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에 실었던 글을 기록으로 남겨 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가 흥행 돌풍을 이어 가고 있는 현재, 조용히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있다. 대형 할인 마트의 파업 일대기를 그린 <카트>가 그것이다. 카트는 7기 노동조합이 추진하는 작은 영화관 문화 사업의 첫 번째 선정작이기도 하다.

 

실제 벌어진 일

알려진 바와 같이 영화 <카트>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의 파업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당시 홈에버는 마트 계산원을 비롯한 상당수의 비정규직을 외주화하기 위해 일방적인 대량 해고를 추진했고, 홈에버 비정규직들은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여 파업으로 이에 맞섰다. 파업이 시작된 날은 2007년 6월 30일로, 소위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는 7월 1일을 염두에 두고 결행했다고 한다.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문제, 즉 외주화와 비정규직 양산, 고용의 불안, 더 나아가 삶 자체의 불안을 국가가 법적으로 용인한 바로 그 날 말이다.

이 파업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집회 방해와 경찰의 폭력 진압을 500 여 일 동안 버티다가 12명의 집행부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직원이 복직하는 미결의 승리로 끝났다. 홈에버 파업은 어떻게 보면 파업의 주체, 시점, 국가의 대응 모두가 이후의 파국적 상황에 대한 암시와도 같았으니, 이들의 파업이 끝난 다음 해인 2009년에는 쌍용차 사태가 벌어졌고, 2014년 오늘날 우리는 한 여성 비정규직과 경비 노동자의 죽음을 대면하고 있다.

 

늦었지만 절박하게 찾아 온 영화

대다수의 사람이 상시적인 생계의 불안을 감당해야 하는 지금 <카트>가 개봉한 것은 뒤늦게 찾아 와서 더 절박한 느낌이다. 이 영화는 앞서 얘기한 홈에버 사태의 경과를 각색하여 회고하되, 당위를 강요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피부에 와 닿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마침내 공유해야 할 어떤 통찰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계산원 역시 반찬값이 아니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한다는 항변은 교활한 사측 협상 위원의 언사에 국한되지 않고, 이 차별적 구조에 익숙해진 우리의 잔인한 의식을 향한다. 상대적 우위에 안도하고 우월감에 젖어 있는 한, 이 상대적 우위의 달콤함을 누리는 이들은 줄어들고 고난과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은 늘어날 것이다. 차별이 심해질수록 불안은 가중되는 것이다. 계산원의 항변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처한 생계의 곤란함을 함께 걱정해 달라는 호소로 들린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비로소 마트 계산원과 청소 노동자가 눈에 들어오고 궁금해지더라는 어떤 이의 반응과 같이, <카트>의 미덕은 바로 우리 자신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투명인간과도 같았던 절대적 다수의 불안정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카트>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감정은 ‘억울함’이라고 말한다. 파업을 하면서 비로소 각성하게 된 한선희(염정아 분)는 편의점 알바를 하고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아들을 도와 편의점 사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낸다. 이 때 한선희의 아들이 하는 말이 이를 보여 준다: “억울해서 잠을 못 잤어. 알바 한 돈 못 받아서. 엄마가 내 억울함을 풀어 줬어.” 약자의 억울함을 하나씩 풀어 가는 과정이 바로 사회의 진보인 것이다. 이용 당하고 천대 받고 내팽겨 쳐지는 억울함, 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파업의 권리를 국가가 짓밟는 억울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양심의 버튼을 누르는 영화 <카트>

<카트>는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은 영화다. 실화가 된 홈에버 사태에 관해서나 이 영화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외주화 및 비정규직 문제와 노동조합 활동, 그리고 파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이 억울함을 잠식하고 있는 시대에 이 영화는 우리 각자의 마음 한 켠에 간직한 양심의 버튼을 누른다. 버튼이 눌리고 나면 일상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어떤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지면에서 못다 한 얘기를 우리 각자의 버튼을 켜고 나눠 보고 싶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싸우는 게 정말 어려운 거죠. 직장은 생계가 달려 있는 곳 아닙니까. 집회에서는 대통령도 욕할 수 있지만 직장에서 과장 욕 할 수 있나요? 진검승부는 거리가 아니라 직장에서 하는 거예요. 그 싸움을 치열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이 일하는 직장을 바꿔야 해요.”

“기다린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그런데 비정규직 노동자가 직접 나서기는 정말 어렵죠.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해요. 비정규직 문제를 방치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인지 말입니다.”

“직장 내에서 싸우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고, 노조가 회사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할 수 있을 때, 그게 진정한 민주주의죠. 직장 바깥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아요. 그러나 직장 내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어요.”

 

– 김경욱 전 이랜드노조위원장, 2008년 11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1734456



나는 이 분 의견에 공감하는 쪽이다.
시민들이 외치는 ‘민주주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사실 지금 시민들이 외치는 ‘민주주의’가 이명박에 대한 적대감 이상, 이하도 아니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이 이명박이 물러나거나 굴복하면, 한나라당이 몰락하면, 조중동이 폐간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요즘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제 2의 노무현이 나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무현 역시 경제적으로는 비민주적이었다. 오늘 있었던 재보궐선거에서 비겁한 무소속과 민주당이 휩쓴 것을 보면 시민들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닿아있는지 아리송해진다. 물론 일반 시민의 눈에 합당한 대안이 없어 보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이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각자가 처한 비민주적인 상황에 대입되어야 한다.
사회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갑과 을의 노예관계, 세대간 불평등, 88만원 세대, 경쟁 일변도의 교육 등 각자가 처한 문제에 이 ‘민주주의’를 대입해야 한다.
그래서 각자의 민주주의에 관한 절박한 문제들을 이 해방구적 공간에 쏟아내야 한다.
이미 촛불집회는 광우병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총체에 대한 거부와 불복종 운동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달리 말하면 각자가 처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만을 더 구체화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쏟아내야 한다.
(그리고 점점 그럴 만한 타이밍이 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의 대치 그 이후, 만일 시민이 승리한다면 그 순간 쏟아놓은 문제들에 대한 전격적인 해결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서 10대는 대학 서열 폐지, 평준화를, 20대는 실업문제 해결과 비정규직 철폐를, 30대 이상은 양극화 해소와 갑과 을의 불평등 해소(대기업-중소기업 불균형 해소)를 성취하고…그래서 승자독식 사회로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춰 세워야 한다.
프랑스 68혁명을 의식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놀라운 해방구에서 한국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면 더 이상의 기회와 가능성은 없을지도 모른다.
촛불의 외침은 더 다양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

내용 보충 : 글 읽고 바로 드는 생각 갈겼더니 몇 개 빠뜨린 게 았다. 위 글을 쓴 사람은 지금 촛불을 든 시민들을 다중이라고 보고 있다. 다중은 자율적이지만 이질적이고, 이들을 지금 묶어 주고 있는 것은 ‘광우병’과 ‘이명박의 비민주적 독선’이다. 이 핫이슈로 묶여 있지만 사실 이들은 각기 절박한 이유로 거리에 나왔다. 과연 이들 각자의 불만이 이 촛불의 거리에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들 각자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회의가 든다는 말인 것 같다. (어쩌면 촛불을 든 시민들은 한국사회에서 다중의 역할과 의미를 묻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될지도…음…?)

홈에버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 투쟁이 (맨유와 FC서울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조급해진…이런 빌어먹을)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어쩄든 끝이 났다. 홈에버와 비정규직은 이제 기사의 꼭대기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노동과 자본, 노동과 국가(또는 여성과 자본, 여성과 국가)가 이걸 부여잡고 끝까지 내달리는 격발이 된다면 좋겠지만, 또 자본과 국가가 승리한 채 마무리되는 지겹도록 부도덕한 결말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도 수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법안을 ‘이용’하여 비정규직을 부당하게 해고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고 개중에 몇몇은 끝내 파업을 보게 될 것이고 정부는 파업의 불법성을 이유로 파업을 끝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의 투쟁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래서 이번 홈에버 비정규직 파업을 바라보면서 이랜드 그룹의 가려져 있던 부도덕을 얘기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국가의 부도덕, 즉 기업의 (사전)불법에 관대하고 노동자의 (사후)불법에 엄격함을 얘기해야 한다. 이건 항상 반복되지만 뒤로 밀려나는 진실이다. 사적 불만이 공적 불만을 가로막는 것처럼.