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정연한’ 법은 정의상 ‘맹목적’이고, 무지하며, 특수한 열정들 위에 일으켜 세워져 있다.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어떤 특수한 것도 의미하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의미’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그/그녀 자신을 인지할 수 있게 해 주는 하나의 기표를 통해서 결합된다.

天地不仁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구호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파괴적 성격은 단 하나의 행동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공간을 없애는 일이다.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공간에 대한 그의 욕구는 어떠한 증오보다도 강하다.
파괴적 성격은 젊고 쾌활하다. 왜냐하면 파괴한다는 것은 우리들 본래의 나이의 흔적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을 쾌활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파괴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완전한 환원, 아니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말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성격은 지속적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어느 곳에서나 길을 보게 된다.
…또 그는 어디에서나 길을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은 언제나 교차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에도 그는 다음의 순간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현존하는 것을 그는 파편으로 만드는데, 그것은 파편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파편을 통해 이어지는 길을 위해서다.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이러한 면이 번역과 원문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접선이 원을 살짝, 그것도 단지 한 점만을 건드리고 또 이러한 건드림이 무한대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접선의 법칙을 규정하는 것처럼, 번역 역시 살짝, 그것도 단지 의미의 무한히 작은 점들만을 건드림으로써 언어적 움직임의 자유 속에서 충실성의 법칙에 따라 그 스스로의 고유한 길을 추적하는 것이다….’

Walter Benjamin <번역가의 과제> 중에서

그의 비유는 무한한 상상력의 영역을 건들면서 그가 말하는 순수한 언어의 영역에 우리 영혼의 직선이 살짝 접하도록 해 준다. 그가 말하는 아우라가, 또는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가, 또는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과 만나면서 밝아오는 구원의 가능성은 이처럼 잠시 원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하나의 접선이 그 일회적이지만 영원한 순간을 기억하면서 나름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은 결코 머무르지 않으며 섬광처럼 지나갈 뿐이다. 그가 멜랑콜리한 것은 인간은 결코 그 원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살짝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커의 노스탤지어는 결코 퇴행적이지 않다.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원에 접하지 못했음을, 비상사태가 진정한 비상사태가 되지 못했음을, 실패와 패배 속에서 나타나는 바로 앞의 원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의 증명 속에서 쓸쓸히 현재를 과거와 연관시키는 감성으로서 노스탤지어를 지닌다.
과거가 아름다웠다고 느끼는가? 그것은 과거가 너무나도 추했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에 의하면 한 개인이 자신에 대한 어떤 像을 획득하는지의 여부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우연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문제가 우연에 좌우된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일만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은 이러한 것이 어쩔 수 없이 지니게 마련인 私的인 성격을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관심사들이 그러한 사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은 주위의 외적인 사실들을 자신의 경험 속에 동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 연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신문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문의 의도가,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들이 독자들의 경험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면, 신문은 이러한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며, 그리고 이러한 정반대의 의도는 달성되고 있다. 신문의 본질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영역으로부터 제반 사건을 차단시키는 데 있다. 저널리즘적인 정보의 원칙들, 예컨대 새로움, 간결성, 이해하기 쉬울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각의 소식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점은 신문의 편집 및 문체와 더불어 그러한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칼 크라우스 Karl Kraus는 신문의 어투가 그 신문을 읽는 독자의 상상력을 얼마나 마비시키고 있는가를 지칠 줄 모르고 폭로하고 있다.) 정보가 경험을 차단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정보가 <전통>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은 대량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발간된다. 따라서 어떠한 독자도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가지 전달형식들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관계가 존속해 왔다. 옛날얘기가 정보라는 것에 의해 대체되고 정보가 센세이션이라는 것에 의해 대체되는 가운데 경험은 점차로 위축되어 왔다. 이러한 형식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 이야기Erzählung 형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야기 형식은 가장 오래된 전달형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사건 그 자체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정보가 바로 그러한 것을 목표로 삼는 데 반해). 이야기는 사건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보고자의 생애 속으로 침투시키는데, 그것은 그 사건을 듣는 청중들에게 경험으로서 함께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에 陶工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

벤야민이 말하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숙고해 봐야 할 문제이다. 아니, 생각한다기보다는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경험을 내 것으로 하다니, 내가 어떤 상을 획득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에 대해서 나는 느낄 수 있는가. 구체적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상상력과 개입, 접촉이 없이는 성사될 수 없는 것들…우리가 잃어버린 언어들…모두를 포섭하는 보편자에 의해 동일화되고 무미건조하게 짜여진 언어에 의해 분절화됨으로써 생략된 곳, 내가 기거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