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소설의 내재적 구조에서 어떻게 그런 상이한 독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파악해 본다면, 우리는 차라리 소설 그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 즉 “종결되지 않았”고, 비일관적이며, 적대에 의해 가로질러져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나는 여기서 전통적인 헤겔적 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사태를 변화시키기(혹은 사태가 변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 정체성이 이미 “모순적”이어야 하고, 비일관적이며, 내재적 긴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으로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 「마르크스, 객체 지향적 존재론을 읽다」,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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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인의 난감한 면모 –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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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인>
영화 <괴인>의 초반부는 공사 현장을 생활인의 감각으로 묘사한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타카 소리,계단으로 피아노를 들어올리는 힘겨운 과정, 수고에 대한 답례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덤덤하게 응시하는 인부의 얼굴이 생활 세계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 중에서 기홍이 테이블쏘에 합판을 올리고 무심한 듯, 그러나 완벽하게 능숙하지는 않은 듯 맹렬한 전기톱에 밀어넣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직업과 생활 세계에 내재한 치명적 위험을 드러내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피아노 교습소의 공사 현장을 묘사하는 첫 시퀀스만 본다면 이 영화는 목수와 공사 인부의 노동에 대한 생활 감각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러나 이후 이 영화는 추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는 눈 앞에 펼쳐지는 사태를 인지할 수는 있으나 사태들을 모아 총체적으로 의미화하는 것은 곤란한 부류의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보고 난 후 이상하게 이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면, 그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하기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런 혼란을 느끼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제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누가 ‘괴인’인가 하는 질문을 품고 영화를 보면 처음에는 당연히 목수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기홍은 아무에게나 반말을 일삼고 이상하게 무례한 인물인데, 옥상에서 건넛집 남녀를 훔쳐보는 순간 앞으로 기홍의 기괴한 욕망과 인격을 묘사할 이 영화의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후 기홍의 집주인 남편 정환이 기홍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사건에 대해 과도한 관심으로 기홍의 세계를 침범하면서, 그 다음에는 보호종료 아동 하나가 그 사건의 범인으로 이들 사이에 등장하면서, 또 그 다음에는 집주인 아내 현정이 술을 들고 남편 몰래 기홍의 방을 찾으면서 ‘괴인’의 용의자는 연쇄적으로 확대된다. 마치 모든 인물이 일견 ‘괴인’의 면모를 지닌 것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이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이상한 면모를 관통하는 통합적 의미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인물의 기괴한 면모가 직업 또는 계급적 특징의 한 측면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뿐이다. 기홍은 목수 반장이라는 직업 세계의 성격을, 정환과 현정은 유한 계급의 권력과 허영을, 하나는 보호종료 아동의 취약함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위험을 내재한 정치적 환유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목은 단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각 인물을 정말 ‘괴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각 인물은 ‘괴인’의 개념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가기 전에 멈춘다. 예컨대 기홍은 옆집을 훔쳐 보고 여성에게 아슬아슬한 플러팅을 하기도 하지만 마트에서 임산부에게 계산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며, 더욱이 같이 일하던 친구 경준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현정의 친구가 의뢰한 인테리어 공사가 기약 없이 미루어지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기홍이 유력한 용의자에서 멀어지는 것은 정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마찬가지로 하나가 등장하면서 정환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의심은 하나에게 옮겨 간다. 특히 현정이 기홍과 함께 사라진 다음 날 아침에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떨군 정환은 그저 측은한 인물이 된다.
앞서 이 영화가 계급적 특질에 따른 인간의 괴인적 면모 고찰로 이 영화를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언급했지만, ‘괴인’의 용의선상에서 인물들이 조금씩 이탈하는 방식은 계급적 위상 관계에 따른 개념적, 인과적 이행이라기보다 단지 새로운 다음 인물이 등장하면서 관심 대상이 전환됐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때 ‘괴인’으로 보였던 이전의 인물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인물로 달리 바라볼 기회를 얻는다. 다른 인물들이 계급 적대의 환유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동안 보호종료 아동 하나는 정환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데서 끝나는 이 영화는 내게 묘한 미결감을 남긴다.
‘괴인’이 누구인지 한 인물로 확정하지 못하고 다른 인물로 계속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난감함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를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기홍이 정환의 집으로 이사 가는 공간 전환의 과정이 영화에는 담겨 있지 않다는 점이다. 기홍이 다세대 주택 옥상에서 옆집을 훔쳐보다 핸드폰을 벽 사이로 떨어뜨리고 난 다음 장면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기홍은 이미 이사한 새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기홍이 집주인 정환과 첫 대화를 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국면이 전환되고 본격적인 인물 사이의 미끄러짐이 시작된다는 징표를 영화는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밤길을 지나는 자전거 탄 두 남녀 장면은 반대로 무엇을 위해 공백 같은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의미의 단서를 던져 놓고 그것에 머무르는 것에는 저항하는 듯한 모순적 욕망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난감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텅 빈 얼굴의 감정적 출구 – 다음 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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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
<다음 소희>는 댄스 학원에서 홀로 춤을 연습하고 있는 소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씬에서 우리는 노래 없는 춤을 지켜 본다. 소리는 오직 소희의 거친 호흡, 스텝과 몸동작이 일으키는 격렬한 공명 뿐이다. 소희는 때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춤을 이어 간다. 소희의 춤 실력이 본디 뛰어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만, 음악이 소거된 채 홀로 추는 춤은 황량함과 고독, 그리고 어쩌면 처절함을 드러낼 뿐이다. 이 장면에서 음악은 소희만의 것이다.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 흘러 나오고 있을 음악이 어떤 분위기와 리듬감으로 춤을 감싸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소희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소희의 얼굴은 언제부턴가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 얼굴로부터 소희가 겪은 감정의 변화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동네 구멍가게에서 슬리퍼에 걸쳐진 사선의 햇빛은 소희의 공허한 얼굴을 오히려 더욱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표정 없이 소희가 사라지고 나면 그것에 붙들려 자꾸 부질없는 상상을 거듭하게 된다.소희가 저수지에 뛰어들기 전 골든 타임이 있지 않았을까, 이 일을 돌이킬 어떤 순간을 거슬러 생각해 볼 따름이다. 직전에 남자 친구 태준이 전화를 받았다면, 그리고 태준이 소희를 잠시라도 위로해 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소희가 손목을 그었을 때 부모가 소희를 다르게 대했다면.
소희가 남기고 간 것은 무너진 마음과 그가 맞닥뜨린 세계의 면모다. 영화는 소희의 얼굴보다 그가 겪는 일을 통해 그것을 이해시키려 한다. 취업률 평가의 함정에서 학생을 실적의 도구로만 대하는 특성화고와 교육 제도의 문제. 현장 실습생 제도를 악용하여 취약한 노동 현장에서 학생을 이중적 착취의 제물로 삼는 노동 환경과 해지방어라는 기만적 활동을 제도화하는 부도덕한 기업의 문제. 가혹한 노동을 끊임없이 외주화하며 고통과 책임을 위계적으로 전가하는 자본주의의 문제. 자신이 야기하는 부조리를 책임 지지 않는 관료주의와 기능주의의 문제. 양육과 보살핌으로부터 소외와 단절의 문제. 콜센터 해지방어 팀에 현장 실습을 나가는 순간 소희가 대면한 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들만큼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의 총체적 모순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각각의 모순이 서로 연결되고 구조화되어 있음을 후반부 오유진 형사의 수사를 통해 보여 준다. 오유진 형사를 경유하면서 우리는 소희의 개별적 경험을 구조적 차원에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소희의 텅 빈 얼굴이 끝내 하지 않고 놓아 버린 호소와 항변이 무엇인지, 또는 이 착취적이고 비윤리적인 노동의 비참 앞에서 소희가 필요로 한 위로가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또 욱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라도. 괜찮아. 경찰한테 말해도 돼.” 오유진 형사가 당부하는 이 말에 소희의 남자 친구 태준은 북받쳐 울먹거린다. 태준의 그 표정은 소희의 텅 빈 얼굴과 겹친다. 태준의 표정은 소희의 얼굴에 가로막힌 감정의 출구가 된다. 동시에 태준의 표정은 소희의 얼굴이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 또는 그렇다고 믿고 싶은, 그리고 태준을 통해 돌려받는 우리 자신의 소희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두 매개자를 통해 모순의 구조를 인식하고 소희를 연민하는 자리에 호명하는 이 영화에 나는 복잡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소희의 죽음을 이해하고 대변하는 것이 오유진 형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찰이 노동의 문제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나의 현실적 감각에서는 공감하기 어려워서임을 먼저 실토해야겠다. 그리고 다른 의문이 잇따른다.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의 형상을 밝히고 따져 묻는 오유진 형사가 너무나 영웅적 개인으로 보여서, 영화가 현실을 환기한 후 이를 환상으로 봉합하려는 것은 아닌지, 이것이 소희의 죽음에 대한 영화의 무력감의 징후는 아닌지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참고하고 있는 실제 사건은 얽히고 은폐된 문제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밝혀졌다. 복수의 언론사 기자가 포기하지 않고 취재했고, 노동조합과 정당이 연대하면서 묻힐 뻔한 사건이 힘겹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실화의 사회적 연대가 영화의 영웅적 개인보다 실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실화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런 질문을 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환상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면) (소희의 죽음에 대해) 개인의 연민과 노력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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