외 노동은 영주에게 돌어간다. 현대 노동자는 임금을 지불받는다. 그가 창출하는 그 밖의 모든 부는 이윤이나 이자나 지대의 형태로 고용주 계급한테로 간다.     계급투쟁과 국가  

근로 대중이 저항하지 않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인 적은 거의 없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 노예 반란, 중국 전제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 고대 그리스 도시와 로마,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내전 등이 있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기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1848) 서두에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주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일어난 계급투쟁에 좌우되어 왔다.   이집트의 왕(파라오)이나 로마의 황제나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또한 아무리 호화롭게 살았다 해도, 그리고 아무리 장대한 궁전을 가졌다 해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농민이나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이 자기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힘으로 보장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 분화와 병행해서 또 다른 것, 즉 폭력 수단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지배할 수 있어야만 위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정부 기관이나 군대나 경찰 같은 것—즉 국가(기구)—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불과 60~70년 전에조차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국가(기구)가 없는 사회를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국가가 수행하는 많은 업무들이 단순히 비공식적으로 전체 주민이나 대표자 회의를 통해서 수행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회의는 중요한 사회 규범을 위반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행위를 재판하곤 했다. 예컨대, 악한을 추방시킨다든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처벌에 동의했으므로 처벌을 수행하기 위해 경찰이 별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도 별도의 군대 조직 없이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선발된 지도자 아래 모든 젊은 남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단 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부를 지배하는 사회가 성립되면,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전쟁을 조직하는 이러한 간단한 방법들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대표자 회의나 어떤 무장 청장년 회의도 계급에 따라 분열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권 집단은 형법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과 군대를 조직하고 무기를 생산하는 것을 오직 자기들의 손에 독점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급 분화에는 재판관(판검사)과 경찰(및 비밀 경찰)과 장군 및 관료—이들 모두에게는 특권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 준 보답으로 특권 계급이 쥐고 있는 부의 일부가 주어진다—와 같은 집단의 성장이 뒤따랐다.   이러한 국가(기구)의 여러 지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상관의 명령에 주저없이 복종하도록 훈련받았고 피착취 인민 대중과 모든 정상적인 사회적 유대는 맺지 않았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손아귀에 있는 살상 장치로서 발전했다. 그것도 매우 효율적인 장치로서. 물론, 이러한 장치를 움직이는 장군들이 흔히 어떤 황제나 왕과 불화가 생겨, 자기들 자신이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괴물같이 거대하게 무장한 지배계급조차도 종종 그런 사태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살상 장치를 계속 돌아가게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부(富)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착취에서 나오므로, 이같은 반란은 한결같이 사회를 구시대적 방식으로 지속시켰던 것이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단지 특권 계급뿐 아니라 이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무장한 기구, 즉 국가도 자기들의 타도해야 할 대상임을 역사 전반에 걸쳐서 자각해 왔다.   지배계급(과 그들을 지원하는 장군, 경찰, 판검사, 교도관 및 관료들)이 없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문명이 발전할 수 없었기에, 지배계급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일단 자신들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이상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과 부합하게 된다. 그들의 권력 유지는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부를 자신들에게 넘겨주도록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구식의 부 생산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을 새로이 도입할 수 있을지라도 부의 관리권(력)이 자기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까봐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지배계급과 그들의 억압 기구는 피착취 대중의 자발성과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두려워한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특권 계급이 성장해서 자기들 자신의 무기와 군대의 비용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재력을 갖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어느 한도를 넘으면 생산의 발달을 돕지 않고 오히려 저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제 왕조 시대 중국 지배계급의 권력 유지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그리고 관개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운하와 제방(提防)을 통제하는 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토지의 소유 및 운하·제방의 지배는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제 왕조 시대 말기의 생산은 초기보다 그리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물론 그 대신, 유럽이 내내 중세의 어두움 속에 갇혀 있을 때 중국은 예술을 꽃피웠고 인쇄술과 화약을 발명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생산 형태가 수공업자들과 상인들의 주도로 도시에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자기들의 지배를 완전히 받지는 않는 사회 집단의 세력이 이렇게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전제 왕조 당국은 주기로 가혹한 조치를 취해, 성장하는 도시 경제를 분쇄했고 생산을 저하시켰으며 신흥 사회계급의 세력을 파괴했다.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 즉 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발달은 보수적인 기존 지배계급의 이익과 상충했다.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가 사회의 모든 장래를 결정했다.  

때로, 그 결과는 중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산 형태가 등장하는 것이 저해받아 사회가 매우 오랫동안 거의 정체되다시피 하기도 했다. 때로, 로마제국에서처럼 새로운 생상 형태가 발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충분한 부가 생산되지 못하며, 결국 사회는 낡은 기반 위에서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문명은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조야한 농업 사회 형태로 되돌아갔다. 때로, 새로운 생산 형태에 토대를 둔 신흥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을—그들을 지탱시키는 사법 체계(司法體系), 군대, 이념, 종교와 더불어—조직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는 타도할 수 있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 경우에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후퇴하느냐 하는 것은 계급간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싸움에서와 마찬가지로, 승리는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계급들의 조직과 단결력, 지도력에 달려 있다.

4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

  노동자들이 듣는 가장 바보스러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현재의 상황이 달라져도 별볼일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그것이 오래전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의 어떤 먼 고장에서가 아닌, 바로 이 나라(영국을 가리킴–옮긴이)에서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불과 250여 년 전의 사람들한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을 거대한 도시, 큰 공장, 비행기, 우주 탐험—촐도 체계조차 그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과 같은 것들로써 묘사했다면,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압도적으로 농업적인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방 촌락 밖으로 40리 이상을 여행해 보지 못했고, 생활 양식은 수천 년 동안 그러했듯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칠팔백 년 전에 이러한 사회체제 전반에 마침내 도전하게 되는 발전이 시작되었다. 수공업자 및 상인 집단이 도읍(都邑)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료로 봉사하지 않고, 그 대신 생산물을 여러 영주들 및 농노들과 식료품으로 교환했다. 점차로 그들은 귀금속을 그러한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것이 모든 교환 행위에서 얼마간 여분의 귀금속을 얻는, 즉 이윤을 얻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보 대전진은 아니었다.   도시는 처음에 한 군주를 다른 군주와 서로 반목시켜 그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얻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은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더욱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영향력도 커졌다. 당시의 “중간 계급”—부르주아들을 당시에 그렇게 불렀다—은 중세 봉건 사회 내부의 한 계급으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영주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부를 획득했다.   봉건 영주는 농노들을 시켜 자기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농산물에 직접 의존해서 생활했다.

그는 농노들한테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 자기가 가진 권력을 사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부르주아지)은 비농산품을 판매한 수익에 의존해 생활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그러한 재화를 생산한 노동자들에게 일당 혹은 주당으로 임금을 지불했다.   이들 노동자들(흔히 도망친 농노들이었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일단 자기가 수당을 받는 만큼의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노동자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력은, 만약 누군가에게 고용되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굶어 죽기보다는 일한 대가로 자기가 생산한 상품의 값어치(가치)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으려 했기 때문에,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에는) 중간계급인 부르주아와 봉건 영주는 전혀 다른 원천으로부터 부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인해 그들은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기를 원하게 된다.   봉건 영주의 이상(理想)은, 성문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외부 집단이 침입하여 자기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없고 농노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자신의 토지에서 자신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다. 영주는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사회적 신분을 받아들여 선조들의 시대처럼 현상(現狀)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했다.  

필연적으로 당시의 부유한 신흥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사물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업을 방해하거나 자기들이 쌓은 부(富)를 강탈해 가는 군주나 귀족들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기들 자신이 뽑은 대표자들이 작성하고 시행하는 확고한 성문법 체계를 통해 봉건 귀족과 군주를 견제하기를 갈망했다. 그들은 더 가난한 계급들을 농노 신분에서 해방시켜 이들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그래서 자기들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들 자신의 신분 문제에 대해서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흔히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대(代)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흥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대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구질서와 그들의 충돌은 경제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반 관념의 주된 원천이 교회 설교(성당 강론)이었던 문맹 사회에서 관념은 주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의 신분을 타고난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교회는 자연히 도시 부르주아지의 많은 행위들을 “죄악”이라고 공격하는 친(親)봉건제적 견해를 폈다.   그래서 16. 17세기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는 ‘중간 계급’이 자기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가 바로 그것인데, 개신교는 검약, 절제, 근면(특히 노동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의 주도권으로부터 중간 계급 신도의 독립을 설교했던 종교 관념이었다. 중간 계급(즉, 부르주아지)은 중세의 신 관념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단순히 성찬식(성체 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뜻하는 바에 대한 이견으로 싸우고 죽었던 것인 양, 즉 마치 당시의 큰 종교 전쟁과 내전들이 그저 종교적 차이로부터 비롯한 것인 양 학교나 텔레비젼에서 듣게 된다. 그러나, 훨씬 그 이상의 것이 문제로 되어 있었다. 즉, 부의 생산을 조직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에 기초한,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사회 사이의 충돌이었다.   영국에서는 부르주아지가 승리했다. 현재의 지배계급(부르주아지)한테는 비록 무섭게 여겨지겠지만, 그들의 선조들은 왕의 목을 참수해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시켰고, 그러한 행위를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을 들먹이며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제1회전의 승리는 봉건 귀족한테 돌아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개신교도인 부르주아 혁명가들은 처절한 내전 끝에—비록 북부 독일에서는 봉건제의 성격을 띤 개신교가 종교로서 생존하긴 했지만—일망타진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그 후 2세기 이상이나 기다려서야 비로소 1789년 파리에서 종교적 외피를 입지 않고 시작되었던 제2회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착취와 잉여가치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에서 상층 계급(유산 계급)은 근로 인민 대중에 대해 법적 제재력을 가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 영주나 노예 소유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즉, 농노나 노예)이 달아나버려, 특권 계급 자신을 위해 노동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인격에 대해 그러한 법적 제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자가 굶어 죽게 될 것이 보장될 수만 있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소유하는 대신에 노동자의 생계 원천, 즉 기계와 공장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 생활 필수품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땅을 경작할 도구와 자연에서 얻는 원료를 가공할 도구가 없으면, 그 노동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그 도구는 호미와 쟁기 같은 간단한 농기구로부터 현대의 자동화한 공장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기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도구 없이는 가장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조차도 육체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   현대 인류가 아득한 석기 시대의 조상들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구들—보통 생산수단(means of production)이라 부르는—의 발전이다. 자본주의는 소수가 이러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영국 인구의 1퍼센트가 산업(여기서는 농업도 포함됨–옮긴이) 주식과 유가증권의 84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 생산수단—기계·공장·유전·비옥한 농토 등—의 대부분에 대한 효율적인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포함한 개념–옮긴이)가 그들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인민 대중(민중)에게 그러한 일터(작업장)와 생산수단을 가동시켜 노동하도록 허락하면 대중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 점(자본가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점)이 자본가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하는데도—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에 대해 독점적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예컨대, 17, 18세기의 영국 의회는 농민을 그들의 생산수단—그들이 수세기 동안 경작해 왔던 토지—에서 몰아내는 종획법(Enclosure Acts: 지주가 자기 토지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을 쫓아낸 후 목양장(牧羊場)을 만들 수 있게 한 법령–옮긴이)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토지는 특정 자본가 계급의 재산이 되어 버렸고,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 대중은 살아 가기 위해 자본가들한테 자기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본가가 생산수단을 이렇게 독점하게 되자, 자본가는 인민 대중이 함께 자유와 균등한 정치적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해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노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친(親)자본가 경제학자들은 당시 일어난 상황에 대해 단순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임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는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정당한 하루의 임금”을 주고, 그 보답으로 노동자는 “정당한 하루의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이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윤은 자본가가 자기의 생산수단, 즉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 “희생”에 대한 “대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노동자한테는 전혀 곧이들리지 않는 논리이다.  

“순 이윤율”이 10%라고 발표하는 한 회사를 예로 들어 보자. 그 회사의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계, 공장 등의 비용이 1억 파운드라면, 해마다 마모되는 기계를 대치하는 비용(감가상각비)과 원료 비용 및 임금을 지불하고도 그 회사는 천만 파운드의 이윤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년 후에 그 회사가 1억 파운드—원래의 투자액 전비용에 해당하는—의 총이윤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만약 이윤이 “희생”에 대한 “대가”라면, 분명히 10년 후에 모든 이윤은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자본가는 자기가 처음에 투자한 돈을 전액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는 이전보다 두 배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원(原)투자액과 그 동안 축적된 이윤을 몽땅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이렇게 되는 동안 노동자는 자기 삶의 에너지를 하루에 8시간씩, 일년에 300일을 공장에서 일하는 데 희생시켜 왔다. 노동자도 자본가와 같이 10년 후에 두 배로 잘 살게 되었는가? 분명코 그렇지 않다. 비록 노동자가 열심히 저축을 했다 해도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이상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가 결코 자기가 일하는 공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을 수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당한 하루의 보수에 대한 정당한 하루 일”이라는 방식은, 노동자를 자본도 없고 그저 대략 똑같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팽개쳐 두었지만, 자본가의 자본은 배가 시켜 놓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평등”권은 불평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이 명백한 변칙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본가로 하여금 자기 노동자들이 행한 노동의 가치 전부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법적·정치적·경제적) 장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기계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한 주일에 190~200파운드에 해당하는 생산물을 새로이 산출해 낸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곧 그 노동자가 이 액수를 전부 지불 받는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노동자는 훨씬 적은 액수를 받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외에 달리 택할 길은 굶주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산하는 것의 가치 전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참을 만한’ 생활 수준을 가능케 할 만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모든 능력을 다 쏟아낼 수 있을 만큼의 대가를 지불받는다. 즉, 자본가가 날마다 부려먹을 수 있도록 자기의 일할 능력(마르크스가 노동력 labour power이라고 부른 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받는 것이다.   노동자들 자신이 일할 수 있도록 건강을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양육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보수를 노동자들이 받는다면,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액수를 지불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부(富)의 양은 그들이 일단 노동해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양보다 훨씬 더 적다.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 가치는 그들의 노동으로 창조되는 가치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 차액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잉여가치(surplus value)라고 불렀다.     자본의 자기증식(自己增殖)  

현(現)체제를 변호하는 자들의 글을 읽게 되면, 그들이 이상한(그러나 그들한테는 당연한) 관념을 공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즉, 그들에 따르면 돈(화폐)은 마술적 속성을 갖고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는 은행에 돈을 예금할 때 그 돈의 액수가 늘어날 것을 기대한다. 자본가는 돈을 주식에 투자할 때 그 돈이 배당금의 형태로—해마다 새로운 돈을 ‘새끼 쳐서’—보상되기를 기대한다. 칼 마르크스는 ‘돈이 돈을 낳는’ 현상을 주목해 ‘자본의 자기증식’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설명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과 생산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ㅎ녀재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돈으로 살 수 있고, 생산수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들한테 팔게 할 수 있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 즉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돈이 기적처럼 불어날 수 있는 비밀은 이러한 노동력을 사고 파는 데 있다.   반복해 강조하면, 자본가는 애당초부터—발전도상국은 국가 권력과 유착하여 받은 특혜 융자와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원조·차관 등)을 통해—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살 만큼 충분한 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용하고 있는 각 노동자로부터 날마다 뽑아 내는 잉여가치로 더욱더 부유해지는 것이 보장된다. 어떤 자연 법칙이 아니라, 자본가의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력이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싸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그의 돈은 계속 불어나는 것, 즉 그의 자본은 계속 증식되는 것이다.   배당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가 투자한 기업의 노동자를 단 한 명도, 단 한번도 대면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한테 수입을 주는 것은 돈의 신비스러운 힘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이다.(은행이나 증권 회사와 같은 금융 기관 등을 매개로 하여 이자 소득을 얻는 자산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배당금, 이자, 그리고 이윤은 모두 잉여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가 일해서 얼마나 받는가 하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고용주는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임금을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가가 더이상 깎아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육체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들한테 하도 형편없는 임금을 주어 그들이 영양실조로 허덕여 일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일 수 없다면 이는 무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기계 위에서 잠들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밤에는 일에서 벗어나 휴식할 보금자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약간 “사치스럽다”고 여기기도 하는 것, 즉 가끔 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다든가 텔레비젼을 본다든가 가끔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적절한 보수를 생각해 주는 것은 자본가한테도 유익한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가 더 상쾌한 기분으로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 모두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새로 보충하는 데 이바지한다. 임금이 너무 낮게 “책정”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가는 또한, 또 다른 것을 걱정해야 한다. 현재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그의 회사는 오랫 동안 존속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현재 노동자의 자녀들이 노동력까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한테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정부가 이들 노동자 자녀들한테 교육 제도를 통해(읽기·쓰기·셈하기와 같은) 일정한 기술들을 가르치도록 책임을 분담시켜야 한다. 그러나, 특히 “저발전국”의 경우, 교육비를 조달할 수 없는 임금 수준은 미성년자나 부녀자들까지도 공장에 나가 일하게 만든다.   실제로, 또 다른 것이 역시 문제가 된다. 즉, 노동자가 어느 정도를 “괜찮은”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보다 상당히 적게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자기 일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해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일을 소홀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이 모든 요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그 모든 요인들은 자본가가 일당으로 사들이는 노동자의 노동력, 즉 그의 생활 에너지를 보장하는 수준을 지향한다. 노동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계속 “먹고 살” 수 있고, 자기가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할 만큼의 비용을 지불받는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관해 한 가지 점이 더 지적되어야 한다. 막대한 양의 부가 경찰력과 군사력 같은 것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과 군대 등은 국가가 운영하지만, 사실은 자본가 계급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즉, 군대와 경찰 등의 국가 군사·관료 기구)을 위해 소요되는 가치는—노동자들한테 귀속되지 않은—노동자들한테서 착취되어 자본가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가치이다. 다시 말해 이것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잉여가치=이윤+임대료+이자+국가(정부, 행정기관, 군대, 경찰, 감옥, 사법부 등)에 쓰이는 비용이다.

5 노동 가치 이론

  “그러나, 기계, 즉 자본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재화를 생산한다. 만약 그렇다면, 노동은 물론 자본도 또한 부(富) 생산의 일부를 담당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모든 생산 요소는 그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친(親)자본가적 경제학을 배운 자들이 착취와 잉여가치(surplus value)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에 대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얼핏 듣기에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확실히 우리는 자본 없이는 재화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 없이 상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그러나 상당히 다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자본은 어디서 나왔는가?” “생산수단은 맨처음 어떻게 생겼는가?”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역사상 사용해 온 모든 것은—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이건 또는 현대의 컴퓨터이건 간에—일단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졌음에 틀림없다. 비록 도끼나 다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그 도구들도 역시 그 이전에 행해진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을 일컬어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던 이유이다. 기업주들이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자랑할 때, 그들은 사실 그 이전 세대들이 행한 광대한 양의 집적된 노동을 지배(소유, 관리, 통제를 총괄하는 개념이다–옮긴이)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전 세대의 집적된 노동)은 그들 자본가들이 현재 하고 있는 만큼의 일만 했던 선조(혹은 선배)자본가들의 “노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개념은—보통 노동 가치론이라고 하는데—마르크스의 독창적 발견은 아니었다. 마르크스의 시대까지 모든 훌륭한 친자본가 경제학자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였다.

  영국 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나 리카도(David Ricardo) 같은 사람들은 산업(여기서는 광공업을 가리킨다–옮긴이)자본주의 체제가 아직 초기 단계였을 때—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1789~99)을 전후한 시기에—이론적 저술 활동을 했다. 자본가들은 아직 (정치적으로)지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지배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들의 부의 진정한 원천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스미스와 리카도는 이들 자본가들에게 “노동이 부를 창조하며, 따라서 부를 축적하려면 자본가들이 노동을 자본주의 이전에 속하는(전근대적인) 구 지배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말해 줌으로써 자본가들의 이익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노동계급과 친밀한 사상가들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친구들(자본가 계급)에 대항하여 바로 그 주장을 되써먹기 시작했다. 즉, 그 친(親)노동자 사상가들은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동시에 노동은 또한 자본을 창조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본의 “권리”는 강탈당한 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박했던 것이다.   그러자 곧 자본을 정당화·합리화해 줌으로써 자본가를 지원하는 경제학자들은 노동 가치 이론이 말도 안 되는 애물덩어리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은 앞문으로 차내면 뒷문으로 기어들어 오는 법이다.   영국방송협회(BBC) 텔레비젼 뉴스를 들어 보라. 자본가의 대변인들은, “노사 분규”(labor disputes)로 인해 “대폭적인” 임금 인상이 있으면 “기업인”의 투자가 위축되어 “성장”(도대체 누구를 위한 성장이길래?)이 둔화될 것이므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고, 또한 고율의 인플레가 유발되어 결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감소시키고야 말 것이라고 약올리고 위축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니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다짐을 받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맞는가 틀리는가 하는 것은 잠시 접어 두자.(사실, 접어 두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자를 위축시키고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고 다른 기업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동화와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이윤율—우리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을 저하시키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에, 그 주장이 제기되는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자.

그들은 “기계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 즉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인 즉,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더 많은 부가 창조될 것이고, 이는 다시 새 기계를 더 많이 투자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자기들 자신은 모를지라도—더 많은 노동(량)이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일, 즉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셈이다!   내가 주머니에 1파운드의 지폐를 갖고 있다고 하자. 왜 그것이 나한테 유용한가? 결국 그것은 인쇄된 종이 조각일 뿐이다. 그것이 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것은, 내가 다른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유용한 물건을 그것과 교환해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1파운드의 지폐는 그만한 양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일 뿐이다. 2파운드의 지폐는 그 두 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고, 3파운드의 지폐는 3배의 노동의 산물을 살 수 있는 권리이며 …… 등이다.   우리가 부를 측량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들인 노동(량)을 측량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어진 일정한 시간의 노동으로 같은 양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내가 책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숙련된 목수보다 시간이 5~6배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아무도 내가 만든 책상이 숙련된 목수가 만든 책상보다 5~6배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책상을 만드는 데 목수의 노동—나의 나동이 아니라—이 얼마만큼이나 필요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길 것이다.  

목수가 책상을 만드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책상의 가치가 한 시간의 노동에 상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즉, 책상의 가치는 현사회에서 보통 수준의 기술과 숙련도로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어떤 물건의 가치 척도는 단순히 한 개인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이 아니라, 평균 수준의 기술과 평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지고 일하는 개인이 들이는 시간—그는 이 필요한 평균 수준의 노동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임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술 진보가 계속 일어나고 있고,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이 점은 중요하다.   예컨대, 진공관을 가지고 라디오를 만들던 때에 라디오는 매우 비쌌다. 왜냐하면, 진공관을 만들고 그것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일 등에 많은 노동(량 혹은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훨씬 적은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트랜지스터가 발명되었다. 여전히 지공관 라디오를 만들고 있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생사하고 있는 라디오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라디오의 가치는 더이상 진공관을 가지고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트랜지스터를 갖고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서울대 정치학과 김세균 교수 홈페이지에서 퍼옴

HISTORY AND INTERACTION: ON THE STRUCTURALIST INTERPRETATION OF HISTORICAL MATERIALISM

– by Axel Honneth –

정치학과 박상영

————————————————————————–

1960년대 이후로 루이스 알튀세 주변에 모여들었던 맑스주의 이론가 집단은 이론적, 정치적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맑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 방식에 열중해 왔다. 그들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전략적 문제들을 맑스 이론의 중심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에 의지하면서 명확하게 하려 했다. 고로 알튀세는 맑스 이론의 재해석을 통하여 실제의 정치적 문제들을 처리하려는데 충실했으며 이러한 알튀세의 비판적 독해 방식은 광범위하고 위력적인 것이었다. 알튀세 학파에 의해서 주어진 맑시즘은 그러므로 전통적인 맑스 이론에 대항하는 획기적 독해방식이었다. (알튀세의) 구조주의적 맑시즘은 경제주의적 맑시즘과 실천 철학적 비판이라는 상식적인 가정들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알튀세적 프로그램의 정치적 구성요소는 맑시즘 이론의 이론적, 전략적 실패를 지시하는 것이었으며, 그럼으로써 간접적으로는 그들을 현대의 전략적 토론에 적절하게 만든는 것이었다. 알튀세는 맑시즘의 역사적 실패의 핵심이 되는 이론적 실수가 항상 노동운동의 전략적 조직적 실수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결과적으로 알튀세주의자들은 정통 레닌주의적 정치와 연계를 형성하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노동운동의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다시말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관과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사이에 놓였있는 어떤 것이었다.

알튀세주의자들의 정치관은 맑시즘에 대한 그들 해석의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이하의 논의를 그들의 자기관(self-conception)에 대한 이론적 측면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나의 관심은 주로 {자본론 독해(Reading Capital)}에 있어서 역사이론(the theroy of history)의 체계적 발달에 있는데, 그속에서 알튀세 학파는 사적 유물론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해석에 기초한 구조주의적 맑시즘의 프로그램을 인식하고 실행하려 한다.

I

알튀세의 서구 유럽 맑시즘 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 재해석의 중요성은 그것의 주된 목적, 즉 구조주의적 사고 모델의 도움을 받아서 맑스주의자들의 핵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알튀세 학파에 의해서 주어진 맑시즘의 재해석은 두가지의 길을 형성하면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구조주의적 이론 영역의 확장과 전통적 맑스에 있어서 일부분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구조주의적 맑시즘(structural Marxism)을 사회과학적 구조주의(social-scientific structuralism)과 떼어놓으려는 잦은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둘은 기본적인 방법론적 자세를 공유하는데, 이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델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분석이 그것의 방법론적 참고점들을 실제적 언어 발화(parole)와 언어학적 규칙 체계(langue)를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사회과학적 구조주의 역시 사건들의 경험적 맥락과 그 맥락을 결정하는 심층구조의 구별에 기반하고 있다. 알튀세에 의해서 기초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이런식으로 확립된 기존의 방법론적 개념에 대담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알튀세는 구조주의의 대상영역(object-domain)을 문화 상징적 매개의 영역을 넘어서서, 즉 언어학적으로 구조화된 표현들을 넘어서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제 그는 사회 체계내 여러 형태의 조직들 그 자체또한 심층구조들로부터 연유된다고 본다.

사회과학적 구조주의와 구조주의적 맑시즘이 공유하는 두 번째 특징은 ‘주체의 탈중심성(the decentering of the subject)’이다. 대상 영역은 이제 우선 특정 형태의 주관성(subjectivity)을 구성하는 규칙-체계(rule-system)가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론적 입장들은 본래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인식론적 주체의 오만에 대항해서 형성되었다. 즉 본래의 의도는 전체 사회의 연결관계를 객관화(objectivation)된 것, 즉 그안에서 초월적 의식이 그 자신을 외부화시킨 것으로 보는 현상학적 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식 비판의 철저함은 그 자신의 자신감과는 반비례하는 것이었다. 구조주의적 맑시즘에 있어서 주체의 탈중심성은 현상학적 초월주의를 채용하려는 맑스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제시되었을 뿐만아니라 싫든 좋든 실존주의적, 인류학적 그리고 실천-철학적(parxis-philosophical) 맑시즘 형태에 대항해서도 제시되었다.

마지막으로 구조주의적 맑시즘은 사회과학적 구조주의로부터 역사(history)의 개념을 채용하는데, 그 개념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탈중심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상징적 형태라는 역사적 연속성, 혹은 헤게모니적 구조를 불변하는 규칙체계의 연속으로 환원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맥락은 더 이상 주체의 단일적인 업적으로서 보증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 그 자체의 범주는 이제 불연속적으로, 그렇지만 통합적으로 구조화되고, 단지 서로서로를 뒤따르는 규칙체계들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구조주의적 맑시즘이 맑스의 고전적인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와 그의 동료들은 이러한 구조주의적 역사 개념을 가지고서 역사적 유물론의 전통적 개념들의 약점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역사주의(historicism)’ 비판에서 그들은 ‘역사’의 잘못된 개념에 기초한 맑스 해석들을 예증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의 구조주의적 해석에서 상당히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사주의’라는 범주는 역사 개념에 대한 결과물들과 더불어 구조주의적 ‘주체의 탈중심화’를 사고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역사주의에서는 ‘사회 구조의 총체성에 있어서의 각기 다른 수준들, 그들간의 관계와 사회라는 창조적 주체, 역사의 일직선적인 원칙들에 의한 그들의 생물학적인 구성에 의해서 설명되어진다. (발제자주: 역사주의 -사회를 단순히 순환적인 ‘표현적 총체성’으로 간주하게 하고, 역사를 동질적인 일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하게 하며, 철학을 역사과정에 대한 하나의 자의식으로 여기게 하고, 계급투쟁을 집단적 ‘주체’의 싸움으로, 또한 자본주의를 본질적으로 소외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로 만들고, 그리고 공산주의를 소외를 극복한 진정한 휴머니즘의 상태로 쉽사리 생각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 Reading Capital, p.119-43: 여기서는 페리 앤더슨,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인용을 재인용함)

알튀세는 두가지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전통적 맑시주의를 이런식으로 재구성하는데, 그것은 ‘인간주의’와 ‘경제주의’다. 경제주의와 인간주의, 또는 알튀세의 정치적 공식화를 빌어서 말하자면 스탈린주의와 그에대한 비판자들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실체(reality)에 대한 다른 영역들을 중심의 ‘표현들’로 해석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사적 과정을 도구적 혹은 인류학적 중심으로 환원시키려는 이론적 야망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이제 알튀세가 말하는 역사주의의 암묵적인 전제들에 대해서 간단히 재구성해 보도록 하겠다.

II

알튀세는 그의 연구에서 ‘역사주의’라는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게 확장시킴으로써 그것은 결국 모든 역사 철학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맑시주의적 역사주의라는 표제는 역사의 자기 발전적 중심의 가정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맑시즘에 전치된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어느정도 역사 철학의 기초에 대한 서독인들의 논의와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가지의 이론적으로 구분되는 도전들이 현대의 역사 개념이 가지고 있는 범주적 함의에 대해 제기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함의들은 알튀세에 의해 도전받았던 맑스주의자들의 것과 유사한 것이다. 첫 번째의 도전은 Reinhart Koselleck의 개념적 역사를 뒤따라서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단일한 역사 범주(the category of ‘history’ in the singular)의 사회-역사적 전제조건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도전은 분석적 역사철학(Danto)으로부터 온 것으로 그것은 연속성이 역사의 현대적 이해로 돌려지는 방식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은 역시 알튀세에게서도 발견된다.

Koselleck: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개별 역사들의 집합체로서의 역사적 사건들로 언급되었던 Geschichte(stories/ histories)라는 복수 형태의 단어는 현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Geschichte(story/ history)라는 집합적 단일 명사라는 형태로 대치되었다. 왜냐하면 혁명 시기동안 진보와 역사의 유일성(uniqueness)에 대한 잠재력이 쉽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변이는 행동의 실질적 통일이라는 이론적 허구를 초래하게 되며, 이것은 역사 과정에서 역사적 사건들간의 관계를 보증하게 된다. 이러한 부르조아적 역사 철학의 기본적 가정은 역사적 거시-주체(macro-subject: 예를들어 민중, 국가. 혹은 종 species)를 차용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이러한 거시 주체들의 자기 발전 과정으로서 이해될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진보로서 제시될수 있는 배경적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역사 과정의 추상적 경험이라기 보다는 생산성의 영원한 증가를 겨냥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알튀세가 역사주의적 맑스주의는 역사철학과 반드시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때 나타난다. 존 루이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그는 역사를 통제하는 거시 주체를 상정하는데 있어서 혁명적 부르조아지들은 행동의 이성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재주조한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는 부르조아 혁명의 정치적 군집이 해산됨에 따라 그것의 역사 개념의 이론적 토대(즉, 행동의 보편적 중심)또한 사라진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급의식으로서 혹은 실질적으로 생산력으로서 거시 주체를 전제로한 현대의 역사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유물론들은 전통적 맑시즘에서 부르조아 취향을 가진것으로서만 간주될 수 있을뿐이다. 알튀세는 ‘경제주의’와 ‘인간주의’가 정치적으로 권위적인 행동의 통일을 각각의 역사가 할당되는 중심에서 찾으려하는 이데올로기적 야심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H.M. Baumgartner’s work of A.C. Danto: 바움가트너는 단토의 연구에 비추어, 역사 철학에 있어서 연속성의 개념에대한 철학적 재구성을 산출했다. 그는 인식 주체의 통일적 성취로서 역사의 연속성을 사고하려는 후기 헤겔주의자들의 시도가 역사는 의미의 객관적 맥락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전제에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한다. 바움가트너는 그의 분석으로부터 약간 급진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만약 역사의 연속성이란 것이 계속적(continual)인 변화의 차분한 확실성도 아니고 사건들의 연결을 만드는 작업도 아니라면 역사 일반은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의식들의 현상으로서만 이해되어져야 한다.’ 바움가트너는 더이상 연속성을 역사적 대상 영역의 특징으로 평가하지 않고, 모든 역사적 명제들의 단순한 형식적 원칙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바움가트너의 주장과 알튀세의 역사주의 비판의 직접적인 연결(path)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역사적 연속성의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면, 또한 그것이 바움가트너의 초월적인 철학적 해결을 피하려 하고 있다면, 그(바움가트너)의 존재론적 연속성 비판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이론적 통로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 의해 취해질수 있는가를 보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움가트너와 같이 알튀세는 존재론적 전제로서 역사적 연속성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역사 개념들을 비판하고 있다. 알튀세는 적절하게 이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전통적 맑시즘의 특징적인 약점들을 이해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취향은 헤겔적 맑스주의 전통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개념의 몰역사화(dehistoricization)의 형태를 가정하고 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전통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형이상학적 취향은 역사에 대한 경제주의적 이데올로기 형태를 가정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는 자율적인 진보로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의 추동력은 생산기술의 발전인 것이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이러한 이론적 전제들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바움가트너가 역사의 연속성을 방법론적 경향으로서 독해하고 있는 반면, 알튀세는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불연선속성의 개념으로 대치시킨다. 이때 역사는 복수가 되며, 복잡한 일련의 완전한, 그러나 내부적으로 구별되는 동시성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의 두 개념들(불연속성과 복수성)은 모두 명백히 단일한 전제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즉, 그들은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개념이 역사 과정에 대해 내부적으로 옹호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연속성은 항상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존재론적 연결관계로서 전제될 필요는 없으며, 역사적 연속선상에서 배태된(embedded) 역사적 사건들의 사회적 실천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토대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의 과정이란 사건들의 혼란의 장이나 규칙체계들의 불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그보다는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노출되는 구속력있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 성취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의 한계들은 또한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한계들인 것이다.

III

맑스는 다른 많은 역사들의 단일한 세계사(world-history)로의 통합을 그 자체로서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사는 지방의 생산적 공동체들이 서로서로 맞물려 들어가는 과정의 결과로서 주장되며, 그들의 증가하는 시장 의존에 의하여, 그리고 마침내는 실제적인 관계의 복합체로서 세계 시장안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역사의 세계사로의 이러한 변형은 전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다. 역사의 통일성은 역사적 거시주체가 되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별 역사들의 역사적 관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는 이러한 계통의 맑스적 사고를 추구할 수조차 없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역사주의의 비판에 대한 이론적 전제조건들(세계사의 연속성 개념은 오직 형이상학적 역사의 허구로서만 이해될수 있으므로)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알튀세는 맑스의 작업을 전과학적인 단계와 과학적으로 성숙한 단계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알튀세는 맑스 이론의 후기-역사주의 단계로부터 역사주의를 구별해 내야만 했다. 알튀세에게 있어서 맑스 주장의 역사주의적 요소들은 정치적 영역들과 사회-경제적 현상들을 인간 본질의 소외로서 취급하기 위해 다시 인류학적 특징으로 언급하게 되는 것들이다.

{자본론 독해}에서 알튀세는 헤겔적 전통의 맑시즘에서 사용하는 총체성의 개념(표현적 총체성)에 반대한다. 이러한 지적 전통에서는 모든 사회적 외양들이 집중적으로 역사적인 기질로 보여질수 있는 반면,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는 탈중심화된 통일로서의 사회적 총체성(구조적 총체성)을 생각한다. 즉, 알튀세는 이러한 구조적 총체성 이론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구조적 총체성의 기본적 형태를 맑스의 생산양식 범주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개념은 알튀세의 자본론 독해와 역사 이론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알튀세의 역사 유물론은 사회학적으로는 개념을 풍부하게,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맑스가 이미 정치경제 비판에서 발전시켰던 개념을 일반화기키고자 하는 것이다. 알튀세 학파의 작업은 대체로 {자본}의 개념적 틀과 방법론적 정교함으로부터 일반적 역사 이론을 추정하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알튀세의 ‘실천(practice)’ 범주에 대한 평가는 생산 양식 개념과 함께 중요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각 사회의 하위 체계들은 사회적으로 안정화된 형태의 실천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으며, 사회적 실천이라는 일반적 규정하에 알튀세는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이론적 유형의 실천들을 구별한다. 사회체계에서 최종분석에 있어서는 주도권적 역할을 하는것은 언제나 경제적 instance이다.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주의의 형태로 상부구조에 대한 경제적 토대의 영향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조주의적 형식으로서 경제적 토대는 단지 상부구조 기능을 제한할 뿐이라는 방법론적 목적을 유지하게 된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에서 사회체계들은 경제적 하위 체계들에 기초한 위계적 관계들의 매트릭스로 간주되는데, 그안에서 비경제적 하위 구획들은 그들의 영향력의 범위라는 조건에서만 결정되어질 뿐이다.

알튀세는 역사주의자들의 역사 개념에 대항하기 위한 또다른 예방조처로서 실천의 개념을 복수화 시키고 있다. 즉, 그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독립적인 실천을 구분하는데, 이는 역사를 노동으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알튀세는 사회적 실천 그 자체를 도구적 행위, 즉 대상에 대한 체계적 노동행위로서 포착한다. 그러나 알튀세는 이점에서 더욱 심한 환원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역사주의를 회피하고 있을뿐이다. 즉, 역사주의에서 사회 발전이 오직 노동을 통한 자기 객관화로서만 이해될수있다면, 알튀세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회적 차원의 행위들은 도구적-객관적(instrumental-objective) 행위에 비추어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발리바르 역시 실천 범주에 대한 도구주의적 독해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중심적 증거를 확립하려할 때 잘 나타난다)

즉, 알튀세의 실천 개념은 환원주의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서 행동 주체들은, 사회적 통합이 체계적 통합으로 다루어지도록 하기위해서, 비개인화(deindividualized)된 체계적 단위들이 된다. 알튀세가 생각하기에, 행동의 사회적 맥락은 단순히 체계적 노동 과정이 되기 때문에 그는 도구주의적 개념을 가지고서 다만 이데올로기적 실천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뿐이다. 다소 조작 이론의 냄새를 풍기면서, 알튀세는 그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개인들이 정치적으로 순응주의자가 되고 기능적으로 체계의 유능한 성원으로 주조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영역을 확립하고자 한다.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는 그것이 {자본}의 범주적 문제틀을 만들고자 하면서, 동시에 {자본}을 역사 일반 이론이라는 원형(prototype)으로 정교화시키고자 하기때문에 이러한 개념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형적 역사 이론은 모든 개별적 맥락의 행동으로부터 이론적 추상화를 요구하게 된다. 맑스가 분석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실체를 통하여 경제 체계의 내부구조까지 연구했던것과같이 역사 이론또한 ‘역사적 존재의 기본적 형태’, 즉 특정한 생산양식에 대한 구조적 총체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알튀세의 역사 이론은 맑스가 사회에 근본적인 자본의 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구체적 총체성’을 유추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고찰의 형태를 그것의 방법론적 원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 기간들은 생산양식의 구조적 총체성에 대한 언급에 의하여 완전히 포착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통일된 역사이론이라는 분석적 문제틀로 인하여 이러한 역사이론은 소통적 과정을 주제화시킬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단점으로 말미암아 알튀세의 역사이론이 포착하려하는 역사적 실체는 빈궁한 실체로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이론에서 역사적 실체는 집합적으로 경험되는 행위의 역사일뿐만아니라 오직 기능적으로 위계화된 체계의 역사로서만 존재한다.

IV

역사주의적 개념들이 역사-구성적 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반면에, 알튀세는, 역사 철학을 통해서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역사적 총체성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의 구조주의적 전제들은 근본적 가정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만약 ‘생산양식’이 구조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모든 역사적 발전 과정들은 내부적으로 통제된 재생산 과정들의 연속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알튀세는 전체 역사를 역사적 거시주체와 연속성을 상정할 필요없는 이론의 대상으로 전환시킬수 있다. 이러한 역사이론에서는 다양한 역사들이 접근가능할 뿐이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생산양식들은 구조적으로 그들 자신을 재생산하게 된다.

알튀세는 오직 통일된 역사만을 말하는 맑스주의와 이미 이러한 통일을 전제로한 맑스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양쪽의 경우에 있어서 알튀세는 모든 역사적 과정들이 거시주체의 주변에 집중된다는 개념을 비판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타당한 맑스주의는 후자의 것에 해당한다. 전자의 경우 역사의 개념은 그것을 간주관성의 위계적 관계에서 정향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의미해진다.

알튀세는 구조적 가능성에의한 역사의 실제 경로를 인실할수 있을뿐 역사적 실체로서 사건들의 구체적인 물질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알튀세의 역사 이론은 구조적으로 해석된 사회적 구조들의 기능적 경향들이 오직 알튀세가 배제하고 있는 상호작용적 역사적 주체들의 실천들을 통하여 실제적 역사적 발생으로 전활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상호적(interactive) 관계로부터 사회적 기능을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역사이론은 구어의 실천적 맥락으로부터 언어학적 규칙체계를 구분했던 구조주의적 언어학이 직면했던것과 같이 분석적 제한들을 직면하게 된다.

구조주의적 역사이론의 체계적 개념들이 역사주의의 비판으로부터만 파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튀세는 자본에 대한 맑스의 과학적 분석 모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구조주의적 독해는 알튀세로 하여금 구조주의의 기본적 교의들을 맑스의 역사이론 속으로 바꾸어 넣게된다. 이것은 자본 분석의 분석적 틀이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 과정에 있어서의 초개인적이고 기능적인 매커니즘과 전체적으로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역사이론이 그 자신을 범주적으로 생산양식의 구조적 요소에 국한시킬수 있도록 제한한 것은 맑스의 자본 분석의 범주적 문제틀이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자본}의 분석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여러 다른 시도들이 맑스적 이론의 역사적 내용(content)에 주목해오고 있다. 알튀세의 독해방식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이러한 작업들은 그들의 관심을 맑스가 자본주의에대한 체계적 비판을 위해서 헤겔의 {논리학}을 이용했다는 이론적 전제조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알튀세와 그의 동료들은 전체적인 역사적 실체를 상호작용의 관계와는 독립적인 재생산의 과정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을뿐이다. 맑스는 같은 용어로 역사적 실체를 묘사하고 있긴하지만, 그에 있어서 이것은 오직 자본주의적 조건하에있는 사호적 관계들의 묘사일뿐이다. 이러한 알튀세 학파의 암묵적인 이론의 변형은 그들로 하여금 구조주의 이론에 기초하여 역사적 유물론을 재구성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한 이론은 무엇보다도 역사적 실체로서 관계들의 사회적 틀을 구성하는 행위의 소통적 차원을 차단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맑스의 추상화와 역사적으로 중립적인 이론적 전략으로서의 역사형성 맥락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순천대 서양사학과 강성호 교수님 홈페이지 에서 퍼옴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 연구경향을 중심으로

 

목 차

1.머리말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1)독일사회민주주의 역사적 발전과정

2)사회민주주의의 개념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

4.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한국의 연구경향

5. 맺음말

* 영문초록(Abstract)

* 참고문헌.

1. 머리말

최근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통해 급속도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19세기 중엽 이후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면적 부인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시켜온 흐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요구하고 있다. 전자는 최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나타나고 있으며, 후자는 서구 자본주의 진영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관심 집중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91년 이후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소개가 활발하게 소개되어왔다. 이에 비해 회민주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적 제 경향들에 대한 연구 및 소개는 변화된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 발전해 왔는가를 검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의 개념,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과 한국에서의 연구 경향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보다 깊이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개념

1)독일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기에 앞서 독일사회민주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고, 현재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크게 3 단계의 시기를 거쳐 발전해 왔다.

첫번째 단계는 1890년대 중반에 베른쉬타인이 제기하여 일어난 수정주의 논쟁 시기이다. 베른쉬타인은 1896년의 독일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대회에 제출했던 의견서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전면적 수정을 제기탖다. 베른슈타인은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에 따른 궁핍화 법칙, 자본주의 멸망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등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들 둘러싸고 지지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나타났던 경제민주주의의 구상을 둘러싼 시기이다. F. Naphtali가 경제민주주의 구상을 창안하였는 데, 이것은 공적 개입에 의한 경제의 민주화와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전제하는 자주관리형태의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1925년 독일노동자 총연맹 브레슬라우대회에서 제창되어, 1928년의 함부르크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세번째 단계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전환을 둘러싼 논쟁 시기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공정한 사회질서의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보호하고 장려하려 한다. 사회화론을 부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은 1951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의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표와 임무’라는 제목의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강령] 등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2) 사회민주주의 개념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상황이 변화되어옴에 따라 그 안에 다양한 내용을 담아왔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사회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은 크게 다르다. 19세기 후반에 사회민주주의는 곧 맑스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전통 위에서 현대적 상황의 변화를 담은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사회민주주의의 개념을 토마스 마이어(T. Meyer)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이어는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요한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사회주의는 윤리적 필연성이며, 사회주의는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정도에서만, 그리고 그 실천 형태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건설적 사회개혁과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노동자의 경험 및 지식의 증가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설된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로의 민주주의의 점진적 확장이다. 세째,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반드시 국유화나 전면적인 몰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생산수단에 대한 개별적 소유권을 다양한 사회적 이해의 담지자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회화란 반드시 시장의 철폐를 의미하지 도 않는다. 네째,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기능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 자체가 사회주의의 일부이다. 다섯째, 사회주의적 원리의 의미에서, 사회구조는 폭력적, 혁명적 반란에 의해서 건설적으로 개조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사회 관계의 창조적 건설은, 민주주의 속에서만 점진적으로,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된다.

3.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 동향

그럼 독일사회민주의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독일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일사회민주주의는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베른쉬타인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의 검토는 베른슈타인 당대의 수정주의논쟁에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베른슈타인에 대한 연구의 기본적인 틀이 바로 이 시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19세기 후반 수정주의논쟁의 제공자인 베른슈타인의 기본 입장부터 시작해보기로 하겠다. 베른쉬타인은 자신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1896-1898년 사이에 걸쳐 {신시대(Die Neue Zeit)}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문제]라는 연재기사에서 명확히 하였다. 이것은 보다 보충되어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과 사회민주당의 임무}로 출판되었다. 베른쉬타인은 이 책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맑스주의를 새로운 상황에 맞게 ‘수정’하려 했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의 이론적 전제와 독일사회민주당의 실천 사이에 하나의 모순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제 진부하고 공상적으로 된 이론을 검토하여 당의 실천 정책들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단점으로 지나친 추상성과 이 추상성으로 인한 이론편향적 경향들을 지적하였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론과 현실분석 중 맞지 않는 것으로 붕괴론을, 즉,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자본주의체제가 그 속성상 머지않아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견해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붕괴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내재한 본질적인 오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 본질적 오류로 헤겔주의류의 변증법적인 선험적 연역론과 유물론적인 역사관, 운명론 및 결정론 등을 들었다. 베른쉬타인은 또한 사회의 양극화이론, 즉 점증하는 빈곤화와 중간층의 프롤레타리아트화 이론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 위기의 점진적인 심화와 그에 따르는 혁명적 긴장의 고조에 대한 개념들도 이러한 근본적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은 맑스주의의 이러한 테제들이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현실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의 진행이 맑스가 희망하고 예견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는 생산의 집중도 없었고, 대규모기업에 의한 소규모기업의 소멸도 없었다. 상업과 산업에서도 집중은 매우 느리게 발생했고,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단위의 소멸 역시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간층이 프롤레타리아화 하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강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의 양극화 현상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베른쉬타인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자, 일련의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바이레른 사회주의자이며 가장 열렬한 베른쉬타인 옹호자가 된 폴마르(Georg von Vollmar), 제국의회 의원과 바이마르 때 국회의장을 역임한 농업이론가 다비드(David), 1차 세계대전 발발 때 적극적인 활동을 자원한 이상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인 프랑크(Ludwig Frank), 윤리적 사회주의자인 아이스너(Kurt Eisner), 가치이론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관심을 쏟았던 경제학자인 콘라드 슈미트, 그리고 독자적으로 베른쉬타인과 유사한 논점에 도달한 캄프마이어(Paul Kampmeyer) 등이 그들이다. 수정주의적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월간 사회주의(Sozialistische Manlatshefte)}를 통해 자신들의 집장을 피력하였다. 비록 다양한 논제에 걸친 논문, 평론, 단상들이라고 하더라도,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폭력에 대한 반대, 윤리의 강조, 개량적 활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찬양, 여성해방, 노조활동의 고무, 교육환경의 증진 등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연합전선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와 비슷한 외관을 지니고 있었던 개혁주의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이 베른쉬타인을 지지하게 되면서, 수정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에 대한 지적 비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윤리적인 사회민주적 세계관을 구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개량주의와 구별된다. 개량주의적 입장을 지니고 수정주의 진영에 합류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류는 레기엔(Legien), 라이파르트(Leipart), 팀(Tim), 움브라이트(Umbreit), 엘름( von Elm) 등과 같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조합정책 수준에 머물렀다. 두 번째 부류는 에버트(Friedrich Ebert)같은 당직자들이다. 그들은노동조직의 성장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았고, 정책간의 타협을 중요시하였다. 세 번째 부류는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 입장을 보였던 쉬펠(Schppell), 칼베르(Calwer), 힐데브란트(Hildebrand) 등과 같은 보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선택적 관세에 대한 지지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대전 중의 가장 극단적인 사회제국주의로 완결된다. 이러한 입장들은 베른쉬타인의 기본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베른쉬타인은 사회제국주의와 명백히 다른 입장에 서있다. 수정주의와 개혁주의를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는 지지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도 받았다. 카우츠키와 로자 룩젬부르크가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섰다. 이중에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이 가장 대표적인 비판으로 뽑히고 있고, 이후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로자 룩젬부르크의 견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제문제]시리즈에 주목하다가 {전제}가 출판되자 수정주의의 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사회개혁과 혁명을 사회민주주의 사상 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있는 것으로, 그리고 개혁을 수단으로 혁명을 목적으로 파악하였다. 그녀는 이에 비해 수정주의는 “실질적으로… 우리가 사회혁명 – 사회민주당의 목적인 – 을 폐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면서 비판하였다. 궁극목표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심장이므로, 그러한 목표를 폐기하려는 시도는 이미 전술적 수정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 모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으며 관념론으로 복귀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의 자본주의체제 분석이 그의 관념론의 지주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평가절하하면서 그것을 “적응성”, “지속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자본주의의 적응성에 대한 베른쉬타인의 주장은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전례없이 명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했던 신용의 증가와 국제화는 실제로는 전유방법과 생산방법을 더욱 단절시키고,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더욱 괴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카르텔과 트러스트와 관련해서도 베른쉬타인을 비판하였다. 그녀는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은 자본주의의 안정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그러한 현상 들은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는 자본주의의 최종국면의 징후로 보았다. 그녀는 더욱이 공황이 과거의 일이 되었다는 베른쉬타인의 주장을 유치한 오류로 비판하였다. 1890년대의 상대적 번영이 장차 도래할 자본주의 대격동의 그림자를 가릴 수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번영은 생산과 교환간의 최후의 모순을 위한 전제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출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부분적이고 국지적인 공황이 무제적한적인 세계공황으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의 기초를 검토한 룩젬부르크가 제출한 결론은 수정주의는 사회주의적 이론이 아니라 절충주의 철학을 지닌 부르주아 개량운동이라는 것이었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전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적 활동, 사회개혁, 그리고 현대국가의 정치적 민주화라는 세 가지 동력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고자 한다. 룩젬부르크는 이러한 세가지 전술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첫째, 노동조합은 맑스의 임금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를 폐지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 세력이 무한히 확대될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낙관론은 근거가 없다. 노조는 그들이 骕하는 대로 생산계획에 영향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는 생산의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 방법에도 관여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조합은 수정주의자들이 산정했던 바의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두번째, 사회개량은 장기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역시 한게가 있다.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양립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개량을 허용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더 이상 개량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룩젬부르크는 사회개량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착취에 질서와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라고 보았다. 세번째, 수정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성숙에 의존하고 있는 데, 그러한 민주화과정은 식별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본주의국가 내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며, 지배계급들이 위협당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된다는 것이다.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적 기초와 전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해 다음처럼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에 다름아니며, 그 전술은 사회주의적 승리를 잉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승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혁명적인 권력장악으로서만 쟁취될 수 있다. 베른쉬타인의 전술은 결코 현존 체제 내에서의 사소한 개량이상을 끌어낼 수 없기때문에 수정주의자들의 목표는 급진파의 궁극목표와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수정주의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가 없으면 그 지위가 한층 더 상승할 수 있다.

베른슈타인과 베른슈타인의 지지자들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이러한 비판은 형성중에 있는 수정주의의 이론적 약점을 통렬하게 공격함으로써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1,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나찌즘의 대두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룩젬부르그의 비판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결국 룩젬부르크의 입장은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사회주의 이론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한 분파로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릭케(Dieter Fricke), 라쉬짜(Annelies Laschiza), 라드뽅(Günter Radczun), 그리고 테뵉(Manfred Tetzel)등이 이어 받어 발전시겼다.

1950년대초 이전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연구대상으로 선호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심지어 베른슈타인이이라는 커다란 명성에도 불구하고, 베른슈타인의 원저작들이 전집형태로 정리되지도 못했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는 1950년대 초 부터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다가,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이 과정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기에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의 독창적인 새로운 포괄적 체계로 파악하고자 한 대표적 학자로 피터 게이를 들 수 있다. 게이는 19세기 후반에 수정주의는 시대적 상황의 반영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베른슈타인의 공적이라고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만약 베른쉬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개량주의적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정주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사람들은 진기한 이론이라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상황의 이론적 인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수정주의가 즉각적인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이론이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주고 아울러 맑스주의가 그랬던 것 처럼 논리적인 체계로 모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쟁적인 개념구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터 게이는 베른슈타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었던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젬부르크의 비판을 재비판하였다. 피터 게이는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해 다음의 네 가지 점에서 비판을 가하였다.

첫째,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사회주의의 폐기’를 너무 멀리까지 끌고가 버렸다. 사실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사회주의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녀는 투쟁 자체를 문제시하는 쉬펠(Schipell)과 베른쉬타인의 이론 비판을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차이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두번째,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그녀의 이론적 주장은 프롤레타리아가 실제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가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 베른쉬타인의 이론구조가 그 취약성으로 곤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현실감각은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의 수정주의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파급된 번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세번째, 로자 룩젬부르크는 베른쉬타인의 이론은 독일은 물론이고 여타 국가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경직된 혁명적 사고 패턴은 영국노동계급의 평화적인 권력획득을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기득권 계급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담보를 과소평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리하여 베른슈타인이 독일적 상황에 대해 오판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녀는 영국적 상황을 오판했던 것이다. 네째, 혁명적 전술에 대한 룩젬부르크의 옹호는 대책없는 모순들을 잉태한다. 그녀는 특정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염두에 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블랑키주의적 쿠데타는 노동계급에게 심각한 불행을 안겨주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장악 시기, 혁명의 형태 등에 대해서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사상 속에서도 혁명이라는 난제와 개혁이라는 난제 간의 딜레마는 결코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로자 룩젬부르크에 대한 피터 게이의 이러한 반비판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이외에 그노이스(Gneuss)도 이 시기에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민주당 내에 존재하는 개혁주의적 입장의 체계화의 산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후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유로코뮤니즘과 유럽사회주의가 대두된 1970년대에 바우어(O. BGauer) 르네상스와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사회민주주의 연구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다. 바우어 르네상스는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에 따른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재평가와 관련이 있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는 1969년 이후의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베른쉬타인 연구는 1970년대 초 이전까지는 매우 적었으나, 197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활성화되었다. 1977년에 베른쉬타인을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가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이것을 입증해준다. 이 대회 의장을 맡았고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의 하나인 토마스 마이어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20세기의 전환기에 가장 올바른 입장으로 다음처럼 높이 평가하였다.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사회중의의 원리와 실천 간의 괴리가 점점 커지는 상황속에서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내부로부터 대두되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의 모순을, 이론적 기반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실제적 발전과의 현실적 관련에 기반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수정주의는 결코 반 마르크스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건설적인 개량작업을 방해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들을 비판하고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이어는 베른쉬타인 수정주의를 단순히 수동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역사적 시대상황에 적응하기위해 고안된 진일보한 새로운 사회주의 이론으로 평가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이러한 새로운 평가들을 미 출판된 초고와 편지들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작업들과 정통적 입장에서 계속 비판하는 시각들이 서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다.

4.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 연구 동향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동안 여러가지 요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해방후 공간 시기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압도되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1950 년대에는 조봉암의 진보당을 통해 사민주의적 입장이 잠시 현실화되다가 ‘진보당 사건’으로 좌초되었다. 5.16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마저도 부인되는 열악한 현실 상황에서 사민주의는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연구되기 어려웠다. 다만 이 시기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참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관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형식적으로 존재했었을 뿐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를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 한국사회가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사회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 이에 따라 한국에서 서구 자본주의국가와 같은 ‘개량’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 논의는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국에서 수입되는 과정 속에서 , 그리고 90년대 초 현존사회주의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본격화되었다.

현실 영역에서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과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사회민주주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김윤환, 안병직 등이 열악한 현실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이후 사민주의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전문적으로 이루저어지기 시작했다. 나라 별로는 스웨덴, 영국, 독일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 중에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엽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대표적 연구자들로 박호성, 강신준, 강철구, 최영태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사민당일반에 대한 개설적 연구이거나 한 특정부분에 관한 부분적 연구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사민당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아직 초보 단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사민주의 초기의 핵심적 문제의 하나인 베른쉬타인의 수정주의의 형성과정과 쟁점 들을 둘러싼 논의들은 거의 소개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맺음말

이상으로 독일과 한국에서의 독일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동향을 살펴보았다. 독일에서는 1970년대 후반 이후 베른쉬타인 르네상스를 통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에서는 1990년 대 초 이후에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기회주의, 개량주의, 그리고 독창적인 내용이 없는 절충의 산물이라는 기존의 견해들이 비판적으로 검토되었다. 동시에 독일사회민주주의의 원조가 되는 베른쉬타인을 하나의 독창성있는 포괄적인 체계로 파악하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한국에서도 1990년대 초 이후의 급변하는 세계적 상황 속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니는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베른쉬타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확인되었다. 앞으로 보다 많은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한 부분이 채워진다면 20세기 사회사상사를 한국의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영문초록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ungho Kang

AbSTRACT

In this article, I studied the following subject ” Reserch Trends on German Social Democracy and Bernstein’s Revisionism.

Since revisionism debate 1896-1898,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criticized as opportunist and nonsocialist theory by many socialist. Especially Rosa Luxemburg became famous throgh her systematic critics about Bernstein’s Revisionism. Hers critics make a great influensce in underestimating the meaning of Revisionism. Also, First and Second World War, the great economic crisis, and Nazism made Revisionism’ influence insignificant.

Since 1950′, Bernstein’s Revisionism has been estimated as positive and systematic theory by several scholars. Gneusis and Peter Gay played important role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