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안상헌 교수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대학신문을 통해 변증법에 관한 지상 강의를 한 적이 여러번 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듯합니다. 일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철학이나 변증법에 관한 예비지식이 없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여기에 올려 둡니다. 변증법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안상헌

충북대신문 (91. 5. 27) – 변증법 강의(2)

변증법의
근본법칙의 이해와 과학적 방법론

안상헌(인문대 철학과 교수)

1. 새로 들어가는 말

현재 변증법의 근본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법칙은 1)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법칙, 2) 질과 양의 변증법적
전화법칙, 3)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있다. 헤겔과 마르크스 이후 오랫동안 정식화된 형태로 알려진 이 법칙들은 물질적 존재의 변증법적 성격을 일반화한 것으로, 존재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존재의 변증법적 성격이 모두 이 법칙에 포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외에도 존재의 보편적 연관이나 구조연관과 체계성의 원칙 및 결정론적인 원칙 등을 두루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변증법적인 근본법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인식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다. 특히 변증법의 근본법칙들은 수학공식처럼 무조건적으로 어디에나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새로운 사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그 진리성이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법칙들은 화석화된 탐구의 전제라기보다는 탐구를 통한 인식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하는 개방적인 법칙들이라 할 수 있다.

2.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법칙

변증법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모순의 발견과 실천적 해결에 있다. 그리하여 변증법은 ‘모순’을 모든 대상과 현상 또는 과정의 존재방식이자 변화와 운동의 원동력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말하는 ‘모순’은 언어나 사유의 논리적 모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는 실제 현상들의 대립과 갈등, 상극성과 차별성 및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율배반 등을 두루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대립과 갈등관계에 있는 존재나 개념들이 전체(총체)의 계기로서 불가분의 ‘내적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예를 들면, 개인과 사회의 모순, 자본과 노동의 모순, 형식과 내용의 모순, 개별과 보편의 모순 등을 말할 때 모순되는 두 계기인 개인과 사회, 자본과 노동, 형식과 내용, 개별과 보편은 어느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사회현실의 인식과 관련한 더 구체적인 예로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의 방법을 다루면서 언급하고 있듯이, 생산, 분배, 교환, 소비는 각각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상호연관 하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특히 생산과 분리하여 분배, 교환, 소비를 독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론들은 각각의 현상적인 측면만을 무매개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생산과의 본질적 상호연관을 놓치게 되며, 그 결과 분배, 교환, 소비에 관련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 계기 사이의 모순은 두 계기를 따로 분리-독립시켜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계기는 원천적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계기 사이의 모순의 해결은 양자의 관계를 내적으로 지양-통일하는 변증법적인 방법만이 유일한 길이다. 특히 하나의 총체성으로 파악되는 사회현실에서 나타나는 제 모순의 해결은 모순적인 양 계기의 관계를 단절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자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내적으로 지양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대안이 된다.

‘대립물과 투쟁과 통일’의 법칙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전제(총체) 안에서의 계기적인 대립물들 사이의 모순적 대립관계를 ‘투쟁’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써 ‘투쟁’의 일상 언어적인 의미에 지나친 강조를 둘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투쟁’이란 용어는 헤라클레이토스 이후 철학에서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전쟁은 만물의 어머니’라든지 ‘사랑과 증오의 투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헤겔 이후에도 이러한 전통적인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투쟁’이라는 말의 강렬함이 사회현실의 모순을 실천적으로 파악하려는 의지의 발현일 수는 있으나, 변증법적 개념을 이러한 방식으로 제한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많다.
‘대립물의 통일’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모순의 대립뿐만 아니라 모순의 지양의 내적 필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나중에 살펴 볼 ‘부정의 부정’의 필연성과도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

3. 양적인 것의 질로의 전화법칙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은 우화적인 형태에서 잘 드러난다. 머리카락이 많은 사람에게서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 낸다면 처음에는 별로 뚜렷한 차이가 없지만 계속하다 뽑다 보면 마침내 어느 시점에 가서는 대머리가 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런 현상은 변증법적인 양-질의 전화법칙을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할 때 주로 예로 드는 물의 온도에 따른 변화나 화학에서 원자량의 양적 증가와 원소의 질적 차이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온도의 변화에 따라 물이 고체(얼음)나 물(액체) 혹은 수증기(기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재는 잣대(척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상식에 속한다.

이러한 예에서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의 양적 감소, 온도의 양적 변화, 원자량의 양적 증감에 따른 질적 변화이다.
여기에서 질적 변화의 가장 큰 의미는 그 이전의 질적 상태에 적용되던 지식(법칙)들, 즉 그것의 고유한 성질을 파악할 수 있었던 법칙들이 더 이상 질적 변화 이후의 상태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며, 새로운 상태에는 그에 적용되는 새로운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점은 양의 증감에 따라 질의 상호 가역적 변화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경우보다는, 불가역적으로 새로운 질이 창조되는 사회-역사적 질적 변화와 발전에 있어 기존의 사회에 적용되던 법칙적 지식들이 질적 변화가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 강조된다. 질적 변화 이후에는 이전 사회에 적용되는 원리가 완전히 무화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변증법적인 지양이 과거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존’하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존법칙이 새로운 사회에 측면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질적으로 변화된 사회에서는 그 안에서만 적용되는 원리가 새롭게 탐구-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질적인 변화(이를 다른 말로 ‘비약’이라고도 한다)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이 법칙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발생하면 그것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발견해내고 그러한 지식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4. ‘부정의 부정’의 법칙’

헤겔이 정식화한 유명한 변증법적 운동의 삼각도식인 정-반-합에서 정(A)과 반(-A)은 외적으로 독립된 관계에 있는 둘의 우연적 만남에서 빚어진 임의적인 대치가 아니라, 이는 전체(총체성) 안에서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서로 모순되는 두 계기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이며, 양자의 모순의 ‘지양’인 ‘합’ 또한 필연적인 귀결이다. 변증법적인 모순의 해결을 지칭하는 ‘지양(aufhebung)’이라는 개념은 발전과 변화의 변증법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지양’은 ‘정’의 상태를 ‘합’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것, 즉 ‘정’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 상태를 ‘합’의 상태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는 ‘정’의 합리적인 내용(핵심)을 ‘합’ 안에 새로운 방식으로 ‘보존’하는 것이며, 둘째는 ‘정’ 안에 내재하는 부정적인 내용(껍질)을 ‘반(부정)’을 매개로 하여 ‘폐지’하는 것이고, 셋째는 ‘정’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 ‘합’ 안에서 ‘발전’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지양과정을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인 ‘부정의 부정’은 형식논리학에서 말하는 ‘이중부정’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형식논리적인 A의 ‘이중부정’은 ~~A이며 이는 A와 동일한 형태로 환원된다. 그러나 변증법적 부정의 부정,즉 ‘정’의 부정의 부정은 다시 ‘정’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합’의 상태로 지양, 발전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발전’이라 함은 구체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의 원상태로의 복귀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창조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반드시 더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진보’한다는 가치론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항상 더 낫다’는 가치론적 진보관은 여러 형태의 ‘발전’의 한 유형으로, 이러한 진보관은 모든 존재에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향유하려는 인간의 실천적 삶의 투쟁의 산물인 인간역사와 사회현실에만 적용될 수 있는 특수법칙의 한 형태이다.

5. 변증법적 철학과 과학적 현실인식

이상과 같은 변증법의 일반법칙에 토대를 둔 변증법적 방법은 ‘사유’의 우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대상’의 우위에 기초하고 있다. 즉 변증법적 방법은 인간의 주관적인 사유(상)체계에 의거하여 대상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명하고자 하는 현실적 대상의 변화와 발전에 의거하여 발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은 객관적인 대상의 변화와 발전의 변증법적 성격을 떠나서는 정립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대상의 변증법적 성격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우리에게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며, 학문과 과학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변증법적 사유와 세계관은 오랜 역사를 거쳐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변증법적인 개념과 체계가 엄밀하고 풍부한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마침내 오늘날의 보편적인 과학방법론으로 정립되었다.

변증법적 방법은 이론체계의 정립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의 모순을 창조적으로 파악하는 역사적 실천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인식에 있어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보편이론’의 정립과 ‘구체적 현실파악’의 차이점이다. 보편이론을 정립하는 것은 철학의 고유한 과제이며, 이는 구체적인 현실’파악’을 목표로 하는 과학의 과제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보편이론은 과학적인 지식의 축적이 없이는 정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을 보편화한 것으로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 없이는 철학의 새로운 정립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의 발전과 성장은 지금까지 축적된 과학적 지식을 일반화한 철학적 보편이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과학적 작업의 가설과 전제는 철학적 보편이론의 기초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철학과 과학은 개별적 지식의 성장과 축적된 지식의 일반화라는 두 축을 오가면서 상호 발전한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인식 과정에서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연구지침이 되며 과학적 지식의 온축은 철학발전의 전제이자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철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의 획득은 과학발전의 나침반이다. 그러나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곧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지 않듯이 철학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과학적 발견도 아니다. 나침반의 효력은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나침반은 그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그 실효성이 검증되고 문제점이 발견됨으로써 보다 완전한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과학을 통해서 과학은 철학을 통해서” 변증법적으로 상호발전한다. 따라서 철학과 과학의 비변증법적인 배타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역시 안상헌 교수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대학신문을 통해 변증법에 관한 지상 강의를 한 적이 여러번 있는데, 이 글은 그 중 하나인 듯합니다. 일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철학이나 변증법에 관한 예비지식이 없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여기에 올려 둡니다. 변증법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안상헌

충북대신문(1991. 4. 3) – 변증법 강의(1)

변증법적
사유와 과학적 실천
– 변증법적 세계관과 방법론의 실천적 의미

안상헌(인문대 철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변증법’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또 자연스럽게 들릴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어느 정도나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실제로 ‘변증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를 보면, 무언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태에 대해 곧잘 ‘변증법적으로’ 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보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할 것을 더 이해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본래 ‘변증법’이란 말은 그렇게 난해한 말도 아니고 애매 모호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변증법은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실적인 사태를 더욱 명쾌하게 설명하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이란 말을 사태를 더욱 애매 모호하게 얼버무리는데 사용하는 것은 변증법의 본래적 의미와 기능을 크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이란 말이 난해하게 들리는 이유는 이것이 본디 우리말이 아니고 희랍어의 번역이기도 하고 또한 서양의 지적전통 안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뜻이 자연스럽게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의 본디말은 고대 희랍말로 dialektike techne(즉 대화하는 기술)이다. 처음에는 간단하던 이 개념이 세월이 지나면서 보다 정교하고 풍부한 뜻을 가지게 되면서 일상적인 말로 사용하기에는 약간 난해하게 느껴지는 철학용어로 다듬어졌다. ‘대화하는 기술’이라는 말의 의미도 사실은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에 의해 약간 다듬어진 말이다. 소크라테스에 있어 변증법은 단순히 말 잘하는 재주나 기술이 아니라, 둘이서(dia) 대화(legeia)하는 가운데 참된 것은 살리고 잘못된 것은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방법이었다. 단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이었던 ‘변증법’이 헤겔에 의하여 정교하고 풍부한 의미를 가진 현대적인 의미의 ‘변증법’의 기본 틀을 완전하게 갖추게 되었으며, 그 후 유물론적 변증법에 이르러 과학적 세계관과 방법론으로 체계화되었다.

2. 변증법적 사유의 특성

변증법적 사유의 출발점은 현실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 발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과학적 인식의수준이 매우 낮았던 시기에는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 전제로만 간주되어 왔던 이러한 전제는 전제되어 왔던 것이 인간인식의 오랜 역사적 발전의 결과 더욱 더 그 진리성이 확고하게 인정되어온 인간의식의 최종적 과학적 결과이자 성과이기도 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변화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불변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관념도 인간의 의식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어서 긴 시간을 통해 결국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성, 변화, 발전한다는 이러한 전제가 타당하다면, 우리의 인식론적 과제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적 태도가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한 인식 또한 표현에 있어서는 반드시 언어적 진술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언어적 개념의 사용이 불가피하기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적 개념의 속성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과정으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고정시키거나 불변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개인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즉 현실적인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과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반해, 인간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개념으로서의 ‘사람’은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는 개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운동장에서 트랙을 계속 돌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운동은 현실적인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한 바퀴를 돌고 난 후와 두 바퀴를 돌고 난 후, 그리고 여러 바퀴를 돌고 난 후의 그의 신체적 상태를 생각해 보라. 그는 처음에는 별로 힘들지 않았을지 모르나 횟수가 거듭되면 될수록 힘들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더 지속하게 되면 마침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을 현실적인 시공간으로부터 분리하여 관념 속으로 추상하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 학생은 A라는 운동자가 되어 원운동을 하고, 그 원운동은 무한히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러한 예는 변증법적 사유방식과 형이상학적인 사유방식의 가장 전형적인 본보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구체적인 현실적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추상적인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사태로 추상하고 환원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사태인식의 가장 큰 방법적 난점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변화의 실제적인 추이와 경향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사유방식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개별적 사태가 실제로 전개되어 가는 구체적인 변화과정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 한다.

3. 변증법적 개념의 특성

변증법적 사유에 있어 가장 어려운 난점은 언어적 혼란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를 표현하는 개념은 새로운 내용을 가지되 그 용어는 오랫동안 익숙하게 사용하던 개념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 낸 것이기 때문에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옛 부대에 담아낸 새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이다. 예를 들어, 변화와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법적 개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인 ‘모순’이라는 개념을 살펴보자. 이 개념은 철학과 논리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개념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모순’이란 서로 대립되는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A는 A이거나 A가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잘 알려진 모순율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유에 있어서는 ‘언제나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아닌 것으로 된다’.
엄격히 말하면 변증법에서는 ‘A는 언제나 그 안에 내재하는 A아닌 것(즉 A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A로 변하는 한에서만 A로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동일성과 차별성의 통일’의 예를 들어 보자. 전통적인 의미의 ‘동일성과 차별성’의 의미는 ‘같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다르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변증법에서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은 전체의 양 측면이고 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어제의 나’는 그 안에 이미 내재하는 ‘어제의 나’가 아닌 것'(‘나’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내’가 된다. 그리하여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가 아니면서 동시에 ‘오늘의 나’와 동일한 ‘나’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와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변증법에서 의미하는 ‘전체와 부분’은 비변증법에서 의미하는 그것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살펴 보라. 비변증법에서는 개인은 독립성이 전제된다. 그리하여 독립적인 개인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모이지 않으면 사회는 해체된다. 그러나 변증법에서 말하는 전체와 부분은 이와는 다르며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총체와 계기’라는 특이한 개념을 사용한다.
‘계기’라는 말은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힘의 모멘트(moments)’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운전대의 회전운동을 생각해 보라. 운전대를 회전하기 위해 한 손은 위로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힘을 가한다. 만약 운전대가 없다면 한 손은 위로 다른 손은 아래로 따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운전대에서 힘을 위아래로 가하면 운전대가 회전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변증법은 두 힘이 운전대를 ‘매개’로 통일되어 회전운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4. 변증법적 방법의 과학적 성격

그 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전개되는 사태를 드러나는 시간순서대로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와 전개의 발전적 추이의 내적 필연성을 발견하는 과학적인 방법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태의 현상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그대로 진술하는 것은 과학의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서 과학이 되지는 못한다. 만약 이러한 경험적 사실진술이 곧 과학일 수 있다면, 경험적 사실을 많이 수집하기만 하면 과학의 임무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듯이 과학은 경험적 현상의 서술이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적 사실들의 상호연관이나 발생연관 또는 인과연관을 구명함으로써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이연(까닭)을 법칙적으로 밝히는 것이 최소한의 과제이자 목표이다. 이는 현대의 모든 과학분야가 그러한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현대의 변증법은 무엇보다도 사회와 역사의 발전법칙을 밝히는데 주력해 왔다. 헤겔의 변증법과 더불어 사회와 역사발전의 보편적인 법칙이 변증법적으로 해명되기 이전에는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회현상이나 역사발전에는 어떠한 보편적인 법칙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매우 강하게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보편적인 법칙이나 일반법칙은 반복적인 실험과 관찰이 가능한 자연현상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반복될 수 없는 우연적인 사태들의 연속인 일회적이고 변화무쌍한 사회현상이나 역사발전에 대해서는 법칙적 이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 경제학에서 경제적 사회현상에 나타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같은 법칙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오로지 변증법적 역사발전의 법칙에 대해서만 이의를 강하게 제기한다. 그들이 경제학적인 고전적 사회법칙은 인정하면서도 역사발전의 법칙은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론의 무기가 변증법적 역사이해의 방법이다. 역사인식에 있어 변증법적 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의 바깥에서 역사의 흐름을 관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 속한 현실의 모순을 발견해 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모순을 지양하겠다는 실천적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현실인식의 방법이 아무리 실천적인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천적 의지를 가진 주체의 주관적 의지의 직접적인 산물은 아니라는 것은 거듭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실천적 의지가 아무리 투철하다 하더라도 그가 속한 사회의 객관적 모순과 이를 실천적으로 지양하려는 주체 자신의 주관적 조건에 대한 냉철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하여 오로지 자신의 머리 속에서 가공해 낸 공상에 가까운 관념적 환상을 실천적 행동의 방법적 지침으로 삼는다면, 현존하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의 모순은 결코 어떠한 형태로도 지양해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속담에 ‘바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태도는 실천적인 의지의 소산인 만큼 더욱 치밀한 과학적 분석과 그에 입각한 과학적 실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변증법적 태도는 실천적 가슴의 정열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머리는 더욱 구체적이고 냉철한 객관성과 과학성을 견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학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변증법적 방법론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이를 수단으로 하여 구체적인 현실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작업임에 틀림없지만, 과학적 실천의 전제조건이 되는 이러한 무기가 없는 실천적 정열은 방향타를 잃은 배와 다를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