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EBS 시네마 천국이 매주 한 주제를 정하고 그와 관련된 영화 이야기를 할 때였다.

나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그 주 주제를 보고 그 어구에 그만 반해 버렸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니.
이 얼마나 반골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나는 언제나 게으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상은 나를 부지런히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다그치기만 한다.
생존을 위한 부지런함에 이 순간이 괴로울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미 누군가의 책 제목이었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살구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과 살구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된 이후로 살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다며 ‘무용한 지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버트란드 러셀은, 수다스럽게 지식을 실용성과 효율성으로 강제하는 세상과 비합리성, 광신도적 맹신으로 치닫는 반작용을 비판하고 모두가 노동의 고단함을 줄이고 게으를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그 텅 빈 속에서 피어나는 무용한 지식에의 열정을 찬미한다.
게으를 때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 내부에서 시작하는 이해와 표현과 존중의 욕구다.
나를 성숙하고 안정된 존재로 형성하는 데 게으름의 빈 틈은 필수적이어서 우리는 여가 속에서 사색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노동의 피로 또는 실직의 피폐함 속에서 자신과 세상의 진실을 피하고, 많은 창의적인 사고와 인류애가 생산과 효율성의 논리로 인해 묻히고 만다.
서로가 적당한 수준의 노동 시간을 나누고 그만큼의 여가를 나눌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지금(1930년대) 인류의 과제다…
버트란드 러셀은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여가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사회 변화를 고민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지났는데 지금 여기에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진심으로 모두가 덜 일하고 더 많이 여가를 즐김으로써 사색하고 스스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게으르게 (어떤 결과물을 기대 받아 그것이 노동이 되어 버리지 않는 한에서) 어떤 가치와 미적 개념에 골몰하고 심연에 뿌리를 두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삶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진심으로 꿈꾼다.

누구도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호기심을 맘껏 탐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배곯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젊은 작가들은 기념비적인 대작을 내는 데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감각적인 작품을 써서 주의를 끌어보려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생의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증 대신에 말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1퍼센트는, 직업상의 일에 써 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들은 그들의 생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창성이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맞출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가의 좋은 점은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생활의 기회를 가지게 된 평범한 남녀들은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모두가 장시간의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할 것이므로 전쟁 취미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도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p31~33

버트런드 러셀은 현대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오래 된 공허한 신화로 인해 최소한의 노동과 최대한의 여가라는 선물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노동하고 생산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유희하고 소비하는 존재다. 노동이 자연에 대한 투쟁이라면 유희는 그것과의 공존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신경쇠약 직전까지 스스로를 내몰면서 가혹하게 노동하고 있는 것일까. 왜 모두들 근면 성실이라는 강박에 시달릴까. 노동으로 삶을 소진시키지 않고 그것을 게으른 유희에 할애함으로써 산다는 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싶다. 게으름을 죄악시하고 사회에서 도태시키려는 이상한 사회적 음모는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언제나 삶에 대한 피로에 시달리는 내게 이건 참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