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14

뜸하게 찾아보는 박노자의 글이 요즘 점점 좋아집니다.
제가 과연 소위 맑시스트나 좌파 뭐 이런 수사적 범주에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일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게는 원하고 노력한다면 최소한 중산층 언저리에 낄 수는 있을 만한 사회적인 조건이 조금이라도 있기는 하고
그것이 주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또 원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관념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혁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객관적인 존재로서 제게 있어서조차도 혁명은 간절함과 동시에 두려움이나 불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봐 온 혁명을 보면 또한 혁명을 쉽게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박노자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혁명은 권력과 부의 철폐가 아니라 이동으로 귀결됐으니까요.
저는 혁명을 낭만적인 형태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어떤 변화의 양상들이 축적되어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질적인 단절이나 이동이 발생했음을 뒤늦게 알게 될, 즉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될 그런 긴 호흡의 혁명.
(지구상의 몇몇 국가나 지역에서가 아니라, 즉 변화의 전위가 아니라 전체가 바뀌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긴 호흡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과연 이런 긴 호흡의 시기를 지나고 난 후에는 과연 모순이 종식될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혁명 자체에 모순이, 모순 자체에 혁명이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내게 사회적 변화는 그래서 혁명보다 급진적 개혁에 가까운 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집니다.
방금 떠올린 엉터리 가설인데 혁명은 무의식의 형태에, 개혁은 의식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진보적 또는 급진적 의식이 사회 개혁을 주도해 가면서 서서히 무의식의 영역을 바꾸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것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마르쿠제보다 ‘이지’가 빨랐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서구보다 앞선 동아시아의 개인주의 전통… 명나라의 ‘저주받은 철학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개인주의의 가치를 논할 때 필자는 늘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 하나는 “개인주의란 바로이기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럴 때 필자는 개인주의·이기주의, 계급주의와 사회주의 등을 “국민 단결을 저해하는불온 사상”으로 지칭한 일제와 역대 군사 정권을 생각하면서, 자신과 남의 권리를 위해서 연대할 줄 아는 진정한 ‘개인’과,오히려 기존의 인습에 매몰돼버리는 몰개성적 ‘이기주의자’가 정반대 개념임을 역설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정반대 개념

△ 중국 근세의 급진적 개인주의의 원조 격인 이지(이탁오). 서구 연구자들이 ‘저주받은 철학자’로 일컫는 개성 철학의 선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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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질문은 훨씬 더 복잡한 설명을 요구한다. 바로 “개인주의라는 서구의 가치를 왜우리까지 수용해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통제와 훈육의 전체주의적 병영 사회를 군사 정권 이념가들이 ”우리 고유(동양) 문화발전의 결과“로 선전하면서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이질화하기 위해 서구만의 전유물로 선전해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물음이다. 서구의부강에 대한 선망을 그 사유의 출발점으로 서구·일제의 군국주의·훈육주의를 무조건 베끼면서 ‘근대화 세력’을 자칭해온 남한의주류가, 그들만을 위한 근대화 밑에 깔려 있는 서민·노동자들에게 복종이 아닌 자칫 자존·인격 의식을 생기게 할 수 있는개인주의를 비하하기 위해서 ‘서구적’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에 필자는 쓴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러면 수출 경제와 국민의례(남한판일제 시대의 황궁요배)는 ‘고유한 우리 것‘이란 말인가?

개인주의란 정말 서구만의 가치인가. 기존의 사회적 틀들을 회의적으로 의식하여 개개인의개성(욕망, 신념 등)과 인격을 사회적 압력과 억압에서 지키려는 사상적 경향으로서 넓은 의미인 개인주의는, 억압·통제를 특징으로하는 계급사회와 함께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의 신(우상)을 숭배하거나 로마제국의 군대에 가느니 차라리콜로세움에서 야수들에게 먹혀 죽겠다는 초기 기독교인이나, “군대가 가는 쪽을 쳐다보지도 말라”, “칼 찬 자에게 설법하지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인도의 초기 승가, 약육강식의 무법의 세상을 ‘인’(仁)으로 교화하겠다는 초기 유가 등에서는일종의 도덕적인 개인(개성)주의가 보인다. 보편적 도덕에 기반을 두는 ‘나’의 가치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이 자세를 어떻게 달리표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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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동적인 존재인 개인의 욕망도 인정한 왕양명.

세계 제국(한나라, 로마제국, 인도의 아소카 제국 등)들이 성립된 전후에 이와 같은 수준의개인주의적 저항의식이 가능했다면 세계 제국의 시대가 종말로 접어들고 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세계 체제의 골격이 생겨나기 시작한16~17세기의 전환기는 어땠을까? 인간이 종교를 맹신하지 않고 우주의 생명력과 직결되는 정열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해서 화형을 당한 브루노(1548~1600)나,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등 제도권 종교인들의 미움을 받은스피노자(1632~77) 같은 ‘개성과 자유의 전도사’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집단적인 가치로부터 ‘독립선언’을 했다.

서구보다 생산력이 훨씬 더 발달되고 국가이념인 유교 이외에도 ‘공인된 이단’으로서불교·도교가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명나라(특히 양자강 이남)에서의 ‘개인 해방 운동’은 더 활발했다. 그 운동의 선봉에,각자의 마음에서 윤리를 찾고 능동적인 존재인 개인의 욕망도 인정한 왕양명(王陽明·1472~1529)과 그 제자들인 이른바 ‘양명좌파’로 불리는 양명학의 개인주의적·실존주의적 급진파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천고의 이단아’의 이름을 얻은 사람은, 중국근세의 급진적 개인주의의 원조 격인 이지(李贄·아호 탁오 卓吾·1527~1602) 선생이었다.

‘공맹 우상화’ 공격하다 베이징 감옥에…

모든 규범과 단속을 벗어나고자 했던 불세출의 반역자인 이지를 이야기하자면 ‘회색지대’나‘경계인’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근대적 연구자들이 그를 ‘중국 철학자’로 분류하지만, 대대로 오늘날푸젠성의 취안저우에 살면서 이란·아랍 지역 등과의 해상 무역을 생업으로 삼았던 그의 조상들은 이슬람을 신앙으로 하는회족(回族)이었다.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1384년에 이란의 이슬람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 등이 족보에서 나열되는 등신앙·혈통상 중동과의 연관이 강한 집안에서 자란 이지가 이슬람 철학을 접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생과 가문의 신앙 못지않게 그의 신분적 위치도 좀처럼 ‘회색지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친척대부분이 무역에 종사했는데, 이지는 ‘호구지책’으로 과거에 응시해 벼슬아치가 됐다. 1555~80년, 거의 25년 동안 고을의원등을 지냈는데 그의 마음은 늘 ‘도(道)의 묘함’에 잠겨 있었다. 자신과 부인 황씨의 묘지명에 관명(官名)이나 직급을 쓰지도않은, 벼슬아치이기를 거부한 벼슬아치, 바로 이지였다. 퇴직 뒤에 친구 경정리(耿定理)의 집에서 살다가 친구가 죽고 나서 사찰에들어가 머리를 깎았지만(1588년) 역시 그답게 법명이나 계를 받지 않았다. 유림이면서도 비승비속(非僧非俗)…. 전국을 전전했던그의 마지막 거처는 ‘성인(聖人)의 모멸’ ‘혹세무민’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적 죄목으로 잡혀 들어간 베이징의 감옥이었다.거기에서도 그는 “난 생시에도 친척들이 나를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 내 죽음 이후에도 네 묘를 지키는 따위의 위선을 챙기지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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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기지 않으면 안 될 이단적 역사 서술, 이지의 <장서>. 그는 성리학적 교조주의자들이 우상으로 만들어놓은 공맹에 대한 합리적인 문제제기로 파문을 일으켰다.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이슬람, 난징에서 1598~99년에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를 통해이야기를 들은 서구의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세계 종교들을 다 알면서도 어느 종교·사상 집단에도 충성을 바치지 않았던 ‘이념적아나키스트’ 이지의 ‘이데올로기적 범죄’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가 세상을 달리한 뒤에 <분서>(焚書·‘불에 타버릴책’·1590)나 <장서>(藏書·‘숨겨야 할 책’·1600) 등 그의 책들이 왜 금서 목록을 장식하게 됐을까? 그것은‘성인 모멸’, 즉 그가 경멸했던 이른바 ‘학자’인 성리학적 교조주의자들이 우상으로 만들어놓은 공맹에 대한 합리적인문제제기였다. “공자 이전 1천년 동안 한 사람도 제대로 된 인간이 없었단 말인가?” “공자는 남에게 공자를 학습하라고 말한적이 없다. …자신에게 어짊(仁)을 구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백성들에게 (획일적인) 도덕과 예의를 강요하려고 국가의 형벌을남용하는 탐욕스러운 거짓 ’인자‘(仁者)의 무리”(<분서>)…. 공맹 사상을 상징자본의 원천으로 삼은 이른바‘인자’들은 그의 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공맹 우상화에 대한 미증유의 공격은, 이지의 근본적인 사상인 자율적 개성(아기와 같은천진한 마음- 동심)의 강조와, 국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통제 기제들로 인한 개성 왜곡에 대한 저항의 결론일 뿐이었다.“동심이란 바로 진심이다. …우리는 동심을 어떻게 잃어버리는가? 처음에는 견문이 눈과 귀를 통해 들어와 주인이 되어 동심을잃어버린다. 자라면서 도리가 견문을 통해 들어와 동심을 잃어버린다. 살아가면서 견문과 도리들은 더 많아지고 알아야 할 것들이더욱 넓어진다. 나아가 명성이 좋음을 알게 되고 이름을 알리려 힘쓰면서 동심을 잃어버린다. …”(<분서>의‘동심설’).

부단히 ‘마음속의 반란’을 일으켜라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각종 제도권적 습관이나 가치관, 지식, 세계관들이 결국 우리를지배하게 되고 ‘제도’의 노예로 만든다는 말은, 20세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가(마르쿠제·아도르노)나 푸코, 알튀세르 등비판적 지성인들이 해오지 않았던가? ‘나’를 지키려면 외부의 이념 주입이나 훈육을 물리칠 줄 알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의 제1조는,이미 명나라 말기에 제창됐다. 재미있게도 이지의 급진적 개인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정해진 시비(즉, 표준이나윤리)란 없다. 사람마다 시비가 다를 수밖에 없다”(<장서>)는, 오늘날의 해체주의를 방불케 하는 인식론적상대주의이었다. 어떤 획일적인 거대담론도, 서로 다른 좌표를 가진 개인들을 억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종의‘포스트’ 담론들을 ‘서구적인’ 것으로 아는데,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 아닌가?

서구 연구자들이 ‘저주받은 철학자’(philosophe maudit)로 일컫는 개성 철학의선구자 이지….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개인들이 “권위적인 주장에 따라 똑같이 함께짖어대는 개”(<분서>), 생각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부단히 ‘마음속의 반란’을 일으키고 내가 과연 나답게 사는지나대로 생각하는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1. <李贄散文選注>, 張凡 編注, 北京 師範學院出版社, 1992, 241쪽.
2. 홍승직 옮김, <분서>, 홍익출판사, 1998, 363쪽.
3. 신용철, “16세기 이탁오의 진보적 역사관“, <한국사학사학보>, 제6호, 2002년 9월, 135∼175쪽.
4.Yong-chul Shin(신용철), 〈Die Sozialkritik des Li Chih(1527-1602): amBeispiel seiner Einstellung zur Frau〉, Peter Lang, Frankfurt amMain-Bern, 1982, 196p. (이지의 남녀 평등주의적 경향에 대한 연구).
5. Hok-lam Chan,〈Li Chih(1527-1602) in Contemporary Chinese Historiography: New Lighton his Life and Works〉, M. E. Sharp, N. Y., 1980, 207p. (홍콩 출신의 유명한중국학자인 陳學霖 교수의 이지 관련 사료- 묘지명, 족보, 가택 문서-와 이지의 저서 진위 여부에 대한 상세한 연구, 이지 관련1960∼70년대 중국 연구 업적을 망라함).

월드컵의 빛과 그늘/ 박노자

현재 한국의 월드컵 열기를 생각하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일이다. 여러 ‘플러스’ 중에서 몇 개라도 열거하면, 고용 창출, 한국 알리기, 외국 손님의 폭발적 증가를 통한 ‘세계와의 만남’ 등의 효과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효과들마저 이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 창출’이라고 하지만, 월드컵의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절대 다수의 직장이 ‘파리목숨’ 비정규직이라는 사실부터 머리에 떠오른다. 곧, 외국인에게 귀엽게 웃어주면서 한국 토산물을 파는 ‘민간 외교관’ 아가씨들이, 사실상 시간당 1500~2000원을 받으면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착취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토산품을 사는 외국인이 만약 스칸디나비아처럼 비정규직이 법으로 금지된 지역 출신이라면, 그 사실을 알 경우에 한국 지배층의 ‘아이엠에프 극복’이라는 허풍을 어떻게 볼까?

그러나 ‘국위 선양’의 애호가들이여, 걱정하지 마시기를! 절대 다수의 월드컵 손님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들을 위해서 준비된 각종의 ‘한국 알리기’ 프로그램에서 살아 숨쉬는 ‘민중의 한국’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대문·남대문에 가서 놀라울 정도의 싼 가격으로 양질의 상품을 사도, 그 ‘가격 경쟁력’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그렇지 않아도 탄압을 받는 외국인·비정규직 노동자의 집회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부에 감사를 보내시기를! ‘모처럼 오신’ 외국의 ‘귀빈’들이 이미 박제화·박물관화되어버린 ‘전통 문화’만 약간 구경하고 그걸 ‘진짜 한국’으로 알 것이다. 불의와 착취에 맞서는 민중의 정신이야말로 한국의 가장 고귀한, 지금도 살아 숨쉬는 전통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명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바깥세상’과의 자유로운 왕래가 매우 어려웠고, 병역 미필자 남성이 여권을 쉽게 받을 수 없는 부끄러운 현실을 청산하지 못한 한국에 ‘세계와의 만남’은 분명 아주 귀한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을 계기로 하여 어떤 종류의 ‘세계’가 올지 생각해보자. 비행기·호텔·경기장 입장권의 값을 감안해 축구공과 운동복을 만드는 중국·인도·파키스탄·동남아의 노동자들이 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게 돈만의 문제인가? 한국인이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이 어렵고 번거로운 만큼 그들로서 한국 비자를 받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비자를 잘 받아도 한국 공항에서 이유도 없이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물론, 월드컵 기간이라고 특별히 한국의 관련 기관이 ‘자비’를 베풀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된 ‘고객’은, 돈이나 입국 절차에 문제없는 서구·미국·일본 등의 ‘특권 지역’ 출신일 것이다. 그들과의 만남도 소중하지만, 일산·안산·인천의 공단들에서 욕설·구타가 없는 한국인과의 동등한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고언(苦言)은, 월드컵 의미의 전면적인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광기에 휩쓸린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라는 일그러진 배경을 두고서도, 잔치는 어디까지나 잔치다. 비록 국가주의·상업주의의 상징인 ‘빅 스포츠’의 논리에 의한 일이지만, 세계의 시선이 잠시나마 한국에 집중된다는 사실은, 나에게도 큰 경사이자 자랑이다. 다만, 그 잔치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88올림픽이 노태우 정권 시절의 권위주의 사회를 민주 사회로 만들지는 않았듯이, 2002월드컵도 권위주의 잔재에 신자유주의 모순이 복잡하게 겹친, 상처 입은 사회를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