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닉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영화에는 전쟁과 학살의 스펙터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폐허의 현장일 것이다. 펫졸트 감독은 거대한 폭력을 직접 재현하지 않고 그것의 결과인 폐허를 재현함으로써 폭력의 속성을 드러낸다. 관객들로 하여금 폭력의 현장으로 끌어 들이지 않아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피닉스>에서는 곳곳에 부서진 건물의 잔해물로 산을 이룬 베를린 시가의 모습과 미 점령군 치하의 패배감이 감도는 비루한 삶을 만난다. 그러나 이 폐허의 현장을 압도하는 또 하나의 폐허는 넬리의 얼굴이다. 영화는 넬리의 얼굴을 관통한 총알도, 그것이 망가뜨린 넬리의 얼굴도 보여 주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얼굴을 감싼 붕대 뒤의 처참한 그것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재현하지 않아도 현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같을 것이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넬리의 얼굴이라는 폐허는 폭력의 현장이며 그 물적 증거다.

성형수술한 넬리가 붕대를 벗고 수술 흔적도 서서히 사라져 갈수록 우리는 소위 ‘재건’을 기대한다. 다시금 폐허에서 인간으로 넬리를 복구할 희망을 품는다. 이 희망이 영화의 멜로적 감정을 추동한다. 수용소로 끌려 간 반년의 시간을 공백으로 잘라 내고 넬리는 그의 남편 조니와 재회한 후 이전의 삶을 이어 붙이고 싶어 한다. 조니로부터 자신과 함께 한 기억을 전해 들을수록 넬리의 회귀 욕망은 확인 받고 강화된다. 레네가 불타는 복수심과 민족적 부채감에 짓눌려 있는 것과 정반대의 자리에서 넬리는 트라우마를 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마련하고 있는 운명은 폐허 이후 우리는 그 이전의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지막 장면 바로 직전까지 조니는 넬리를 결코 알아 보지 못한다. 이는 다소 의아하다. 넬리의 과거 사진은 비록 그 상이 흐릿하지만 성형수술한 후 지금의 넬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니가 기억하는 넬리의 모습대로 머리를 바꾸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을수록 넬리는 더욱 또렷하게 사진의 모습을 닮아 갔을 것이다. 그보다 넬리의 육성을 듣는데도, 한 번에 넬리의 글씨체를 똑같이 써 내는데도, 심지어 넬리가 체포된 휴양지의 숙소 주인은 한눈에 넬리를 알아 보는데도 조니는 자신이 데려 온 이 사람이 진짜 넬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를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암묵적 규약이라고 묵인하면 안 된다. 영화는 충분히 알아 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니만은 모르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조니는 수용소에 끌려 간 아내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앞에 나타난 넬리를 타인으로 확신한다. 또는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니는 넬리를 배신한 죄책감으로 진짜 넬리를 대면할 자신이 없다, 조니는 넬리의 유산을 물려 받을 대역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짜 넬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요컨대 조니 역시 자신의 폐허 이후 이전의 조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넬리의 회귀 욕망은 조니가 계획한 넬리의 거짓 귀환 연극 안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이 환상 게임은 넬리와 조니를 반대 방향으로 추동한다. 조니에게 폐허 이후 삶을 도모하기 위한 계획이 넬리에게는 폐허 이전의 자신을 재건하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가상의 놀이이기 때문에, 조니는 넬리가 그토록 되찾고 싶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으로 돌려 줄 수 있다. 우리는 넬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가짜 넬리 연극에 참여하려는지 볼 수 있다. 넬리는 결코 자신이 진짜 넬리라는 사실을 조니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어쩌면 조니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알아 봐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조니에 대한 사랑과 서운함, 그리고 장난기까지, 넬리의 얼굴에 언뜻 스미는 조심스럽고 다채로운 표정이 넬리가 이 연극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조니가 알아 보는 순간까지라는 유보된 시간 동안 넬리는 가짜 넬리 연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재생하고 자아를 재건할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장면, 넬리가 과거 조니와 함께 부르곤 했던 노래 ‘Speak Low’를 부르며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순간까지도 그가 연기를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넬리는 조니에게 내가 진짜 넬리라고 직접 말해 주는 대신에, 이 연극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알려 준 적 없는 이 노래를 통해 조니가 자신을 알아 보기를 또 한 번 바라는 것이다. 넬리는 거짓 귀환 실행의 날 전에 이미 친구 레네를 통해 조니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용소로 끌려 가기 전날 발급된 이혼 서류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그럼에도 넬리는 이 연극을 멈추지 않는다. 이 때 넬리의 심연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넬리가 연극을 고집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 연극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진실은 진짜 넬리가 증명되었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실은 폭력의 희생자와 배신자 모두 딛고 서야 할 각자의 폐허가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까지 포함한다. 넬리가 멀리 사라지고 초점을 잃은 마지막 쇼트처럼, 폐허를 딛고 선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는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완성되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오래 기억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 침잠하게 되는 것은 넬리의 회귀 욕망에 동참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로 넬리로 하여금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게 하고, 연극의 동력을 끝까지 밀어 부치게 함으로써 다른 차원의 현실을 만든다는 데 있다. 마지막 순간에 넬리가 열어 낸 것이 레네가 끝내 지키지 못한 생존자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지평일지도 모른다는 감흥에 빠진다. 피해자의 폐허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마저 무너뜨려 마침내 영점에 자리한 넬리에게 남은 것은 새롭게 자신을 구성할 자유와 가능성이다.

<운디네>

영화는 운디네가 요하네스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운디네는 요하네스에게 “날 떠나면 널 죽여야 해. 알잖아.”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당혹스럽다. 이별의 대가가 죽음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를 요하네스도 알고 있으리라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그러나 요하네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또는 알면서도 부정한다.) 이 순간 운디네의 말이 영화를 보는 관객을 향하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가 운디네의 말로부터 유럽의 운디네 설화를 정확히 연상할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일상적 언어의 세계를 벗어나는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영화 속 운디네가 설화에 나오는 그 물의 정령 운디네라고 확정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직접적으로 운디네 설화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 있다. 그보다 이 영화는 자기 입으로는 결코 말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자신의 이름을 기어코 부르고 싶게 만들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만큼 <운디네>에는 토템의 신화적 세계를 빌려 오지 않고서는 해소할 수 없는 환상이 현실을 지배한다.

자연과 사물을 상징물로 다루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자연과 사물이 영화적 현실을 이끈다는 점에서 <운디네>에 깃든 토템은 환각적이다. 수족관의 잠수부 장식품을 둘러싼 궤적을 떠올려 보면, 이 장식품은 단지 미래에 대한 암시라기보다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는 저주 인형에 가깝다. 스스로 운디네를 불러 내는 목소리의 주인이 되고, 잠수부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의 새로운 연인이 될 것을 알려 주며, 이대로 사랑과 행복이 지속될 것 같던 연인에게 닥칠 파국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 순간마다 잠수부 인형을 향하는 카메라의 응시는 잠수부 인형이 주술적 힘으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서사에 침입해 들어온 것 같이 느끼게 만든다. 마지막에 이 잠수부 인형은 운디네의 환영을 통해 크리스토프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환상의 중핵이 이것에 투사되어 있다. 비약해서 말하자면 정령은 운디네가 아니라 정작 이 잠수부 인형에 깃들어 있고, 운디네로 하여금 신화적 운명으로 끌어 당기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잠수부 인형처럼 이 영화에서 사물은 말 그대로 현실을 마술적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도시의 모형이 실제 건물과 거리를, 물이 운디네를 끌어 당긴다. 또는, 쉼 없이 개발되는 도시 문명 아래 잠긴 습지의 신화적 세계가 베를린을 끌어 당겨 삼켜 버린다.

서사가 뒤틀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일까. 크리스토프가 사고를 당한 날 밤 운디네가 그와 전화로 다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영화에서 서사적으로 명시적이다. 이보다 더 이상한 것은 운디네가 잠수부 인형의 다리를 부러뜨린 날 예기치 않게 크리스토프가 찾아 와 하는 첫마디 말이다. 멀리서 운디네의 집을 찾은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보자마자 2번 터빈의 제어 장치에 결함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내 운디네와 깊이 포옹하면서 이 말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잊혀질 뻔한 이 말은 이후 크리스토프의 사고 현장을 찾은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의 동료가 설명하는 사고 경위와 연결되는 것만 같다. 그 동료는 수중 터빈이 열렸고 크리스토프의 다리가 끼어 제때 물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고 말한다. 앞선 크리스토프의 말을 사고 경위 설명과 포개어 생각해 보면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함께 한 현실에서의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고, 그 이후의 서사도 더 광범위하게 환각의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파국을 수행하고 물 속으로 침잠하는 운디네가 그려 내는 물 속 공기방울의 운동이 시간의 순행을 거스르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환각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을 집어 삼켰다.

<운디네>에 동참하려면 이 영화가 우리의 인식을 교란하는 방식을 즐겨야 한다. 운디네가 강의에서 말하듯이 동독 붕괴 30주년이라면 2020년 현재임이 분명하지만, 인물들의 손에 쥐어진 소품이 피처 폰이라는 사소한 교란까지 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특정한 단서와 인식 틀을 자꾸 교란하는 것은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이 즐겨 쓰는 전략인 것 같다. 그러나 현대식 카페와 자동차가 시대 인식을 흔들어도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트랜짓>), <운디네>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교란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덕분에 우리는 설화의 알레고리로 향하고야 만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또 다른 전작 <피닉스>에서는 넬리에 대한 남편 조니의 인식이 교란된다. 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그러나 총상을 입고 성형수술을 해야 했던 넬리를 조니는 알아 보지 못한다. 넬리가 죽은 줄만 알고 있는 조니는 넬리의 유산을 노리고 얼굴이 바뀐 넬리를 가짜 넬리로 행세하도록 만드는데, 조니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넬리에 대한 이해에 가까이 다가간다. <피닉스>가 향하는 목적지는 조니가 넬리를 끝내 알아 보는 것이다. 어쩌면 펫졸트 감독의 영화에는 이처럼 교란을 경유하고야 만날 수 있는 온전한 인식에 대한 열망이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운디네>는 신화적 환상을 교란의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이것은 우리 안에 상실된 채 억압된 것을 직시하고 해소하려는 내적 성찰에 가깝다. 도시 개발 역사학자 운디네가 습지를 덮고 무한히 확장해 온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품은 사라진 것의 좌표를 설명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이다. 베를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사라진 것의 역사를 살펴 봐야 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로부터 사라진 신화적 세계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흔적으로 남은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이길래.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그것이 속죄의 여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