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스냅 사진은 길을 헤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스냅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체현한 도시 산책자의 태도를 사진의 원리 안에서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헤맨다는 것은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잃었거나 목적지 자체를 잃어버린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모든 것이 예기치 않게 낯설어지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소한 사물과 시공간이 피사체가 될 자격을 얻는다. 스냅 사진에 실패란 없다. 벗어난 초점, 잘못된 노출, 망가진 구도, 무심한 피사체도 우리의 시각적 무의식을 열어 낸다. 카메라는 언제나 우리의 시선이 누락하는 세계를 무작위적 원리로 포착하고 있다.

<종착역>은 스냅 사진에 대한 영화적 고찰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 아이가 찍은 사진이 영화 곳곳에 꾸준히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 연연한 말은 아니다. 물론 이것이 가장 직유적인 방식이기는 하다. 이 영화가 스냅 사진의 정지된 이미지에 시간을 할애하면서 우리는 운동 이미지의 영화적 세계 안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물 자체의 시선을 경험한다. 설령 그것이 일회용 카메라의 렌즈를 경유한 상상적 시선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영화에서 시선을 상상된 형태로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을 보태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아이들이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 그들이 실제로 보았다고 믿을 법한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시점 쇼트의 방식보다 더 직접적인 시점 쇼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삽입된 스냅 사진이 영화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불균질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진 자체가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찍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의탁한 시선 장치를 통제하지 못한다. 지하철 노선도는 초점이 나갔고 동네 풍경 사진의 3분의 1은 손가락이 가려 버렸다. 스냅 사진의 즉흥적인 통제 불가능성이 오히려 그 시선의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가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미숙함과 조응한다. 정지된 스냅 사진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우리는 통제되지 않은 세부와 실패한 시선을,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을 지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인물들의 연기나 플롯의 구성을 통제하지 않는 것을 원리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연기를 하기보다 현실에서 볼 법한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몸짓도 계획되지 않았고 어떤 발화도 정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인물의 대사를 정확히 알아 듣기 어려울 때도 있다. 강세도 리듬도 없고 다듬어지지 않은 온전한 구어적 대화에 아이들의 실생활 언어까지 보태면 아무리 훌륭한 녹음 환경을 갖춰 촬영했어도 이 영화에 담긴 대화가 온전하게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플롯도 어떤 우연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소정이 핸드폰을 분실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구신창역에서도 떨어진 외딴 노인정을 찾게 되고 송희가 고양이를 만나는 바람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놓쳐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가능성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화적 결을 구축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의 끝이라는 목적지를 잃고 헤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순간을 다룬다. 어떤 길도 초행인 그들에게 화면 바깥에서 갑자기 끼어 든 개 짖는 소리 같이 예견치 못한 놀라움이, 아이들이 노인정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고양이가 슬며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카메라의 프레임이 유례 없이 이동하는 우연한 영화적 선택이 그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아이들의 손에 일회용 카메라를 쥐어 주고 그들이 이미지를 만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이들이 자꾸만 낯선 길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미지의 이미지가 발생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네 아이의 사진 여행은 자꾸만 산책하는 스냅 사진가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헤매는 그 곳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끝 지점이라는 것을 이 영화에 포개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거니는 아이들이 만난 이미지가 포착한 것은 익숙한 것의 생경한 감각만은 아니다. 아이들의 사진에는 그 순간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를 전학 온 시연이가 연우, 소정, 송희와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분식집을 찾고, 여름 방학 사진 숙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지하철 1호선 종점을 가고, 함께 비를 맞고, 낯선 시골 노인정에서 같이 밤을 보내면서 네 아이가 모험심으로 친밀함을 키운 기억이 총 열 세 장의 스냅 사진 이미지 이면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스냅 사진을 전면에 두고 말하자면 이 영화를 네 아이의 사진에 담긴 맥락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때 나는 영화가 사진을, 사진이 영화를 보충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진과 영화가 각자 시선의 불가능한 지점을 보완하면서 피사체의 표면에 인물과 영화 자신의 감정과 감각을 채워 주고 있다고 말이다. 이 때 한낱 사물도 기억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제, 젖은 흙에 포개진 발자국이나 문앞에 널브러진 신발들이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12월 비평의 편지 주제는 ‘집에서 본 영화, 영화관에서 본 영화’였다.(링크) 이 주제에 대해 내가 기대한 바는 사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루었던, 극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람 행위의 사회성에 대한 논의였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만이 영화적 체험의 본령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언제나 벤야민의 이론을 떠올리며 의식하고 있었다. 벤야민을 사랑하지만 나는 이 이론에 대해서만큼은 반대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벤야민을 오해해 오고 있었거나.

오랜 시간 수많은 시네필로부터 들어 온, 암실(Darkroom) 속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본다는 것의 고유함과 위대함을 찬양하는 태도는 라이트룸(Lightroom)의 시대에도 다른 환경에서 영화를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취향의 편협함에 불과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극장이 가능케 하는 집단 관람의 사회성은 다른 문제였고, 그것을 영화의 고유한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중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이상용이 하는 말을 들으며 영감을 받아 오래 전 트윗한 적이 있었다.(링크) 이를 다시 부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역사 초기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와 함께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도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만화경과 같아서, 뷰파인더 같이 작은 창을 통해 작은 암실 통에서 영사되는 영상을 감상하는 장치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초기는 더 많은 관람 전파를 위해 거대한 스크린과 거대한 암실이 필요했고 영화 보기의 방법으로 시네마토그래프가 승리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가능한 현대에 와서는 각자의 만화경,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것이 이상용의 이야기였다.

영화적 환상에 대한 사적 경험이 집단적으로 관계 맺으며 감상과 비평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영화적 체험이라고 한다면, 암실의 거대한 스크린은 당대의 기술적 한계에서 연유하는 조건이었을 뿐, 극장 바깥 라이트룸 세계의 스크린에서도 그 체험은 가능하다.

24장의 사진이 모여 1초의 영상을 이루고 숏이라는 파편이 모여 총체적 작품이 되는 영화적 형식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적 체험은 극장 안에서조차 사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것을 집단화하고 사회화하는 기능이 암실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이유가 라이트룸 시대에는 없다.

벤야민이 말하고자 했던 영화적 체험, 사적으로 고유하면서도 사회적인 체험은 기술복제가 가능한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능성의 본질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 가능성은 기술복제 자체에 있다. 필름과 극장보다 복제 기능이 더 확장된 시대, 라이트룸 시대, 디지털 키네토스코프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현 시대에 영화적 체험과 그 가능성을 여전히 극장과 암실에서만 모색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가능성을 갉아 먹고 혐오하는 태도가 아닐까.

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철학

파울 클레의 천사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원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를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화는 아폴론적인 것, 그리하여 예로부터 인간 정신의 합리적 부분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림을 보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웬 주책일까?

아, 그것은 클레의 그림을 말한다. 대단한 그림이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이렇다 할 스토리, 그러니까 바라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고 찬란한 색채와 형태의 유희로 관객을 압도해 버리는 현상학적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가 공책에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우스꽝스런 천사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신천사(新天使).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오랫동안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서? 하긴 그림의 소장지를 보니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유럽에서 나온 클레의 화집에서 이 그림을 찾아 보기란 어려울 수밖에. 아무리 찾아 봐도 는 있으나 는 없었다. 그러니 우연히 그 그림을 찾았을 때 내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나온 눈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왜? 그 그림이 양식적으로 클레의 예술언어에서 현격히 벗어난 것도 아니잖은가? 화집에서 비슷한 그림들을 수없이 보면서 왜 하필 이 그림인가?

어쩌면 이는 순수한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내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흘린 눈물은 모든 현실적 고려에서 추상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관심적 주목의 산물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근대적 의미의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외려 이 체험은 정치라는 혼합물이 섞인 불순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온한 체험이다. 하지만 순수한 미적 체험이란 무엇일까? 왜 미적 체험은 항상 순수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근대 부르주아의 미학적 환상이 아닐까? 자기들의 삶의 산문성, 자기들이 만든 세계의 산문성, 그 무미건조한 삶의 한복판, 소위 ‘사적’ 공간의 한 귀퉁이에 걸려 있는 한 조각의 운문성. 이 장식용 운문성을 위한 미적 이데올로기?

그럴지도 모른다. 가령 예술을 ‘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근대 미학은 예술과 현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벽을 쌓았다. 그후 삶과 예술은 미메시스를,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하여 예술은 현실과 관계없는 향유의 대상, 값싸게 팔리는 문화상품, 나아가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기호로 전락하여 산문적이기 짝이 없는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장신구가 되어 버렸다. 삶을 예술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대신, 예술은 부르주아적 삶과 부르주아적 세계의 비미학성을 감추는 포장지가 되어 버렸다. 삶은 예술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예술은 콘서트홀과 미술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미적 체험 역시 대부분 부르주아적 성격을 벗지 못한다. 하지만 이 그림만은 다르다. 그것은 정말로 나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 감동은 한갓 인식론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 존재에 마법을 거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나는 무정한 사물이 아닌, 말을 걸어 오는 인격을 느끼는 걸까? 천사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리하여 천사의 눈과 나의 눈은 하나가 된다.

왜 그럴까? 아마 벤야민 때문일 게다. 어디선가 이 그림을 보고 남긴 그의 글 속의 한 구절이 내 머리 속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나는 벤야민의 글을 통해 그 그림을 보았다. 그래서 그림을 보며 눈물이 핑 도는 해괴한 체험을 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야만의 힘에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 맑시스트 랍비의 삶과 작업의 비극성이 그림을 바라보는 내 눈앞에서 오버랩되었을 게다. 그렇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은 찢어졌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그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 와 그의 날개에 와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 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파국이라는 이름의 현실

천사의 머리는 몸통과 날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크다. 저것이 바로 몸에 비해 의식이 과잉 발달한 근대적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 moderna)이다. 삶의 한복판에 뛰어들지 못하고 끝없이 관념의 세계만 발전시켜야 하는 지식인의 조건이다.

근육질의 파시스트들은 머리만 자란 이 유태인 천사를 경멸했다. 생각만 하느라 행동력이 결여된 무능한 자라고. 그들은 현실의 밖에서 그 거대한 머리로 관념의 세계만 발전시키는 지식인들을 비난했다.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벌거벗은 힘이라고. 너희는 왜 이 냉혹한 진리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왜 이 야만적 힘의 놀이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천사는 날개를 들고 있다. 이 거대한 야만의 힘 앞에서 머리만 자란 그는 힘없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한 듯하다. 그 커다란 머리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현실은 내 해석을 비웃으며 변함없이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조롱한다.

천사의 입은 벌어져 있다. 왜? 놀라움 때문일까?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20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놀라움은 분명히 철학적 놀라움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20세기에 도대체 이런 야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철학적 성격의 놀라움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파국이다. “승리하는 적 앞에서 죽은 자들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적은 승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vi) 승리하는 자들은 역사를 쓴다. 그리하여 승리하는 적 앞에선, 그들이 쓰는 역사 속에선 죽은 자들은 무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쓰러진 적병을 확인사살하듯이 죽은 자들을 또 한번 죽인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전승(傳乘, 계통을 대대로 전해 이어간다는 의미)을 압도하려고 하는 순응주의로부터 전승을 구해내야 한다.”(vi)

입을 벌린 천사는 그 째진 눈으로 하늘 높이 쌓여 가는 파국의 장면을 응시하며, 거기서 떨어지려고, 거기에서 현재를 구원하려고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아 파라다이스를 향해 날아가려 한다. 잊혀져 가는 죽은 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패배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모아서, 한때 우리가 꿈꾸었던 파라다이스로 다시 날아가려는 가망 없는 몸짓을 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그를 끊임없이 뒤로 몰아붙이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파국의 더미를 바라보며 천사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알 수 없는 등 뒤의 미래로 밀려 날아간다.

“근원은 목표다.”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어 볼 수 없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근원은 목표? 목표는 근원? 그렇다면 미래는 인류 역사의 출발점이었던 파라다이스? 그러나 아직 프롤레타리아의 신적 폭력에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벤야민과 달리, 역사는 우리에게 이 신학적 목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목표가 없다. ‘근원’이라는 형태로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완벽한 허무주의뿐. “억압받는 자들의 전승은 우리가 처한 ‘예외상황’이 사회의 정상적 상태라고 가르친다.”(viii) 하지만 허무주의가 패배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절망의 체험은 다른 한편 우리에게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을 약속한다.

날개를 편 천사. 그것은 헛된 저항이다. 아무리 날개짓을 하려 해도 천사는 파라다이스로 날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강한 바람 때문에 접으려 해도 접혀지지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저항을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람 때문에 우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저항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장밋빛 미래의 헛된 약속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급하게 급조된 희망의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저항을 할 뿐이다.

누군가 이 시대에 다시 완성품의 ‘희망’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가 절망의 나락까지 체험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외려 저 천사의 째진 눈처럼 삶의 근원적 비극성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우리의 저항이 현실을 파라다이스로 만들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꿋꿋하게 날개를 펴고 저항을 해야 하는 신천사. 그게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천사는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다. 아무리 가망 없는 노력이라 하더라도 천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사들이여, 희망은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헛되이 고개를 돌려 미래를 보지 마라. 돌아볼 수 없는 등 뒤의 미래가 아니라 파국이라는 이름의 눈앞의 현실, 끝없이 뒤로 밀려나는 우리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과거를 바라보라. 그리고 미래를 위해 그 과거의 기억을 조직하라. 별자리를 짜듯이. 구원은 그 기억 속에 있다.

“지나간 것을 역사적으로 분절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기억을 발동시키는 것이다.”(vi) 그리고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이 과거의 기억 속에서 “희망의 불꽃”(vi)을 보라. 그 불꽃은 전람회의 벽에 걸린 작품처럼 존재의 지속성을 갖는 그림이 아니다. 밤하늘에서 터졌다가 사라지는 불꽃처럼 생성의 순간성을 갖는 그림이다. 한번의 데생으로 시작부터 완성의 순간까지 지속되는 타블로(tableau,그림)가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모습을 바꾸며 다시 그려야 할 섬광과 같은 실체 없는 영상이다.

천사의 째진 눈은 하늘로 쌓아 올려지는 파국의 더미만을 바라보며 슬퍼할 뿐 아니라, 그 암울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반짝반짝 터지는 희망의 불꽃들을 포착하는 감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검은 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배열 속에서 감추어진 형상을 찾아내듯이 산산히 흩어진 이 불꽃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을 갖고 있다. 이 우울한 창조의 즐거움 때문에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눈앞의 현실을 응시하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거를 보기 위해 날개를 펴고 끊임없이 미래로 밀려날 뿐이다. 신천사들이여, 날개를 펴라. 그러나 경고. 그 날개는 한번 펴면 다시 접지 못하리라.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

이제껏 쓴 몇 편의 글에서 나는 서양 미학사를 탈근대적 관점에서 읽으려고 했다. 근대 미학의 관점으로 해석된 미학사 속에서 나는 근대적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구조)가 배제해 버린 탈근대적 요소들을 찾아내어 부각시키려 하였다. 창작의 영감으로서 ‘광기’, 예술의 힘으로서의 ‘도취’, ‘우연’의 미학, 내 속의 자연(=신체)과 내 몸 밖의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의해 대상의 ‘모방’(imitatio)이라는 의미로 축소된 미메시스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려고 했다.

예술은 누추한 존재를 고상하게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작품에 관한 딜레탕트적 담론의 놀이로 자신을 다른 그룹의 인간들과 구별하고자 하는 자들이 벌이는 하릴없는 사회적 상징작용의 기호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데에 필요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예술을 닮아야 한다. 예술은 인간이 자기를 닮기를 원한다. 예술은 한갓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대화의 상대자가 되어야 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은 이제 서서히 탈근대의 존재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예술은 한때 그것과 근원적으로 함께했던 것,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작별하여 미적 왕국의 밖으로 추방되었던 윤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사회적 아노미라는 무정형의 상태. 예술은 여기서 인간들에게 자기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꾸며 나가는 데에 필요한 영감을 주면서, 이 천박한 사회에 에토스를 형성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또 에토스는 미학적일 때 비로소 자기의 독단성을 벗을 수가 있다. 왜? 미는 개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미적 가치를 갖는 수없이 다양한 삶들이 서로 교호작용을 할 때, 비로소 사회는 폭력적 독단성과 무정형의 천박성에서 동시에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 글을 나는 이제까지 내가 쓴 글의 미학적 결론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로 제시한다. 클레의 그림을 통해 나는 파라다이스의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80년대 우리들의 슬픈 경험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들에 의해 독재자들의 망령이 차례로 부활하고, 우리를 위해 죽은 자들의 무덤이 적들에게 비웃음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 파헤쳐지고 우리에 의해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다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이는 흔히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천사는 뒤를 돌아 미래를 보지 않고 눈앞에 펼쳐지는 과거의 파노라마를 응시한다. 저항을 위해 굳이 돌아볼 수 없는 미래의 최종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분홍빛 채색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문명의 시작부터 이제까지 걸어온 우리의 역사를 직시하는 회고적 인식이다. 그 경험들의 단편을 별자리처럼 짜내어 거기서 희망의 불꽃을 찾아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아직도 사회 곳곳에 흩어져 조그만 실천을 하는 불꽃들이 보일 게다. 그 불꽃들을 연결하여 별자리를 짜듯이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희망을 새로 짜야 한다.

날개를 펴고 뒤로 밀려 날아가는 신천사처럼 우리의 저항도 우리를 파라다이스에 가까이 가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소위 물질적 ‘진보’라는 이름의 바람은 우리의 저항을 비웃으며 우리를 사정없이 뒤로 밀어낼 것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물질적 발전 속에서 자연은 파괴되고,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황폐화되고, 인간은 천박해지고… 그리고 그 빠른 발전속도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후진성은 우리를 끝없는 절망에 빠뜨리며 우리 발 앞에 새로운 파국의 폐허를 던져 놓을 것이다. 이 위험의 순간. 이는 사회의 “예외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정상적 상태다. 슬픈 얘기지만 사회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바로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현재를 구원하고자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 싶다.

앙겔루스 노부스. 저 한 장의 그림은 내게 단지 미적으로 지각해야 할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나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하기 원하며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란콜리커(melancholiker, 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