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SF, Sci-Fi, Science Fiction을 공상 과학이라고 번안해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다니. 과학적으로 구성된 대안 세계가 지닌 이름의 자리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 아닐까 하는 억울한 마음마저 짐짓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과학적 허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가 다른 것보다 과학의 측면에서 더 공상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SF는 과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문명을 잉태시킨 미지의 존재 모노리스(Monolith)는 과학적으로 추론 가능한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 덩어리로 인식하는 외계의 지적-영적 생명체란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과학적 상상은 과학적 세계에 대해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반과학적이다. 과학적 허구는 과학의 위대한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과학이 해 내지 못하는 것, 과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열정과 신경증을 드러낸다. 어쩌면SF는 과학의 공백에 대한 인간의 불안, 과학 법칙에 대한 무의식 또는 환상의 반격 같은 것 아닐까.

<에이리언>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지의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 에일리언은 인간의 전지전능한 과학적 세계에 대한 경고다. 인간 문명이 우주를 탐험하고 동면 장치로 생명의 시간을 조절하며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창조할 만큼 발달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발달할수록 물리적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함이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의 응집력은 커진다. 이 응축된 강박과 불안이 공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H. R. 기거가 상상해 낸 에일리언이다. 기거의 에일리언은 이물적(alien) 요소의 총합이다. 검고 윤기 나는 피부, 길쭉한 머리를 하고 곤충을 닮은 외형은 어쩌면 괴물을 묘사하는 익숙한 관습에 가깝다. 이 괴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 면모는 그 외의 것들이다. 이 괴물이 성체가 되기 전, 알에서 몇 단계의 유충으로 변태하기까지의 형상은 명백히 인간의 생식 기관을 닮았다. 정자, 난자, 인간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마치 과학과 지식의 세계를 침범하는 리비도, 충동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한 방울만으로도 주변을 녹여 버리는 산성 피는 어떤가. 이 괴물은 신체 기관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외부를 공격한다. 산성 피를 머금고도 녹아 내리지 않는 이 존재의 장기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입 속의 입. 이 괴물은 사람을 날카로운 금속성 이빨로 찢어 발기기보다 뜻밖에도 그 입 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또 하나의 입으로 인간의 육질을 관통한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다가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포함해서, 에일리언은 생애 과정부터 생물학적 특질까지 총체적으로 인간의 내부, 이면과 관련되어 있다. 에일리언은 상상하기도 힘든 치명적인 이물적 타자다. 그것도 인간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이 잉태한 자신의 적대자다.

인간의 내면,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는 모티프는 에일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폐쇄된 미로라는 공간에도, 우주의 깊은 암흑 속 미지의 LV-426 행성에도 새겨져 있다. 폐소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로 같은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통로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통로이고 LV-426 행성은 우주라는 심연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스트로모호의 인공지능 시스템 마더가 정체 불명의 신호를 포착하고 긴 동면에 빠진 승무원을 깨우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동면 – 에일리언과의 사투 – 다시 동면으로 구성된 이야기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것이 모두 꿈, 2등 항해사 리플리의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라게 된다. 인간의 정신 그 심연에 잠들어 있던 억압된 괴물이 노스트로모호라는 문명, 의식의 세계로 침입하려 하고 이를 리플리가 의식과 심연을 잇는 폐쇄된 통로에서 끝내 저지하는 중첩된 꿈에 대한 은유이기를 말이다. 이 바람이 간절한 것은 에일리언이 심연에서 튀어나온 형벌, 잠재된 것이 실현된 신적 폭력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의 점액질 분비물로 노스트로모호의 기계 금속에 녹아 붙어 버린 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달라스 선장의 절규는 꿈에서나 그릴 만한 지옥도가 아닌가. 그것도 과학 문명을 극도로 위태롭게 느끼는 마음이 만들 만한 지옥도. 명심해야 할 것은 에일리언이 인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일리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LV-426 행성이라는 심연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에일리언을 인간이 찾아 깨웠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서 깨어 난 것은 리플리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고 해야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꿈을 암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를 그토록 강렬하게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딜만한 고난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후 다섯 편의 후속작이 만들어질 만큼 프렌차이즈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리플리는 구원자의 면모를 확장해 갔다. 이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를 구하는 여성 전사가 되고 추방된 죄수들을 위해 거룩한 종교적 희생을 감내하며 발달한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200년 후에 부활해서는 인간을 냉소하는 구원자가 된다. 에일리언의 신적 폭력에 기술 문명이 아니라 순수한 투지와 집념으로 저항하는 구원자 리플리에게서 느끼는 신화적 매혹이 이 프렌차이즈를 이끌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우주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의 탐욕이 에일리언이라는 심연의 재앙을 자초하는 주범이 된다는 또 하나의 테마는 일련의 충격적이고 불길한 사건들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통해 드러낸 창조자 인간의 자가당착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 생명체 레플리컨트의 고뇌를 빌어 대자적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난폭한 존재 에일리언을 숭배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발달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어떤 충동으로써 말이다. 프렌차이즈의 시작이 된 <에이리언>은 이 모든 방향의 영감을 지닌 영화다.

<에이리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이라는 존재에 매혹되는 지점에 관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에이리언>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 매혹에 대해 보충한다. 그가 보충한 상상은 지구의 인간을 창조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있고 이들이 에일리언을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일리언이라는 존재를 리들리 스콧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리들리 스콧에게 에일리언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해 품는 환상의 담보물이다. 과학적 인식 체계가 발전하더라도 언제나 남는 인식 바깥의 것들, 인간의 사고가 닿지 않는 것에 대해 품는 편집증적 환상이 우리에게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표식 말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산성피를 가진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은 인간을 창조한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과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상상과 멀지 않다. 달이 하필이면 정확한 크기로 정확한 위치에서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완벽히 가리는 이유부터 우주가 빅뱅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까지 과학적 사고를 확장한다고 해도 사물과 존재에 대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열쇠의 담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비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은 체계적인 망상, 편집증에 대한 투쟁이지만 편집증은 언제나 과학의 심연에 존재한다. 리플리의 꿈 속 깊은 곳에서 에일리언이 기다린다는 상상은 과학이 자신의 심연에서 SF를 바라보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과학의 막다른 길에 공상과학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onedayontheroad

한국에는 10만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고 한다. 이는 환산하면 반경 1제곱 킬로미터 내에 1 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도로 밀도가 높은 나라 중 하나란다. 그런데 한국도로공사는 2020년까지 도로를 20만 킬로미터로 늘리겠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야생동물 중 가장 작은 활동영역을 가진 너구리조차도 1제곱 킬로미터의 영역을 움직이며 산다. 적어도 도로 하나는 생활영역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한국의 야생동물들은 절대 안전한 제 집을 가질 수 없다.
지리산 인근 88고속도로와 산업도로 등지를 중심으로 로드킬 사례를 조사 연구하는 최태영, 최천권, 최동기 세 사람은 30개월동안 5천 7백여 동물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지리산은 하나의 섬이다. 이 산 둘레를 도로가 완전히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리산의 야생동물들이 지리산 안에서만 고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생활 영역과 습성을 섬처럼 두른 도로가 강제할 수는 없다.
로드킬을 조사하는 이 세 사람은 각 동물들마다 로드킬을 주로 당하는 지역과 시간대 등에 어떤 패턴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매일 인근 도로를 돌아 다니며 로드킬 데이터를 쌓아 간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종들이 모든 지역에서 골고루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지도상에 로드킬 지점을 표시하는 점들은 빼곡하게 표시되어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는 동물들에게 전방위적 재앙이다.
세 연구원은 어느 날 88고속도로에서 조금 전 차에 치인 삵 한 마리를 발견한다. 의식은 없지만 다행히 호흡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삵을 데리고 와 정성스레 치료한다. 이 삵에게 연구원들은 ‘팔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줬다. 몇 달 후 팔팔이는 예의 건강을 되찾고 다시 야생으로 돌아간다. 팔팔이에게 부착한 무선 신호 장치로 팔팔이의 생활을 추적하던 세 사람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팔팔이는 약 일주일간 고산 지대를 넘어 약 30킬로의 여정 끝에 88고속도로 인근으로 가 버린 것이다. 채 한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삵이, 그것도 사고 당시 기억할 수도 없었을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팔팔이는 그 여정 중 12개의 도로를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다. 본능에 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팔팔이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 치어 발견된 그 지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어미가 차에 치여 쓰러지자 이 곳을 떠나지 못하던 새끼들이 어미 주변에서 똑같이 차에 치여 먼지처럼 사라지는 곳. 금슬 좋은 너구리에게 의도하지 않은 이별을 강요하는 곳. 이 곳이 바로 인간이 만든 자동차 도로다.
약 3년 전.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저 편 연신내 로타리 가운데에 거무스름한 작은 무언가가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비닐 봉지려니 생각했다. 계속 시선이 그 쪽으로 가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마리 개였다. 도로를 횡단하던 중 차에 치인 것이 분명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반쯤은 땅에 납작하게 붙어 있고 반쯤은 일어나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차로 한 가운데에서였다. 자동차들이 사방에서 지나갈 때마다 나는 머리 뒤가 찌릿함을 느꼈다. 처참함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하게 걸레처럼 붙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그 개의 무력해 보이는 몸부림이 교차로를 오고가는 자동차들을 멈추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야생동물은 너무나도 무고하지만 그들의 먼지 같은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사람처럼 절규하거나 원망하지도 않고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의 죽음은 떳떳하고 무고했다. 인간은 이러한 타자의 비극을 모른 채 하고 문명을 키우고 있으니, 문명은 그 자체가 인간의 원죄이고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 소음은 그 물질적 현현이다. 나는 우리의 원죄를 한 시간 반 동안 똑똑히 지켜봐야 했고 그 앞에서 벌어지는 동물들의 비극은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중간 중간 도로 위의 동물 시체 위로 도로 개발 소식과 이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전망하는 뉴스 멘트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한국은 여전히 개발이 곧 복음인 곳이다. 이제는 인간의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정복이 불러온 응징의 상징과도 같은 광우병 소도 제 손으로 들여 오고 있고 온난화의 위협은 갈수록 음험해지고 있다. 개발과 성장을 위해 희생되는 인간들에게조차 관심이 없는 이 땅에 한낱 야생동물들의 쉴새 없는 떼죽음을 심각하게 자책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생각보다 길거리에 내던져진 동물들의 시체가 알리고 있는 것은 동물 애호가의 측은지심 이상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는 개발 문명의 살해현장, 공모하고 묵인하고 있는 것의 증거 제시로서 이들의 시체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상징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생동물들의 죽음으로부터 가난한 인간의 고난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퍼다 쓰면서 감당해야 하는 희생의 크기에서 동물들의 죽음이 차지하는 양은, 남한에서만 전국 도로에서 1년에 3만여 마리 그 이상이다. 모든 곳에서 인간의 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보기 싫어도 보이고 하기 싫어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래서 도로 한 가운데 바짝 엎드려 야생동물들의 소리 없는 죽음을 지켜보는 시선은 오히려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