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린>

<가가린>을 보면서 나는 왜 <타이드랜드>의 질라이자 로즈가 생각났을까. 아마 <가가린>의 유리가 지닌 망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그것이 드러내는 환상이 너무나도 망상적이어서, 왜 그것이 재현되는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만들어진 기억이 두 영화를 연결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이드랜드>를 보고서야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가 끈질기게 드러내는 인물의 망상에 대해 의아한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 영화에서 바비 인형 머리를 손가락에 꽂고 쉼 없이 그들과 대화하며 광기에 가까운 면모를 드러내는 질라이자 로즈의 망상은 마약 중독자 부모에 의해 방치된 삶이라는 현실에서 그 까닭을 찾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자기 방어 또는 보호의 몸짓이라기보다 질라이자 로즈가 세계를 인식하는 체계, 온전하게 구축된 질서에 가까워 보였다. 질라이자 로즈의 마음에 대한 통약 불가능성을 나는 그의 현실적 비참을 빌어 모른 척하고 싶었을 따름일지도 모른다. 질라이자 로즈의 망상은 존재에 본질적이며 현실로부터 유추된 것 이상인 것처럼 보였다.

그에 비해 <가가린>에서 유리의 망상은 보다 더 현실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망상은 현실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무기다. 유리는 아파트 철거를 거부한다. 유리에게 아파트는 너무나도 특별하다. 단지 떠난 어머니가 돌아와야 하는 곳이며 이웃과 친구가 공유하는 기억의 저장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아파트는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유리는 이 아파트가 우주인과 우주선의 상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고 믿는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서 느꼈던 것처럼, 상징에 대한 믿음은 본디 망상적이지 않을까.

유리의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내가 이 철거 반대 투쟁을 아름다움의 한 양상으로 지켜보는 건 불가능한 것인지, 가가린 아파트를 지키고 싶다는 유리의 소망에 참여하는 것이 망상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 우삼, 디아나, 파리, 이주 노동자와 난민, 하층민의 삶에 환상의 층위를 부여하는 것은 망상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지 하는 질문. 나는 이에 대해 답하기 힘들다.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 아닐 것이고, 허위적이거나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다만 망상은 그 위험한 경계에서 우리를 빨아들이고, 때로는 타자에게 접속하는 지름길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십여 년 전 하월곡동 재개발 현장에 대한 사적인 기억을 떠올린다. 동네의 절반은 이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나머지 절반은 철거가 진행 중이던 그때, 아파트 입주자로 보이는 누군가가 조깅을 하다 멈춰 서서 공가 표식이 즐비한 나머지 절반의 폐허를 조용히 내려 보는 광경은 내게 복잡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조깅 하던 사람을 보면서 나도 그 광경 앞에 선 감상자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물어진 집을 다르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눈앞에 제시되지 않은 어떤 것을 떠올려야 했다. 철거와 재개발은 혐오나 갈등을 은폐하고 약자에게 행해지는 조용한 추방이자 적대다. 그 존재한 적 없어 보이는 사건을 떠올리기 위해, 어느 집에 걸린 빨간 깃발이나 부서진 액자 속 가족 사진 같은 사소한 단서에서 알지 못할 어떤 사연을 망상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나의 망상은 비겁할 따름이지만 <가가린>의 그것은 추방자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파트가 우주선이 되어 이륙하는 망상의 시간 동안 추방자는 으스러지는 현실을 미루고 자신의 특별함을 주장한다.

<에이리언>

SF, Sci-Fi, Science Fiction을 공상 과학이라고 번안해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다니. 과학적으로 구성된 대안 세계가 지닌 이름의 자리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 아닐까 하는 억울한 마음마저 짐짓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과학적 허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가 다른 것보다 과학의 측면에서 더 공상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SF는 과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문명을 잉태시킨 미지의 존재 모노리스(Monolith)는 과학적으로 추론 가능한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 덩어리로 인식하는 외계의 지적-영적 생명체란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과학적 상상은 과학적 세계에 대해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반과학적이다. 과학적 허구는 과학의 위대한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과학이 해 내지 못하는 것, 과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열정과 신경증을 드러낸다. 어쩌면SF는 과학의 공백에 대한 인간의 불안, 과학 법칙에 대한 무의식 또는 환상의 반격 같은 것 아닐까.

<에이리언>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지의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 에일리언은 인간의 전지전능한 과학적 세계에 대한 경고다. 인간 문명이 우주를 탐험하고 동면 장치로 생명의 시간을 조절하며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창조할 만큼 발달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발달할수록 물리적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함이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의 응집력은 커진다. 이 응축된 강박과 불안이 공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H. R. 기거가 상상해 낸 에일리언이다. 기거의 에일리언은 이물적(alien) 요소의 총합이다. 검고 윤기 나는 피부, 길쭉한 머리를 하고 곤충을 닮은 외형은 어쩌면 괴물을 묘사하는 익숙한 관습에 가깝다. 이 괴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 면모는 그 외의 것들이다. 이 괴물이 성체가 되기 전, 알에서 몇 단계의 유충으로 변태하기까지의 형상은 명백히 인간의 생식 기관을 닮았다. 정자, 난자, 인간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마치 과학과 지식의 세계를 침범하는 리비도, 충동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한 방울만으로도 주변을 녹여 버리는 산성 피는 어떤가. 이 괴물은 신체 기관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외부를 공격한다. 산성 피를 머금고도 녹아 내리지 않는 이 존재의 장기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입 속의 입. 이 괴물은 사람을 날카로운 금속성 이빨로 찢어 발기기보다 뜻밖에도 그 입 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또 하나의 입으로 인간의 육질을 관통한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다가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포함해서, 에일리언은 생애 과정부터 생물학적 특질까지 총체적으로 인간의 내부, 이면과 관련되어 있다. 에일리언은 상상하기도 힘든 치명적인 이물적 타자다. 그것도 인간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이 잉태한 자신의 적대자다.

인간의 내면,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는 모티프는 에일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폐쇄된 미로라는 공간에도, 우주의 깊은 암흑 속 미지의 LV-426 행성에도 새겨져 있다. 폐소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로 같은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통로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통로이고 LV-426 행성은 우주라는 심연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스트로모호의 인공지능 시스템 마더가 정체 불명의 신호를 포착하고 긴 동면에 빠진 승무원을 깨우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동면 – 에일리언과의 사투 – 다시 동면으로 구성된 이야기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것이 모두 꿈, 2등 항해사 리플리의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라게 된다. 인간의 정신 그 심연에 잠들어 있던 억압된 괴물이 노스트로모호라는 문명, 의식의 세계로 침입하려 하고 이를 리플리가 의식과 심연을 잇는 폐쇄된 통로에서 끝내 저지하는 중첩된 꿈에 대한 은유이기를 말이다. 이 바람이 간절한 것은 에일리언이 심연에서 튀어나온 형벌, 잠재된 것이 실현된 신적 폭력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의 점액질 분비물로 노스트로모호의 기계 금속에 녹아 붙어 버린 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달라스 선장의 절규는 꿈에서나 그릴 만한 지옥도가 아닌가. 그것도 과학 문명을 극도로 위태롭게 느끼는 마음이 만들 만한 지옥도. 명심해야 할 것은 에일리언이 인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일리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LV-426 행성이라는 심연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에일리언을 인간이 찾아 깨웠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서 깨어 난 것은 리플리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고 해야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꿈을 암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를 그토록 강렬하게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딜만한 고난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후 다섯 편의 후속작이 만들어질 만큼 프렌차이즈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리플리는 구원자의 면모를 확장해 갔다. 이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를 구하는 여성 전사가 되고 추방된 죄수들을 위해 거룩한 종교적 희생을 감내하며 발달한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200년 후에 부활해서는 인간을 냉소하는 구원자가 된다. 에일리언의 신적 폭력에 기술 문명이 아니라 순수한 투지와 집념으로 저항하는 구원자 리플리에게서 느끼는 신화적 매혹이 이 프렌차이즈를 이끌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우주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의 탐욕이 에일리언이라는 심연의 재앙을 자초하는 주범이 된다는 또 하나의 테마는 일련의 충격적이고 불길한 사건들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통해 드러낸 창조자 인간의 자가당착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 생명체 레플리컨트의 고뇌를 빌어 대자적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난폭한 존재 에일리언을 숭배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발달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어떤 충동으로써 말이다. 프렌차이즈의 시작이 된 <에이리언>은 이 모든 방향의 영감을 지닌 영화다.

<에이리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이라는 존재에 매혹되는 지점에 관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에이리언>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 매혹에 대해 보충한다. 그가 보충한 상상은 지구의 인간을 창조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있고 이들이 에일리언을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일리언이라는 존재를 리들리 스콧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리들리 스콧에게 에일리언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해 품는 환상의 담보물이다. 과학적 인식 체계가 발전하더라도 언제나 남는 인식 바깥의 것들, 인간의 사고가 닿지 않는 것에 대해 품는 편집증적 환상이 우리에게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표식 말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산성피를 가진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은 인간을 창조한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과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상상과 멀지 않다. 달이 하필이면 정확한 크기로 정확한 위치에서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완벽히 가리는 이유부터 우주가 빅뱅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까지 과학적 사고를 확장한다고 해도 사물과 존재에 대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열쇠의 담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비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은 체계적인 망상, 편집증에 대한 투쟁이지만 편집증은 언제나 과학의 심연에 존재한다. 리플리의 꿈 속 깊은 곳에서 에일리언이 기다린다는 상상은 과학이 자신의 심연에서 SF를 바라보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과학의 막다른 길에 공상과학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미쓰 홍당무>

고교 시절 왕따였던 양미숙은 졸업 여행 기념 사진을 찍을 때조차 반 친구들이 곁을 내 주지 않아 무리들 뒤에 파묻힌 존재였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스크럼을 짜서 양미숙이 파고들 틈을 틀어 막고 밀어 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대사처럼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양미숙의 비상식적, 병리적 행동의 배경에는 배제되고 멸시 당한 상처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쓰 홍당무>는 양미숙의 역사를 길게 풀어 내며 그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학급 친구들 뒤로 밀려나 가려지는 불쌍한 양미숙이 아니라 그럼에도 무리 위로 뛰어올라 기어코 기념 사진에 찍히고야 마는 양미숙의 악다구니를 보여 주며 시작된다. 졸업 여행 기념 사진 속 양미숙의 얼굴은 독기를 품고 일그러져 있다. 양미숙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방식 만큼이나 영화는 그럴 만한 이유보다 비상식적 행동에 관심이 있다.

영화는 양미숙의 화법으로 양미숙을 보여 주려 한다. 그에게 새겨진 투쟁심, 집착, 교활함, 두려움 등은 이 영화 곳곳의 대사와 양식에 내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화면 바깥의 목소리를 삽입하는 방식은 너무나 기괴하여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양미숙이 서종철 선생과 모텔에서 잠자리를 가진 날 아침, 서종철이 끝내 양미숙의 마음을 부정할 때 돌연 들리는 학생들의 책 읽는 소리는 서종철이 집으로 가 부인 성은교에게 “사랑해, 여보”라고 말할 때까지 장면과 상관 없이 울린다. 말 그대로 에코, 메아리 같은 이 소리는 순간 아찔하게 정신적 공황을 일으킬 것 같은 순간을 만든다. 교장 선생의 명상 방송 소리, 학교 축제 공연 호출 방송 소리, 양미숙과 서종희의 공연 소리도 포함해야 할 이 화면 바깥의 소리는 이명과도 같이 이야기의 흐름에 정신적 혼미함을 가져 온다. 이경미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이 느닷없이 화면과 어긋나며 울리는 기괴한 목소리는 영화가 양미숙의 신경증적 불안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이 영화의 서사와 욕망 전부를 구성하는 드문 한국 영화라는 점과 더불어 왕따 양미숙(과 서종희)에 대해 말을 하기보다 되도록 양미숙의 말을 하려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구성과 리듬이 복잡하고 어지럽지만 이야기가 치고 나가는 힘을 지닌 것은 양미숙이 품은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를 가공하지 않고 표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양미숙의 욕망과 망상의 에너지로 웃음을 생산하며 앞으로 나아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양미숙의 컴플렉스와 불안이 야기하는 소동극에 대한 웃음과 비웃음의 경계가 아슬아슬한 것은 아닐까 주저하게 된다. 양미숙이 상황을 이해하거나 결핍을 해결하는 비상식적 방식을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납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기괴한 감정을 해소하려는 웃음이라는 효과가 자칫 위험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이상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조용히 양미숙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방식은 삐뚤어 이상할지라도 지치지 않고 시도하는 양미숙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화 <미쓰 홍당무>의 소수자성은 이 비웃으며 응원하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